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원정에 마침표는 없다”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6.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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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16좌 등정’ 대기록에 도전하는 산악인 엄홍길씨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병원에서였다. 1998년, 안나푸르나에 세 번째 도전했다가 발목이 1백80도 돌아가는 부상을 입고 산을 기어 내려온 그는 경희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 그는 반쯤은 초탈한 상태로, 반쯤은 살았다는 안도감을 내비치며 붕 뜬 얼굴로 기자를 맞았다. 그 뒤 다시 두 번의 도전 끝에야 안나푸르나는 그에게 마음을 열어 주었다. 히말라야의 8천m가 넘는 봉우리 하나하나는 이처럼 어렵게 그를 받아들였다.

2000년, 그는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8천m가 넘는 히말라야 봉우리 14개에 올라 세계적인 영웅이 되었다. 에베레스트에서 K2까지, 14년을 도전하는 동안 그는 열네 번의 실패를 겪었고 열 명의 동료를 히말라야 만년설에 묻어야 했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독자들은 알아챘을 것이다. 산악인 엄홍길씨, 그가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3월 초 그는 높이 8천4백m인 히말라야 로체샤르에 도전한다. 지난해에는 높이 8천5백5m인 히말라야 얄룽캉에 올랐다. 이번 등정에 성공한다면 그는 주봉과 위성봉을 포함해 히말라야의 8천m가 넘는 봉우리 16개를 모두 오른 유일한 산악인이 된다.

‘세계 최초’에 목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세계 등반사에 기록될 대역사에 도전하고 있다. 선발대가 3월5일 떠나고 그는 3월15일 출발한다. 2001년과 2003년 두 번의 실패를 경험한 그는 이번에 코스를 바꿔 수직 빙벽을 타고 정상에 오르는 방법을 택했다.

그를 키운 것은 도봉산이다.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도봉산 기슭으로 왔다. 망월사 입구 쪽에서 도봉산을 오르다 보면 초보자들이 숨을 헐떡일 때쯤 만나게 되는 조그만 공터에는 안내판이 하나 세워져 있다. 그곳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이곳은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3살부터 40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엄홍길 대장은 산과 인연을 맺었고···.’ 도봉산을 오르내리는 등산객들은 이곳에서 잠시 땀을 닦으며 엄홍길과 산 그리고 인생을 이야기 한다.

 
지난 16일 도봉산에서 만난 엄씨는 “어릴 적 저 바위를 타고 놀았고, 저쪽으로 나무를 하러 다녔다”라면서 ‘어머니의 산’ 곳곳을 가리키며 감회에 젖었다. 그는 2000년 4월까지 이곳에 살았다.

어릴 적부터 도봉산을 마당 삼아 뛰어놀았던 그에게 산은 어떤 존재일까. 그는 말한다. “산에 가면 마치 고향에 간 것처럼,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처럼 편안하다. 친한 친구 같은 그런 존재다. 반면 평지를 나다닐 때면 뭔가 부자연스럽고 불편하다. 산은 내 삶 자체다. 어느 새 나 자체가 산이 되었고 산이 내가 되었다. 우리는 둘이 아닌 하나다.”

산악인 유자녀 장학사업도 펼칠 계획

그는 산에 신이 있다고 믿는다. 히말라야에 오르면서 그는 이것을 절감했다. 신이 받아주지 않으면,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절대로 오를 수 없다는 것이다. 등정에 앞서 항상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을 받아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것은 그가 누구보다 인간의 한계를 잘 알기 때문이다.

 
산은 그에게 올라야 할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인생을 가르쳐준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돌아서는 그 순간에 나는 인간적으로 더 성숙해졌다. 산이 나를 받아들이도록 나는 더 겸손해지고 더 노력해야 했다”라고 고백했다. 등정에 앞서 그는 자신과 함께 산에 오르다 숨진 동료들을 위해 기도한다. 이번 로체샤르 등정에서도 그는 함께 이곳에 오르기로 약속했으나 히말라야 초모랑마에서 생을 마감한 동료 산악인 고 박무택씨의 사진을 눈 속에 묻을 예정이다. 박씨와 그는 8천m가 넘는 고봉 네 곳을 함께 오른 절친한 동료였다.

