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으로 들어온 우리 안의 타자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6.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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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정면으로 응시한 작품 잇달아 나와

 
미싱 보조사 찬드라가 경찰에 체포된 데에는 그가 돈 없이 식당 밥을 먹었다기보다는 한국말을 잘 못하는 동남아 출신이었다는 점이 더 크게 작용했다. 그는 행려병자로 취급받아 6년4개월 동안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이 영화 같은 실제 이야기가 영화로 제작되었다. 지난해 개봉한 옴니버스 영화 <여섯 개의 시선> 중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가 그것이다. 

옆 흑백 사진 속 주인공의 이름은 정길성씨(23). 그는 중국동포 3세 산업연수생으로 현재 경기도 화성의 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은 찬드라와 똑같은 이주노동자 신세다. 하지만 그는 곧 대한민국 국민이 된다. 한국 국적을 가진 외할아버지 부부가 귀국 수속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씨 이야기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인권 사진집<어디 핀들 꽃이 아니랴>(현실문화연구)에 실려 있다.

다큐멘터리나 사진·에세이 등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만나는 것은 낯설지 않다. 한국 경제의 한 축을 지탱하면서도 여전히 이방인인 그들을 향한 벽이 문화 장르에서나마 무너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다큐나 에세이가 주로 인권에 초점을 맞춘 만큼, 시혜적 시선에 머무는 한계는 어쩔 수 없다. 반면 그들을 우리 내면으로까지 끌어들인 문학 작품들이 최근 여러 편 발표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최근 발표된, 이주노동자를 소재로 한 우리 소설 몇 편을 집중적으로 살펴봤다.

우선 공선옥의 <명랑한 밤길>(<창작과비평> 2005년 가을)을 보자. ‘나’는 좁은 집에서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간호조무사다. 공단 길을 지나다니며 외국인 노동자들과 마주치는 게 ‘신물이 다 날’ 정도이던 어느 날,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난다. 내가 무심코 흥얼대는 ‘스피드011’을 듣고 “비벤다의 파두야”라고 말할 정도로 세련된 남자다.

짧은 연애 후, 남자에게 버림받고 나는 꿈에서 깨어난다. 그 순간 내 귀에 싸부딘과 깐쭈(익명의 외국인 이주노동자가 아닌)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내가 만만하게 따라 부를 수 있는 한국 발라드를 좋아하고 내가 떨어뜨린 채소 봉지를 고맙게 가져가는 이웃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주 노동자 통해 우리의 비정한 현실 등 고발

공선옥이 외국인 이주노동자에게 주인공의 타자성을 깨닫게 해주는 거울 역할을 부여했다면, <이무기 사냥꾼>(<문학동네> 2005년 여름)을 쓴 젊은 작가 손홍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사람들로부터 뭇매를 맞을 때마다 꿈쩍 않고 수모를 견디던 아버지를 보고 자란 용태는 밀입국 이주노동자 알리가 죽은 척 연기하며 고통을 참는 것을 본 순간 동질감을 느낀다.

 
둘은 교통사고를 위장해 돈을 뜯어내는 식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둘의 동질감은 공고하지 못하다. 용태는 알리가 입원한 사이 몰래 전세 보증금을 빼내 도망가려 한다. 그러나 알리도 같은 생각이었고, 한발 더 빨랐다. 알리가 먼저 돈을 모두 챙겨 떠나버린 후 용태는 방을 빼러 온 주인 앞에서 죽은 척 연기를 한다. 둘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고발하는 것은 이미 타자화된 이들조차 연대하기 힘들어진 우리의 비정한 현실이다.

