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색 목판화에 스민 따뜻한 리얼리즘
  • 이문재(시인) ()
  • 승인 2006.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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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의 책]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 빼어난 그림과 여행기로 식민지 조선의 삶과 인물 소개

 
19세기 후반, 스코틀랜드 에디버셔. 두 자매가 자라고 있었다. 언니 엘리자베스 키스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대해 남다른 열정을 지녔지만, 붓을 쥘 형편이 못 되었다. 언니는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다. 동생 엘스펫 키스는 일본으로 건너가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 <뉴 이스트 프레스>의 편집인으로 근무하던 로버트슨 스콧의 아내가 된 것이다. 1915년, 동생은 언니에게 초청장을 보낸다. 언니 키스가 28살 나던 해였다.

언니 엘리자베스 키스는 일본에 이내 적응했다. 그리고 4년 뒤, 두 자매는 대한해협을 건너 경부선 기차에 오른다. 1919년 3월28일. 삼일만세운동의 여진이 식민지 조선을 뒤흔들고 있던 때였다. 언니 키스는 캔버스와 물감을 잔뜩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2년 전, 일본에서 저명 인사의 캐리커처 모음집을 펴내 화가로 데뷔한 상태였다. 두 자매는 3개월 가까이 서울을 비롯해 평양, 수원, 원산, 함흥, 금강산 등을 여행하며 한국과 한국인을 스케치했다. 여동생은 먼저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언니는 그해 가을까지 한국 곳곳을 누볐고 그 후에도 몇 차례 더 한국을 찾았다.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 1920~1940>(송영달 옮김·책과함께)가 최근 발간되었다. 이 책은 1946년 허치슨 출판사에서 나온 <올드 코리아>(엘리자베스 키스· 엘스펫 키스 로버트슨 스콧 공저)를 완역하고, 거기에 옮긴이 송영달씨(전 미국 이스트캐롤라이나 대학 교수)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 다음 작품을 추가하면서 그림에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저자가 세 명이다.

옮긴이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키스는 한국 독자들에게는 낯설지만,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화가다. 채색 목판화가로 널리 알려진 그녀의 작품은 일본·영국·프랑스·캐나다·미국의 유명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그녀의 작품 수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올드 코리아>에서 언니는 자신의 수채화 39점을 수록하며 상세한 설명을 달고, 동생은 여행기를 썼다. 이번 책에는 엘리자베스 키스의 작품이 모두 66점이 실렸는데, 새로 실린 27점은 옮긴이 송영달씨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과 미술관 소장품들을 수소문해 수록한 것이다. 그러니까 수채화를 다시 목판화[우키요에; 浮世繪(부세회)]나 에칭으로 제작한 작품과 <올드 코리아>에 흑백으로 실렸던 작품의 원색 원화도 실었다. 우키요에는 17세기 이후 에도를 중심으로 새롭게 등장한 상인 계층의 세계관을 반영한 판화로, 유럽의 후기 인상파 화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의 풍경을 묶은 책들은 적지 않다. 제국주의의 팽창 정책에 휩쓸려 들어가던 조선을 목판화로 담은 화가도 엘리자베스 키스가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른 조선 여행기나 화집과 확연하게 구별된다. 무엇보다도 서양인들이 재구성한 동양, 즉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키스는 한국과 한국인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이해했으며, 급기야 사랑했다. 목판화 <평양 강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을 달아놓을 정도였다. ‘어떤 예기치 못한 프로젝트가 그 오래된 땅의 매혹적인 풍경을 망가뜨리지나 않는지 혹은 파괴해버리지나 않는지 걱정이 되어 한시 바삐 그곳에 되돌아가고 싶은 동경을 느낀다.’

 
그림은 사진의 정확성을 따라갈 수 없다. 그러나 그림에는 사진이 표현할 수 없는 ‘주관성’이 있다. 따뜻한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키스의 그림들에서 사진의 정확성과 그림의 주관성은 행복하게 만나고 있다. 그녀의 그림들에서 인물은 정면을 향하고 있는데, 특히 눈빛이 살아 있다. 그 형형한 눈빛은 카메라 렌즈가 포착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림 속 인물의 눈빛은 화가 키스의 눈빛을 되비춘다. <주막>이나 <두 명의 학자> <과부> <자작 김윤식>과 같은 수채화는 식민지 조선인이라는 특수성을 넘어, 인간 그 자체라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여기에서 키스의 ‘유화 같은 수채화’는 카메라, 즉 기계(근대성 혹은 서양 우월주의)의 차가움을 극복한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여행기도 수준급이다. 그림 못지않게 정확하고 정밀하다. 여동생 엘스펫 키스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당시 한국에 머물던 외국인 선교사·의사·교육자 등의 증언과 각종 문헌 자료를 동원해 일제의 폭정을 고발하고, 독립을 위해 몸부림치는 한국인의 내면 세계와 기질을 포착한다.

그렇다고 정치 사회적인 대목에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다. 서울의 일상적 삶, 여인들의 생활, 무속을 비롯한 풍속, 선비와 관리의 생활을 단아한 문장으로 복원하고 있다. 여행기에는 유관순으로 추정되는 여학생과의 옥중 인터뷰, 김윤식의 초상화, 당시 총독과의 면담도 포함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도 있다. 이 책은 ‘근대(성)’의 문제를 탐사하고 있는 인문학자와 작가들에게 번쩍이는 영감을 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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