한때 권투 선수를 꿈꾸기도 했던 그는 수중 폭파 작업을 전문으로 하는 해군 특수부대 UDT에서 군 생활을 했다. 물속에서 100m를 헤엄칠 수 있는 강철 체력은 이때 길러졌다. 그의 심폐 기능은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황영조씨보다 강하다. 2백55mm 신발을 신으며 키 1백67cm에 왼손잡이,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양손을 다 쓰는 양손잡이인 신체 조건 또한 험준한 빙벽을 오를 때 큰 도움이 된다. 그는 종교적으로 불교에 의지한다.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는 불교의 연기법은 그가 대원들을 지휘할 때나 산에 오를 때 항상 가슴 속에 새기는 화두다.

 
애초 산이 좋아서 무작정 산을 다녔고 ‘히말라야 14좌 등정’이라는 구체적인 목표가 생긴 뒤에는 그 목표를 향해 뛰었다. 하지만 엄씨는 지금은 오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히말라야’는 높기만 한 것이 아니라 뿌리도 깊다는 데까지 생각이 나아간 것이다. ‘또 다른 히말라야’는 낮은 곳에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12월 ‘희망 원정대’라는 이름으로 장애우 열 명과 함께 아프리카의 지붕 ‘킬리만자로’에 올랐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지난해 초 갔던 네팔에 이은 두 번째 ‘희망 원정대’였다.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이 인간이다. 산을 오르는 일을 통해 그들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꼈다. 희망 원정대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히말라야 원정에 동행했다가 목숨을 잃은 셰르파들을 위해 소속사인 (주)트렉스타의 도움으로 3억원의 ‘휴먼 장학금’을 조성한 것,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사랑의 연탄나눔운동 홍보대사를 맡은 것 등도 그가 찾은 ‘또 다른 히말라야’이다. 그는 자매 결연을 맺어 네팔 어린이들을 직접 후원하는 국제 단체 활동에도 열심이다.

엄씨는 “이제 그만 편하게 지내라는 유혹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꿈틀댈 때면 히말라야에 오르다 숨진 동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산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엄씨는 ‘16좌 등정’에 성공하면 세계의 고봉들을 차례로 오르는 한편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을 생각이다. 청소년과 장애우들이 좌절하지 않고 꿈과 희망을 갖고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산에 오르다 숨진 동료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일차적으로 청소년을 위한 등산학교를 운영할 계획이다.

 
히말라야 등정을 돕다 죽거나 부상당한 네팔의 셰르파들을 돕는 일도 지난해 11월부터 구체화했다. 국내 산악인 유자녀들에게 학비를 보조하는 장학사업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엄씨는 “큰  돈은 아니지만 정기적으로 학비를 보조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돕는 차원에서 나아가 조직적인 체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2월24일 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며 늦깎이 학사모를 쓴다. 학점을 물어봤더니 “4.0에 가까운 3점 얼마다. 교수님들을 열심히 찾아다닌 덕택이다. 틈나는 대로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언어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가 태어난 경남 고성군은 4월 중 ‘엄홍길 전시관’을 연다. 고성군은 장기적으로 암벽 등반을 연습하는 시설을 갖추는 등 ‘엄홍길’을 대표 상품으로 키울 생각을 갖고 있다. 의정부시가 망월사역 옆에 세운 ‘엄홍길 기념관’은 등산객들의 명소가 된 지 오래다.

1977년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고 고상돈씨를 보며 막연히 산악인을 꿈꾸었던 소년 엄홍길. 그는 이 땅에 숱한 ‘제2의 엄홍길’이 탄생하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산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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