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게뭉게 피어나는 붉고 흰 꽃, 꽃, 꽃
  • 최 완(여행가) ()
  • 승인 2006.0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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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 마중’하기 적합한 명소 3곳

 입춘이 지났다. 지난 주 한바탕 큰 눈을 치러냈으니, 바야흐로 봄도 길목에 들어선 모양이다. 슬슬 꽃 소식이 궁금해진다. 옷깃을 파고드는 겨울바람이 아직 매섭지만, 남도에는 붉고 노란 화신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다. 동백 소식은 임 당도했고 곧 매화·산수유 소식이 날아들 것이다. 이 땅의 꽃놀이 스케줄은 2월 중순 거문도에서 시작된다.

 
푸른 바다, 붉은 동백
 여수에서 1백14.7㎞ 떨어진 섬, 거문도. 쾌속선으로 두 시간이면 닿는다. 여수와 제주의 중간에 있다. 연평균 기온 16도로 서귀포와 함께 전국에서 가장 높다. 1867년 거문도를 방문한 미국 슈펠트 함장은 이렇게 적었다. “한겨울인데도 따뜻하다. 여름철 중국 해안의 혹서와 살인적인 열기에 비하면 이곳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은 너무 매혹적이어서 떠나기조차 싫다.”

여수항을 떠난 배가 거문도에 닿았다. 동도와 서도, 고도 3개 섬이 반월 모양으로 감싸고 있는 내항은 고요하다. 태풍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기 때문에 3천t급 화물선도 정박할 수 있다. 이 고요한 항구를 차지하기 위해 영국과 러시아가 싸웠고, 1885년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국이 2년여 동안 무단 점령하기도 했다.

 거문도 등대로 간다. 거문항에서 연륙교인 삼호교를 건너면 서도. 서도의 수월산 남쪽 끝머리에 거문도 등대가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며 서 있다. 1905년 세워진 동양 최대의 등대다. 90만 촉광의 프랑스제 프리즘 렌즈에서 나오는 적색과 백색의 불빛은 15초마다 교차하며 42㎞까지 뻗어나간다. 예전에는 짙은 안개가 끼었을 때 소리로 선박을 안내하는 무적(霧笛) 나팔이 앉아 있었지만, 지금은 등대지기 사무실 옥상으로 치워졌다.

 등대까지 가는 1.2㎞ 남짓한 산책로는 동백 터널이다. 2월 중순부터 절정을 이루지만 성질 급한 놈들은 이미 피었다가 스러져 내렸다. 길바닥에는 붉은 동백이 핏자국처럼 뚝뚝 떨어져 있다. 목을 꺾으며 주저 없이 떨어져 내린 모양이 ‘잔인하게’ 아름답다.

 등대에서 보는 바다는 봄빛이다. 바닷빛은 연초록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옥빛이다. 낚시꾼들을 실어 나르는 배가 지나갈 때마다 바다에는 흰 포말이 인다. 하늘빛과 바닷빛에 경계가 없다. 

 거문항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영국군 묘지가 있다. 영국군 수병 찰스 댈리가 100년이 넘도록 타향의 차가운 땅 속에 동료들과 함께 누워 있다. 서양식 십자가 무덤과 비석이 오히려 예쁘게만 보이는 곳. 한 번쯤 산책 삼아 가볼 만하다.

 
붉은 강위에 내리는 매화꽃비
 남해 섬들을 스치며 시작된 봄은 섬진강변 백운산 자락에 자리잡은 광양시 다압면에서 화장을 바꾼다. 경남 하동에서 섬진강을 따라(19번 국도) 전남 광양으로 간다. 섬진강은 여리고 수줍은 강, 봄이 눈부신 강이다. 낮이면 은빛, 저물 무렵이면 붉은 빛으로 바뀐다. 그 강, 강가에 흐드러지게 핀 매화에 봄 햇살이 반짝이고, 해가 질 때면 노을이 강을 따라 슬금슬금 내려온다. 광양까지 봄날 드라이브를 즐긴다.

