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군기지가 싫다.”
  • 이용주 인턴기자 ()
  • 승인 2006.0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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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대추리 황새울의 절규

 
나는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에 살고 있는 대추리 황새울이다. 요즘 나를 둘러싼 긴장과 갈등 때문에 숨이 막힐 정도다. 내 한 편에 자리 잡고 있는 미군 기지를 넓힌다고 해서 말이다. 한강 위쪽에 있는 미군 기지를 모두 합쳐 나에게 보내겠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후로 내 몸 위에서 바람 잘 날이 없다. 어쩌면 내 일부가 아닌 전부가 미군 기지로 변해버릴 지도 모른다.

수십 년간 내 품에서 살았던 사람들도 적지 않게 놀란 듯하다. 내 품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고 충분히 정들었으니 딱하기만 하다. 졸지에 나와의 생이별을 통고받았으니 억울하고 분할 테지. 원래 나는 비옥한 땅이 아니라 갯벌이었다. 1943년 일본 해군 시설대(302부대)가 비행장을 건설하고, 1952년 미군이 이 비행장을 접수해 기지 확장 공사를 하며 쫓아낸 농민들이 내 품으로 몰려들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맨주먹뿐이었던 이들이 피땀을 흘리며 나를 옥토로 개간했다. 이들에게 나는 목숨보다 소중한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농민들은 ‘이 땅은 우리 목숨, 끝까지 지킨다’고 외치며 나를 떠날 수 없다고 한다. 올해 봄에도 내 몸에 모를 심고 농사를 짓고 싶다고 절규한다. 나는 이들의 절규가 가슴 저리도록 고맙다.

다른 사람들은 담담한 것 같기도 하고 아예 무관심해 보이기도 한다. 미군 기지가 필요하니 내 일부를 떼어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고, 내가 어디에 있는 누구인지 전혀 모르기도 한다. 나는 불안하기만 하다. 불투명한 미래보다 나와 내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가 망각되는 것이 더 걱정된다. 어느 날 갑자기 미군 기지로 변해버릴 지 모르는 내 심정을 이 기회에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그들이 돌아왔다. 1월 3일부터 13일까지 11일간 트랙터를 몰고 전국 1200km를 누빈 ‘미군기지 확장반대를 위한 팽성 주민 트랙터 전국 평화순례단’ 농민들이 14일 저녁 7시가 넘어 대추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돌아왔다. 이 친구들은 무모한 시도라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논바닥이 아닌 아스팔트 도로 위에 트랙터 7대를 끌고 나섰다.

이들은 부안`광주`부산`대전 등을 돌며 낮에는 트랙터 행진, 밤에는 촛불행사로 자신들의 처지를 시민들에게 알렸다. 원래 서울까지 가려고 했는데 안성에서 경찰이 이들의 행렬을 막았다. 그 바람에 도로 위에서 하루를 보내고 오늘에서야 내 품에 다시 안긴 것이다. 눈에서 절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때마침 이 날 저녁 대추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를 위한 팽성 주민 촛불 500일 기념문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마을 주민을 비롯한 시민단체 회원과 학생 500여명이 이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오랜만에 다시 듣는 트랙터의 묵직한 울림이 경쾌하게 느껴졌다. 올해 모내기를 하기 전에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저 트랙터들이 나를 밟고 지나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을 주민들의 소원은 ‘올해도 농사짓자’는 단 하나라고 한다. 촛불 500일 기념 문화제 중에 ‘올해도 농사짓자’는 큰 글자를 준비해 불을 붙여 놓기도 했다. 대나무와 짚으로 만든 달집태우기를 하며 액막이와 풍년을 간절하게 기원했다. 그들의 소원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3년 전으로 기억한다. 한미연합토지관리계획이 발표되었는데, ‘대추리 황새울’이란 내 이름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내가 미군기지 터로 사용된다는 것이었다. 그 후 한강 위에 자리한 미군 기지들이 합쳐져 내가 있는 곳으로 내려온다는 소문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전국에 산재한 미군 기지들이 통․폐합 돼 나와 대구․부산 두 곳을 중심으로 재편된다고 한다.

 
왜 이렇게 옮기는 것일까 귀 기울여 보니 소름이 끼쳤다. 기지를 단순히 옮기고 넓히는  차원을 넘어 무시무시한 계획이 도사리고 있었다. 내가 휴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중국과 가까운 서해 쪽에 있기 때문에 북한과 중국을 겨냥한 군사 기지로 제격이라는 것이다. 군사전략이란 미명으로 나를 사용한다는 꿍꿍이가 무섭기만 했다.

나는 말을 못하지만 입이 있는 농민들이 발끈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탄식했다. 그들은 2004년 9월 1일 처음으로 촛불을 들었다. 어린 아이부터 일흔을 넘긴 노인들까지 나를 지키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촛불을 볼 수 있었다. 촛불을 볼 때면 가슴 벅차기도 하지만 저들은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에 여러 모로 심란해진다. 그래도 저 촛불 하나하나가 소중하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떠난 것은 사실이다. 지난 해 여름부터 ‘협의매수’란 이름으로 돈을 받고 국방부에게 나를 팔아버리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그러나 나를 버린 자들은 내 위에서 살지 않는다. ‘외지인’들이 대부분이다. 마을 주민 중 몇 명도 국방부와 한국토지공사의 다그침을 못 이겨 나를 버리기도 했다. 내 몸뚱이의 80% 정도가 언제든 미군 기지로 변해버릴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내 품에서 나와 함께 살았던 많은 친구들이 나를 버리지 않고 있다. 눈물 나게 고마울 뿐이다. 나를 비옥하게 만들었고 50여년이 넘도록 동고동락한 그들이 아닌가.

나와 그들 사이의 정(情)은 돈 몇 푼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를 떠나는 대가로 받은 돈을 갖고 다른 곳에 가서 살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백 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치자. 내 친구들이 보상받을 수 있는 돈은 다른 곳에 정착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다. 보상금을 정하는 토지조사나 주민공청회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때가 되었으니 어서 나가라는 꼴이다.

실제로 국방부는 지난 해 말 등기이전을 마쳤다. 내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마을 주민들에게 나가라고 한다. 내 친구들이 나를 불법점거하고 있다며 강제철거 운운하고 있다. 내가 봐도 너무 억울하다 못해 할 말을 잃을 정도다.

 
내 몸을 가로지르는 미군기지 울타리의 느낌은 안팎이 확 다르다. 안쪽은 아스팔트와 군사 시설로 뒤덮인 반면 바깥쪽은 벼가 자라고 친구들의 발걸음이 느껴진다. 안쪽의 삭막함과 냉혹함이 바깥쪽의 온기를 밀어내지 않을까 두렵기만 하다. 내 몸 위에 군대와 전쟁 보다는 생명과 평화가 깃들었으면 한다.

나를 많이 찾아오는 황새 때문에 사람들은 나에게 ‘황새울’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올해에는 얼마나 많은 황새들이 나를 정겹게 찾아올까? 과연 볼 수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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