성장하는 수컷, 좌절하는 수컷
  • 이형석 (<헤럴드경제> 기자) ()
  • 승인 2006.0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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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키워드] 폭력의 소비 구조:<싸움의 기술> <야수>

 
얼굴에 피멍이 가실 날이 없는 ‘왕따 고교생’이 ‘초절정 싸움 고수’로부터 비기(秘器)를 전수받는다는 내용의 <싸움의 기술>은 폭력의 흥미로운 소비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지구를 지켜라>와 <범죄의 재구성> 이후 연기자로서 가치를 재평가받으며 그 나이대에 흔하지 않은 주연급 배우로 제2의 전성기(사실 제1의 전성기가 있었나 싶기도 하다)를 보내고 있는 백윤식(59)의 명연기가 지극히 매력적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주먹 한 두 방에 상대편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지는 ‘17대 1’류의 구식 할리우드 활극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이 영화에는 남자들에게 중학교 시절부터 전설처럼 내려오던 ‘비기’들이 고스란히 재현된다. 가령 ‘무조건 선빵, 맥주병을 깰 때는 비스듬히 비껴서, 힘에서 질 때는 형광등이 최고’ 따위다.

이 ‘실용 액션’은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권상우가 교내 ‘짱’과 대결하기 위해 옥상으로 가던 중 앞서가는 상대의 뒷머리를 쌍절곤으로 내려치던 반칙의 순간, 혹은 <간첩 리철진>에서 간첩 역의 유오성이 고교생 신하균에게 주먹 쥐는 방법을 통해 가르쳐주던 싸움의 세기(細技)와 맞닿아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은 대학 진학이 어려운 공업고등학교다. 이곳에서 폭력은 도처에 존재하며 일상적으로 행사된다. 교사가 학생을 욕하며 개 패듯 패고, 교사로부터 맞은 학생은 교실 안에서 또 다른 희생양을 고른다.

<싸움의 기술>, 약육강식 사회 그려

이 폭력의 사슬에서 가장 마지막 고리에 있는 학생(재희 분)이 주인공이다. 거듭되는 폭력에 지칠 대로 지친 주인공은 어느 날 마을 도서관에 흘러들어온 정체불명의 싸움 고수(백윤식 분)를 만나게 된다. 삼고초려 끝에 어렵게 제자(?)가 된 학생은 소림사에 들어간 무술 초년병처럼 먼저 밥 짓고 빨래하는 것부터 일종의 수련을 시작한다. 

매일 얻어터지던 한 소년이 실상은 적에게 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두려움과의 싸움에서 져왔다는 ‘인생의 지혜’를 터득하는 성장 영화의 외양을 띤 이 작품은 <말죽거리 잔혹사>를 매우 닮았다. 하지만 <말죽거리 잔혹사>가 가진 정치적 수사와 은유를 모두 배제함으로써 폭력을 소비하는 쾌락을 극대화한다. 소년이 ‘수컷’으로 다시 태어나는 학교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는 유신시대 권력의 축소판이었으나 <싸움의 기술>에서는 삶의 불변 조건, 혹은 약육강식이라는 자연적 질서의 사회적 반영처럼 보인다.

 
폭력은 기원이 없으나(혹은 폭력의 기원에 대해 영화는 침묵하지만) 구조적이다. 기원 없는 구조로서 폭력의 순환은 교사에서 강한 학생으로, 강한 학생에서 약한 학생으로 이어지는 먹이사슬과, 교내 ‘싸움짱’이 하우스에서 ‘꽁지’ 노릇을 하다 힘들게 들어간 동네 폭력 조직의 위계 질서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도코다이’(단독)로 활동하는 싸움 고수 백윤식(그는 청부 살인 업자쯤으로 암시된다)은 이 철저한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힘의 미덕을 갖추고 자유주의·개인주의를 체현한 ‘낭만화되고 이상화된 개인’이다.

이 영화에서 백윤식에 대해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 예의 무표정한 얼굴과 미묘한 톤의 대사는 이 작품에서 역시 반어적이고 역설적인 쾌감을 선사한다. 그의 연기에서 진지함과 코미디는 서로를 배반하고 비극과 희극 사이에서 반전을 일으킨다.

<야수>, 권상우의 육체와 폭력 소비

지난해 <태풍>과 동시 개봉이 무산된 권상우·유지태 주연의 대작 누아르 <야수>는 거대한 구조적 폭력과 이에 대항하는 개인의 폭력 간 대결 양상을 통해 폭력을 소비하는 한편, 시스템의 폭력을 비판하는 이중의 ‘전선’을 가진 작품이다. 

이 영화는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형사(권상우 분)와 늘 합리적이고 적법한 해결 방식을 고집하는 검사(유지태 분)가 파트너를 이루어 공적에 대항한다는 점, 수사 과정에서 두 명의 이질적인 인물이 서로를 닮아간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목표가 결국은 비극적으로 좌절된다는 점에서 <살인의 추억>과 맥이 닿는다.

다만 <살인의 추억>이 ‘무능력한 시대, 무능력한 공권력’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 영화는 ‘정치권력과 커넥션을 이룬 조직 폭력’을 공적으로 내세우고 형사와 검사, 두 명의 개인을 고립시킴으로써 ‘공권력의 구조적 부패’에 포커스를 맞춘다는 점이 다르다.

고립된 개인은 쓰디쓴 좌절감 속에 패퇴하고, 결국 사적인 폭력으로 해결을 시도한다. 할리우드 장르의 문법과 작가적 야심이 위태롭게 균형을 맞추었지만, 막판까지 밀어붙이는 스트레이트한 힘을 가진 이 영화는 권상우의 육체와 폭력을 소비함으로써 ‘상업적 미덕’을 지켜낸다.

<싸움의 기술>에서 ‘수컷’은 성장하고 <야수>에서 ‘수컷’은 좌절한다. 폭력을 다룬 대중 영화의 함수는 아마도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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