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무 죄·무전유죄 ‘유령’ 은 죽지 않았다
  • 신호철 기자 · 안경원 인턴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6.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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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있는 사람, 솜방망이 처벌 여전…‘지강헌 사건’ 영화로 부활

 
“범인들이 있던 고씨네 집에서 ‘악’ 하는 비명 소리가 나자 치안본부(당시 경찰청) 소속 대테러 특공대가 벼락처럼 들이닥쳤다. 나는 특공대를 쫓아 방안으로 들어갔다. 17년이 지난 일이지만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그 긴박했던 순간 안방 카세트 테이프에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록그룹 스콜피언스의 ‘홀리데이’였다.”

1988년 10월16일 낮 12시35분께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김동률박사(현 KDI근무)는 인질극이 벌어지고 있던 서울시 서대문구 북가좌동 고씨네 바로 옆집에서 경찰과 동행 취재 중이었다. 이날 새벽부터 경찰과 대치 중이던 인질범 가운데 2명은 권총 자살했고 주범 지강헌은 깨진 창 유리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놀란 인질이 비명을 질렀고 경찰이 들어가 지강헌에게 총을 쏘았다. 지강헌은 몇 분 더 숨을 버티다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9일 동안 서울 시민을 경악과 충격으로 몰았던 탈옥수 지강헌 사건은 그렇게 끝났다.

지강헌 사건은 발생한 지 17년이나 지났지만, 1980년대를 살았던 한국인에게 잊을 수 없는 잔혹극으로 남아 있다. 1988년 10월8일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충남 공주교도소로 이감 중이던 죄수 12명이 호송 차량을 탈취해 도주했다. 이들은 8박9일 동안 서울 시내 가정집 다섯 곳을 돌아다니며 ‘9시 뉴스’를 장식했다. 주범 지강헌(당시 35세)을 비롯한 4명은 10월16일 13시간 동안 경찰과 대치하며 인질극을 벌였고 그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면서 온 국민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영화 <홀리데이>, 지강헌 사건 재해석

 
그런데 이 사건은 보통 탈옥 사건과 다른 특이성이 있었다. 범인들에게 집을 내준 시민 인질들은 기이하게도 그들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가졌다. 지강헌 일행은 말이 많았다. 자살 전까지 이들은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無錢有罪), 우리나라의 법이 이렇다’ ‘단 하루라도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다’ ‘죄수가 어떻게 돈으로 판검사를 살 수 있느냐’ 따위의 항변을 세상을 향해 봇물처럼 토해냈다. 지강헌은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할 범법자가 분명했지만, 세인들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그의 호소에 공감했다.

17년이 지난 지금에도 지강헌 사건이 회자되는 것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그들 외침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28~29쪽 기사 참조). 두산그룹 총수 일가 건이 좋은 예다. 그들은 3백26억원을 횡령했는데도 검찰은 불구속 기소했다.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실이 2005년 11월 말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형사 재판이 부유하거나 가난한 사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똑같이 정의롭고 공정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법조인 73%가 ‘공정하지 않다’고 답했다.

고액 수임료를 받는 전관 변호사를 쓰는 것과 국선 변호사를 쓰는 것 사이에는 유·무죄는 물론 법정 형량이나 보석·감형 여부에까지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법 현실이다.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으면 법정 구속률이 3~4배 높아진다는 통계도 있다. 가난은 애초에 범죄 동기 자체가 되기도 한다.

