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쌀
  • 徐明淑.鄭基修 기자 ()
  • 승인 1989.10.2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쌀값 폭락으로 추수의 기쁨조차 잃어버린 농촌∙∙∙

추곡수매 둘러싼 정부와 농민의 팽팽한 대립, ‘쌀 政局’으로 번질 조짐마저 보인다.
  쌀값 폭락으로 농촌이 들끓고 있다. “쌀금? 말도 하기 싫소. 8만원도 안 강께로 말 다했제.지금 같을 때면 9만원은 넘어서야 정상인지. 이래서야 농님들 다 죽으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요.”
  “지금도 농협 빚이랑 사채랑 합치면 빚이 5백만원이 넘어요. 근디 이렇게 쌀값이 안 좋으면 또 빚만 지는 게 아닌가 싶어 밤에 잠이 안 오요. 나락만 보면 한숨만 푹푹 나오고요.”
  가을걷이가 거의 끝나가는 10월 중순. 농촌 취재길에서 만난 농민들은 전남 靈光이건, 충북 永同이건 가릴 것 없이 최근의 쌀값 폭락 사태에 울분을 터뜨렸다. 한해 농사를 마친 느긋함은 아예 없고 이제 양파파동, 고추파동, 수입종산물파동에 이어 ‘쌀파동’마저 일어나는 게 아니냐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고추⋅양파 이어 ‘쌀파동’인가 : 지난 10월3일 전남 영광 우시장에서 열린 ‘쌀값보장 및 전량수배를 위한 영광군 군민대회’는 이런 농민들의 위기감과 農政에 대한 불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직 추수가 덜 끝난 시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7백여명의 농민들이 모여들어 대회를 마련한 농민단체 관계자들마저 놀라게 했는가 하면, 이같은 열기 속에서 군중들 사이에서는 “이래선 안된다. 아예 서울로 올라가자”는 과격한 주장까지 터져나왔다.
  농민들의 표현에 의하면 올해의 쌀값폭락 현상은 ‘해도 너무한다’는 것이다. 해마다 추곡수매가 시작되기 전인 9, 10월경의 일반 벼값은 대개 전년도 정부의 통일벼수배가격보다 가마당 5천원∼1만원 정도 웃도는 것이 상례였다. 지난해 정부수매가격이 8만6천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올해 일반미값은 이맘때쯤에는 9만원대는 넘어서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현재 產地의 쌀값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개 일반미 한가마에 그보다 1만원이 밑도는 7만8천∼9만원 선이며, 심지어 강원도 횡성 같은 곳에서는 7만원 선에서 거래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최근 도하 각 신문들은 ‘쌀이 과잉생산되고 있다’는 기사를 경쟁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쌀값의 폭락현상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셈이다. 신문보도를 빌미로 중간상인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쌀값은 더 떨어진다’며 농민들을 부추기고 있고, 덩달아 갈피를 못잡는 농민들이 다투어 쌀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쌀 과잉’ 언론보도가 폭락 부채질 : 쌀값 폭락의 원인은 무엇인가. 물론 쌀이 남아 돌기 때문이다. 수요량에 비해 절대 공급량이 많다는 것이다. 올해 쌀 생산량(정부 예상치) 자체는 3천9백만섬으로 평년작수준에 머물렀지만, 지난해의 大豊을 비롯해 5년여의 계속된 풍작으로 ‘상당량’의 재고가 누적되어 있다. 게다가 1인당 쌀 소비량이 86년을 고비로 농촌에서마저도 줄고 있는 만큼, 이러한 쌀소비 감소 추세가 바로 쌀 재고량의 증대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쌀 과잉’ 문제에 관한 최근 언론보도는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것이 정부와 농업경제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정부가 밝히는 금년 양곡년도말(10월말) 현재 쌀 재고량은 1천1백만섬. 이중 정부재고는 8백70만섬이고, 민간재고는 농협보유 1백만섬과 농가보유 1백30만섬을 합쳐 2백30만섬이다.
  농림수산부 李官範 양정국장은 이에 대해 “일시적으로 재고가 늘어난 것일 뿐 대체로 수급이 균형된 상태”라며 “과잉재고라는 등으로 언론이 법석을 떨어 결과적으로 중간상인들만 이롭게 하고 있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1천1백만섬은 전체국민이 3개월 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으로 비상시 안보차원에서 반드시 보유해야 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성급한 減產論에 농민들 반발 : 그러나 시중에서 쌀의 공급과잉 현상이 빚어지고 따라서 값이 일년 내내 수매가를 밑돌아 절망하고 있는 농민들과 농촌운동가들은 재고 문제에 대해 그렇게 관대한 입장이 될 수만은 없다. 지난81년부터 3년간 수입된 쌀(농수산부는 1천9백만섬이라고 밝힘)이 누적된 결과로 재고량 과잉문제가 일어났고, ‘쌀 과잉’보도의 과잉현상 자체도 올 추곡수매가를 낮게 책정하기 위한 정부측의 분위기 조성이라는 의혹과 주장이 재야농민단체를 중심으로 농촌에서 광범위하게 일고 있다.
  더욱이 쌀 재고량 누증을 게기로 減産정책, 절대농지해제 등을 검토한다는 정부여당의 발상을 놓고 농민단체들은 “농촌의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짓” 이라며 분노하고 있다. 많은 학자들도 성급한 減產論은 위험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부산대 황한식 교수(농업경제학)는 정부의 산업구조 조정 움직임에 대해 “식량이 전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무기로 재평가받고 있는 중인데 겨우 자급단계에 들어선 시점에서 산업구조 조정 운운은 매우 성급한 일” 이라고 비판하며 “엄청난 값으로 살을 사들어야 했던 80년의 교훈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농림수산부의 한 관계자는 “減產論 같은 극단적인 정책은 최후의 수단이 될 것”이라며 다만 “생산이 안정단계에 들어섰고 인구증가 둔화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쌀 소비가 감소하고 있기 때문에 적극적인 수요개발을 서두르고 있다”고 밝혔다.
 