밑바닥 인생들만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만나는 것은 아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파라21> 2004 봄)에서 고종석은 코스모폴리탄적 시대를 사는 지식인의 관점으로 이 문제를 던진다. 화자는 한국인 아내와 결혼한 프랑스인 의사다. ‘나’는 원정 출산과 기러기 아빠, 영어 발음을 위해 혀 수술을 하는 아이에 관해 한국인 아내와 그녀의 친척들과, ‘불편하기 때문에 더욱 귀기울여야 하고 덜 말해진 진심까지 헤아리기 위해 더욱 천천히 발음해야 하는 영어’로 이야기한다. 소설이 영어에 함몰된 한국인의 정신 세계를 비판적으로 조망하는 것만은 아니다. 말미에 삽입된 이들과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 사이의 대화는 고종석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암시해준다.

“저도 외국에서 잠시 살아봤는데, 제일 힘들 때가 갑자기 몸이 아플 때인 것 같아요. 늘 몸조심하세요.”
민우가 남자에게 말했다. 선의로 가득 찬 이 말이 내겐 가시처럼 걸렸다. 민우가 말하는 제 외국 생활이란 런던에서 보낸 안식년일 텐데, 그것을 이 네팔 가족의 한국 생활과 나란히 견줄 수는 없을 것이다.

여성 작가 김재영이 최근 펴낸 소설집 <코끼리>(실천문학사)의 표제작도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를 시도한다. 화자는 네팔인 아버지와 조선족 어머니를 둔 소년이다. 축사를 개조해 만든 쪽방 주변의 이웃들도 소년네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기계에 손가락을 잃거나 화재에 목숨을 잃는 따위. 네팔 설화 속의 코끼리처럼 이들은 낯선 이국의 땅에서 현실의 무게를 떠받치며 살아간다.

‘반성’의 감상에만 젖어 있는 작품 많아

<코끼리>는 외국인이 소설의 주·조연을 모두 맡고 있다는 점에서 유재현의 <시하눅빌 스토리>와 비슷하지만, 우리 현실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다르다. 작가의 시선은 연민으로 가득하다. 작가는 이런 심정적 연대를 통해 우리 현실의 적대적 구조를 드러내고자 한다. 김재영은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에 깊이 천착하는 작가다. 소설집 <코끼리>에는 표제작 외에도 러시아 무희의 이야기를 다룬 <아홉 개의 푸른 쏘냐>가 실려 있다. 

 
이명랑의 <나의 이복형제들>(실천문학사)에서 드디어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은 우리네 삶 속에 착근한다. 집을 나온 부랑소녀 영원, 장애인 처녀 춘미, 인도인 잡역부 깜뎅이, 중국인 다방종업원 머저리 등은 영등포시장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하등 차이 없는 밑바닥 인생들로, 이른바 ‘이복형제들’이다. <삼오식당>의 작가 이명랑은 이들이 ‘협동합시다 아저씨’나 ‘박씨 아저씨’처럼 시장 질서를 주도하는 인물들과 맞서 연대하는 모습을 뭉클하게 그려낸다.

이전에도 한민족의 경계를 넘나든 한국 소설이 여러 편 있었다. 고종석 김이태 윤애순 김영하 이혜경 방현석 등이 외국을 무대로 외국인이 등장하는 소설을 썼다. 그러나 대개 외국이나 외국인은 그야말로 ‘배경’이었을 뿐이었다. 한국인 주인공이 정체성 위기를 겪다가 외국으로 ‘탈출’하고, 사건을 겪으며 자기를 되돌아보는 식이다. 반면 최근의 작품들은 ‘우리 안의 타자들’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하지만 아직 초창기여서, 단순한 풍속 소설처럼 읽히거나 ‘반성’의 감상에만 젖어 있는 작품도 많은 편이다. “힘겹게 연대는 형성되었지만 아직 이들을 소외시킨 구조적 모순에 대한 서사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는 타자성의 영역을 넓히고 있는 우리 소설들이 추구해야 할 새로운 서사의 길이기도 할 것이다.” 문학 계간지 <문학들>(2005년 겨울)에  <외국인 노동자:우리 안의 타자들, 타자 안의 우리들>이란 글을 발표한 문학 평론가 서영인씨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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