전경환씨가 ‘유전무죄’ 외치게 만들어

'홀리데이' 탈주일지

1988년 10월8일
서울 올림픽이 끝난 지 엿새가 되던 화창한 토요일. 영등포 교도소에서 공주 교도소로 이송되던 재소자 12명이 호송 버스에서 탈주함.
10월9일
한재식 등 4명이 곧 검거되고 1명이 자수.
10월11일
지강헌 등 7명은 행당동 박 아무개씨 집에서 25시간 은신.
10월14일
서울대학교 구내 주차장에서 정 아무개씨를 납치 한 후, 문정동 정씨 집에 잠입.
10월15일
정씨의 집을 떠난 범인들 중 한 명은 신촌에서 체포. 김동연은 자수. 남은 5명 중 김길현은 일행과 헤어짐.
10월15일 밤 9시40분
지강헌·강영일·안광술·한의철은 서대문구 창천동 손씨 집에서 북가좌동 고씨(55) 집으로 이동.
10월16일
새벽 4시. 범인들이 잠들자 집을 빠져나온 고씨가 서부경찰서 북암 파출소에 신고. 경찰 특공대들이 고씨 집을 포위.
오전 10시46분. 심장이 좋지 않은 고씨 부인과 막내아들이 1차로 석방.
낮 12시쯤 안광술·한의철이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
낮 12시19분쯤 지강헌이 유리를 깨 자해함. 경찰 특공대원들이 들어가 권총 두 발을 발사. 2층 옥상에서 강영일 검거.
오후 4시55분.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진 지강헌 사망.

최근 지강헌 사건은 영화로 부활했다.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홀리데이>가 제작되어 개봉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흥행은 미지수지만 이 영화를 계기로 지강헌 사건은 ‘재해석’될 것이며 이 사건의 ‘현재성’이 논란 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개발시대가 낳은 부작용이었다” 전직 기자 김동률 박사는 지강헌 사건을 이렇게 정리한다. 당시는 88올림픽이 막 끝나고 전두환 독재 정권의 그림자가 노태우 정부까지 이어지던 때였다. 경제는 외형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지만 산이 높은 만큼 소외된 자들의 골은 깊었다. 김 박사는 10월16일 오전 10시 30분경 고씨네 집에 전화를 걸어 지강헌과 마지막으로 통화한 주인공이다.

지강헌은 자살하기 12시간 전까지도 수화기를 놓지 않았다. 그만큼 할 말이 많았다. “17년 전이라 정확한 문장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사회에 대한 불만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도소 내에 인권 유린·가혹 행위가 많다는 것, 법 집행이 돈에 의해 좌우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분명히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김 박사는 ‘그토록 세상에 억울함을 알리고 싶다면 종이에 그 여덟 자를 써서 뒤쪽 창문으로 던져라. 그러면 사진을 찍어 신문에 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뒤쪽 창문에 저격수가 있다는 것을 안 지강헌은 이 제의에 응하지 않았다.
지강헌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친 배경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씨가 있었다. 지강헌은 교도소 탈출 전인 1988년 9월  전경환씨가 수십억원을 횡령해 징역 7년형을 받았다는 신문 기사를 봤다. 5백56만원을 훔쳐 17년(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을 받은 자신보다 전씨의 형량이 훨씬 더 낮다는 데 분노했다. 법정 형량을 넘어 보호감호를 할 수 있게 한 사회보호법은 전두환 정권이 발명해낸 초헌법적 제도였다. 보호감호제도는 인권 단체로부터 비판을 받다 2005년 10월에야 폐지되었다.

유전무죄 있는 한 ‘지강헌 사건’ 되풀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영화 <홀리데이>를 관통하는 주제다. 1월10일 시사회장에서 영화 제작사인 현진씨네마 이순열 대표는 “가진 자들로부터 소외받는, 가지지 못한 자들의 삶을 다루는 게 기획 의도였다”라고 말했다. 이날 시사회장에는 1998년 10월14일 지강헌 일당에게 인질로 붙잡혀 있었던 시민도 참석했다. 인질 가운데 가장 오래 52시간 동안 억류되었던 정 아무개씨(당시 문정동 거주·현재 벤처기업 대표)는 “무전유죄·양극화 현상이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영화에서 그걸 보여주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는 시사회장 옆자리에 앉은 기자에게 “지강헌이 죽을 때 입고 있던 티셔츠는 내 것이다. 우리 집에서 가져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988년 10월14일 지강헌 일행은 정씨 집에서 “우리는 연희동(전두환 자택)에 가서 따질 것이다”라고 호언하는가 하면 법무부 장관에게 보내는 편지도 썼다. 이날 상영된 영화 속에서 지강헌(극중 지강혁)은 전두환의 뒷모습만 보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실제로 이들은 경비가 삼엄해 연희동에 접근조차 못했다.

