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제작 드라마의 빛과 그늘
  • 고재열 기자 (scosisapress.com.kr)
  • 승인 2006.0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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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스페셜> 제작기/뛰어난 완성도로 인기…6억원 정도 손해 불가피

 
드라마 사전 전작제는 방송가의 ‘오래된 미래’였다. 드라마와 관련된 사람이라면 모두가 사전 전작제만이 한국 드라마의 지향점이라고 입을 모았다. ‘쪽대본’과 ‘밤샘찍기’에 허덕이는 드라마 제작진과 연기자 모두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거론되었다. 하지만 늘 거기까지였다. 아무도 사전 전작제로 드라마를 만들려 하지 않았다. 사전 전작제는 혀끝에서만 맴도는 수사학에 그쳤다.

그런 사전 전작제와 관련해 콜럼버스의 달걀을 깬 사람이 바로 J&H필름의 이호성 대표(30)였다. 김종학프로덕션의 제작PD 출신으로 드라마 동시제작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는 독립해서 제작한 첫 작품을 사전 제작 드라마로 만들었다. 이런 시도는 합작 드라마를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지난 2월6일부터 MBC 월화 드라마로 방영되고 있는 <내 인생의 스페셜>(김종학프로덕션과 공동 제작)은 지난해 여름과 가을에 촬영되었다. 여러 가지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전 전작제를 고집했던 것은 바로 우리 드라마의 미래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다. <내 인생의 스페셜>은 남자 주인공 문정혁의 부상으로 종영된 <늑대>의 대체 프로그램으로 편성되었지만, 1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호평을 받고 있다. 그리 높은 시청률은 아니었지만 아무런 사전 홍보 없이 1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한 것에 대해 방송 관계자들은 ‘대타를 내보내 홈런을 친 격’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늑대>의 방송 사고로 인해 대안적인 드라마 제작 방식에 목말라 있던 언론은 적극적으로 환호했다. 사전 제작된 덕분에 드라마의 완성도가 높다는 것이었다. 삼각 사각으로 얽히는 사랑 이야기도, 결혼을 놓고 다투는 양가의 갈등도, 출생의 비밀도 불치병도 없는 드라마이건만, 시청자들은 환호했다. 

사전 전작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이 대표가 걸어온 길은 험난했다. <내 인생의 스페셜>의 경우, 기획에서 제작까지 무려 3년이 걸렸다. 편성도 보장되지 않은 드라마였던 탓에 투자자도 연기자도 모두 참여를 꺼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류의 힘으로 투자자들이 나서기 시작하면서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대본이 완성되었고 연기자가 다시 붙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제작을 마쳤지만 정작 문제는 이때부터 발생했다. 편성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방송사는 도저히 수익을 낼 수 없는 조건을 제시했다. J&H필름 같은 외주 제작사가 드라마를 사전 제작하는 이유는 방송 관련 각종 판권과 관련 저작권 확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류 영향으로 부쩍 커진 해외 판권이나 케이블TV 방영권, 인터넷 VOD 판권을 확보하면 제작비를 적게 받아도 손해를 벌충할 수 있었다.

기획에서 제작까지 무려 3년 걸려

그러나 방송사는 이를 쉽게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동시 제작 방식에서는 제작비를 대는 방송사측에서 드라마와 관련된 대부분의 권리를 몰수해왔다. 그래서 외주 제작사들은 모두 간접 광고(PPL)에 의지해 부족한 수익을 보전해왔다. 그러나 무리한 PPL로 인해 드라마의 질이 떨어졌고, 이는 곧바로 시청률 하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이호성 대표는 드라마 제작과 관련된 악순환의 고리를 풀기 위해 기획한 드라마였기 때문에 각종 판권과 관련 저작권을 결코 양보할 수 없었다. 결국 <내 인생의 스페셜>은 해외 로케로 100% 사전 제작된 사극 <비천무>와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되었다. 국내 방송사로부터 외면당한 것이다. 주연 배우들의 부상으로 <늑대>의 방영이 중단되지 않았다면 사장될 수도 있었다.  

다행히 방영은 되었지만 불운은 끝나지 않았다. MBC측에서 후속 드라마 편성을 이유로 12부작으로 제작된 <내 인생의 스페셜>을 8부작으로 줄여서 방영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대표는 “12부작으로 제작된 드라마를 다시 8부작으로 줄여서 편집하면 완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사전 전작제의 취지를 살리지 못해 아쉽다”라고 말했다.

2차 판권을 확보하고 관련 저작권을 확보하는 문제에서도 결국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드라마 사전 전작제의 정착을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수익성 확보에는 실패한 셈이다. 이 대표는 “8부작 기준으로 볼 때, 회당 제작비가 2억4천3백만원이 들었다. 하지만 방송사에서 받은 제작비는 회당 9천2백만원에 불과하다. 해외 판권 판매 등을 감안해도 6억원 정도 손해가 나는 것이 불가피하다”라고 설명했다.

판권과 저작권, 방송사가 챙겨 어려움

비록 손해 나는 장사를 했지만 이 대표는 앞으로도 사전 전작제를 고집할 생각이다. 그는 “비록 ‘절반의 성공’이지만 우리 드라마의 미래를 맛보았다. 시스템이 질을 보장한다. 높아진 시청자의 눈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변화가 필연적이다”라고 말했다. 드라마를 연출한 이재원 PD는 “드라마의 작품성을 위해서는 사전 전작제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연출자는 대본을 가지고 영상을 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고 연기자도 캐릭터를 고민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게 된다”라고 말했다.

이대표는 사전 전작제를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사전 제작을 위해서는 외부 투자가 필수적이다. 외부 투자를 끌어오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관련 저작권 확보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외부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다양한 수익 구조를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방송사의 편성에만 산소호흡기를 대고 있는 현재의 열악한 구조를 깨면 우리 드라마에 무한한 가능성이 열린다. 드라마 콘텐츠의 ‘원소스 멀티유즈’를 통해 시장을 비약적으로 확장할 수 있다”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현재는 외주 제작사들이 대부분의 저작권을 방송사에 넘기고 있는 실정이다. 판권이나 저작권이 방송사에 귀속되기 때문에 마케팅 주체도 방송사가 된다. 문제는 방송사들이 이런 저작권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마케팅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방송사 입장에서는 광고만으로도 충분한 수익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그는 “드라마 마케팅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방영 후에 하게 되면 설거지 밖에 되지 않는다. 방송사 계열사가 기계적으로 맡아 하는 현재 시스템으로는 부가가치 창출이 어렵다”라고 말했다.

합작 드라마를 제외하고 최초의 사전 제작 드라마인 <내 인생의 스페셜>과 상당 부분을 사전 제작한 <궁>의 성공으로 방송사들은 사전 전작제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전 전작제에 대해 <내 인생의 스페셜>을 담당하고 있는 MBC 최창욱 책임프로듀서는 “파일럿 프로그램을 만들어 평가를 받은 후, 검증을 거친 작품을 편성하는 시스템을 만든다. 그러면 사전 전작제로 드라마를 만드는 방식이 정착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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