“전량 수매라야 한다” : 쌀소비의 감소는 미국이 잉여농산물, 가공식품 등이 무분별하게 들어오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오는 가운데 정부는 쌀막걸리 허용, 학교 급식 확대, 쌀가공식품 개발 등 남는 쌀에 대한 ‘해묵은’ 소비책을 되풀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길은 쌀값을 안정시킬 수 있는 농민 보호대책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특히 올해처럼 단기적으로 쌀값이 폭락할 경우 정부가 전략수매를 해주지 않고 시장자율기능에 맡기게 되면 헐값에 쌀을 팔아야 하는 농민만 피해를 보게 되어 결국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게 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어느때보다 높다.
  경상대 장상환교수(농업경제학)는 농민과 도시서민을 보호하고 결국 국가 경제전반을 보호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二重價制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양곡관리기금을 특별회계로 처리함으로써 발생되고 있는 적자(3조3천억원의 이른바 양특적자)를 “농민 탓으로 돌리지 말고 당연히 일반 회계로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함평에 사는 농민 나옥섭씨는 “부실기업들에는 몇 조원씩이나 돈을 퍼붓는 정부가 정작 8백만 농민을 살리는 일에는 왜 그리 인색하냐”며 "정부의 양특적자 주장은 엄살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16%선과 41%의 시각차 : 시중 쌀값이 폭락 현상을 나타내자 농민들의 관심은 자연히 11월부터 시작되는 정부의 추곡수매에 쏠리고 있다. 재야 농민단체들은 추곡수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이미 지난 9월8일 ‘전국 쌀 대책위원회’를 결성한 바 있다. 재야 농민단체들이 주장하는 것은 ‘추곡수매가 41% 인상과 전량 수매’로 요약된다. ‘전국농민운동연합’의 이병호 사무국장은 “41% 인상안은 정부의 생산비 통계에 근거를 둔 것으로 물가 인상분과 농민 생계보장을 위한 최저수준”이라고 주장 하면서 특히 올해 싸움에서는 “전량 수매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막상 수매에 나설 정부의 입장은 이와는 큰 차이가 있다. 이미 趙涥 부총리는 정기국회에서 추곡가가 물가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할 때 한자리 수(10%미만)내에서 인상이 억제되는 게 바람직하다는 ‘개인적 견해’를 밝힌 바 있다.
  10월 안에 농수산부에 제출될 ‘양곡유통위원회’의 건의안은 16%선이 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정부의 수매 인상률은 이 선 내외에서 결정될 것 같다. 농민단체들이 주장하는 정량 수매에 대해서도 정부는 이미 책정된 5백50만섬의 통일벼 수매와 일반미 2백만섬 추가수배로 예정되어 있어 그 이상은 현실적인 여건상 어렵다고 밝히고 있다.
 

11월부터 전국 동시다발 집회 : 하지만 재야 농민 단체들은 “농가경제의 파탄을 막기 위해서라도 추곡수매 문제만큼은 농민들의 주장을 관철시킬 것”이라는 강경한 입장이다. ‘쌀 대책위’는 추수가 끝나는 10월 하순부터 본격적으로 군⋅면 단위 쌀 대회를 가질 예정이며, 나아가 11월 하순경에는 전국 동시다발 집회를 여는 한편, ‘2⋅23 여의도 농민 대회’와 같은 대규모 전국 집회도 갖겠다고 밝히고 있다.
  해마다 추곡수매를 앞두고 정부와 농민들은 줄다리기를 벌여 왔지만, 올해는 시중 쌀값 폭락이라는 또 다른 변수 때문에 그 갈등이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될 것 같다. 어쩌면 가을 政局을 ‘쌀 정국’으로 비화시킬 조짐마저 보이고 있는 이번의 ‘쌀 파동’은 우리 農政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