시사회가 끝나고 배우 기자회견 시간에 한 기자가 “영화에서 범인들이 인질을 쉽게 풀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과연 그게 사실이냐?”라며 의아해 했다. 믿기 힘들지만 사실이었다. 지강헌이 정씨 집에 들어서자마자 했던 첫마디는 “저희 2박3일간 있겠습니다”였다. 정씨는 부인과 딸을 다른 방으로 보낸 뒤 ‘우리 식구는 건드리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지강헌은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밥도 자기들이 해먹고 설거지도 했다. 지강헌 일행이 ‘캡틴 큐’ 한 병을 사 와서 정씨와 같이 마셨는데 정씨는 술이 좀 오르자 집에 담가두었던 포도주를 꺼내 술병을 비웠다. 술자리에서 지강헌 일당은 정씨에게 불우했던 과거를 토로했다. “한 명은 미용사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전과 때문에 취직되었다가 해고되었다며 억울해 했다. 양부모 밑에서 살다 가출한 사람, 어릴 때부터 소년원을 다닌 범인도 있었다.”

또 다른 인질 가족 중에는 선처를 바란다며 탄원서를 제출한 사람도 있었다. 10월11일 인질로 잡혔던 박 아무개씨(당시 행당동 거주)다. 그는 1988년 12월 서울지검에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냈다(사진). 탄원서 내용은 이렇다. <···(범인들과) 자연스럽게 식사도 커피도 먹고 마시게 되었습니다.···이들은 ‘잘 먹었습니다. 아주머니’ ‘신세 많이 지고 간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맨 나중에 남은 지강헌과 강영일 두 사람은 우리 식구에게 자기네가 떠나면 곧 신고하라고 했으며 남동생 보고 공부 열심히 해서 자기네처럼 되지 말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고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발길을 돌렸습니다.···이들이 가고 난 후 솔직히 우리 네 식구 모두 울었습니다.···이렇게 정겹고 착한 이들이 탈주범들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강헌을 만난 사람들은 그를 과묵하지만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지강헌의 친척인 지아무개씨는 “유족들은 영화 개봉에 관심 없다”라며 언론 인터뷰를 거절하면서도 “그는 음악과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지강헌의 꿈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신춘문예에 두 번이나 응모를 한 적이 있는 문학지망생이었다. 그는 그룹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좋아했다. 문정동 정씨네 집에서도 그는 벽에 꽂힌 LP 중에서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뽑아 틀었다.

10월16일 경찰과 대치하며 마지막 운명을 예감한 그 순간에 지강헌은 경찰에게 <홀리데이> 테이프를 가져다 달라고 요구했다. 이 일화 덕분에 지강헌 사건에 드라마적 느낌이 더해졌다. 혹자는 지강헌 사건을 ‘홀리데이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이명세 감독은 탈옥범을  다룬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주제곡으로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썼다. 하지만 경찰은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아니라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던 스콜피언스의 홀리데이 테이프를 줬다. 안타깝게도 지강헌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이 듣고 싶었던 곡을 듣지 못하고 죽었다.

 
그 후로 17년이 지났다. 당시 고씨네 집에서 생포된 강영일씨는 현재 대구교도소에 복역 중이다. 강씨는 2007년 6월 석방될 예정이다. 마지막 인질 고 아무개씨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수사본부장이었던 김우현 서울시경국장은 사건 수습 후 치안본부장으로 승진했으나 현재는 현대아산병원 중환자실에서 투병 중이다. 지강헌을 분노하게 했던 전경환씨는 사기 혐의로 피소되어 현재 도피 중이다.

취재 기자였던 김동률 박사는 지금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원으로 있다. 그는 참혹했던 그 순간 카세트녹음기에서 '홀리데이'  테이프를 꺼내 남몰래 간직하고 있었다. 수사가 종결되고 사건이 세인의 기억속에서 지워질 무렵, 그는 테이프를 한강물에 흘려보냈다고 말했다. 그렇게 지강헌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그는 영화 개봉을 계기로 부활하고 있다. 한국의 법 현실에서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완전 종식되지 않는 한 지강헌 사건( 홀리데이 사건)은 끝없이 되새김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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