 드라이브가 끝나는 곳에 있다. 매화 마을! 산기슭에 피어 있던 눈부신 매화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곳. 해마다 3월이면 매화를 보겠다고 전국에서 상춘객들이 몰려든다. 매화 마을에서도 유명한 곳은 청매실농원이다. 10만평 산자락 전체에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다. 3월 초부터 꽃이 피고 중순이면 만개한다. 청매실농원은 매화나무 아래에 보리를 심는다. 푸른 보리밭과 어우러진 새하얀 매화나무가 싱그러운 봄 풍경을 연출한다. 2천 개가 넘는 매실 장독도 청매실농원이 아니면 쉽게 보지 못할 풍경이다.

 이리저리 걸으며 매화를 즐기는 일도 좋지만, 올해에는 솜뭉치 같은 매화를 부러질 듯 매단 매화나무 가지 아래에 앉아 보시라. 가난한 살림에서도 단원 김홍도가 매화나무를 왜 샀는지 알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침저녁으로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살림이 어려웠다는 단원은 어느 날 그림을 팔고 그 값으로 3천 냥을 받았다. 그 중 2천 냥으로 매화나무를 사고 남은 돈 가운데 2백 냥은 양식을, 나머지 8백 냥은 친구들을 불러 술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이를 매화음(梅花飮)이라고 했다. 매화나무 아래 매화의 그윽한 향기를 맡으며 마시는 술을 일컫는다. 

 봄바람이 불면 매화는 순식간에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꽃비가 우수수 내릴 때쯤이면 산에는 앵두가 발갛게 익고 백리 길 양옆에 심은 벚꽃이 화들짝 핀다. 섬진강의 봄은 그렇게 온다.

 
초록 들판에 핀 하얀 목련
 동백과 매화가 한바탕 요란하게 피고지면 목련이 굵은 꽃망울을 툭툭 터뜨리기 시작한다. 목련이 나무 아래마다 낭자할 때쯤이면 철쭉과 진달래, 자운영이 들판과 산자락을 붉게 물들일 것이다. 바야흐로 봄이 무르익는다.

 남도 땅 강진에 가면 아득하다 싶을 정도로 너른 들판, 발목을 덮을 만큼 자란 보리가 바람에 일렁인다. 강진만에는 기름진 봄 햇살이 자글거린다. 그리고 황톳길을 어지럽히며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아지랑이…. 노루 꼬리처럼 짧기만 한 봄날이 안타깝기만 하다. 지는 꽃, 가는 봄에 안절부절못하는 이들, 남도 땅 강진으로 가보시라. 봄에 애달았던 시인, 영랑 김윤식의 생가가 있다.

 영랑 생가는 강진 읍내 양지 바른 곳에 자리잡고 있다. 생가에 가려면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지나야 하는데, 영랑 생가가 가까워질수록 영랑세탁소, 모란 빌라, 모란아구찜이라는 간판을 단 가게들이 보인다. 영랑에 대한 강진 사람들의 ‘유별난 사랑’이라고 해두자.

 영랑 생가는 문간채와 안채, 사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생가 문간채 옆에는 훤칠한 목련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봄이면 커다란 꽃송이를 솜뭉치처럼 피워 문다. 사랑채 뒤편에는 동백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다. 사랑채 옆 장독대에는 봄 햇살이 폭포처럼 흘러내린다. 여기서 영랑의 시 한 구절을 읊조려야 하지 않을까.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강물이 흐르네/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은결을 돋우네/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강물이 흐르네’(‘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문간채 왼쪽으로 세로로 놓인 사랑채는 영랑의 집필실이다. 사랑채 툇마루 앞에는 감나무, 보리수, 송악덩굴, 백일홍 나무가 심어져 있다. 3백 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도 있다. 툇마루에 내려앉는 봄볕이 좋다.

“올해는 봄이 일찍 올 것 같네요. 4월 무렵이면 참 이쁘요.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제.” 영랑 생가를 관리하고 있는 박철호씨(42)는 “영랑 선생 생가에 왔다믄 돌담을 걸어봐야제”라며 사랑채를 둘러싼 돌담으로 팔을 잡아끈다. “아마도 영랑 선생이 여그, 툇마루에 앉아서 시를 썼을거구마이. 꼭 요맘때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아마도 그럴 것이다. 돌담에 어룽지는 햇살이 꼭 영랑이 시에 썼던 그대로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봄이 왔다. 그대는 이런 봄을 만난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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