圓鏡스님이 털어놓은 출생과 성장의 비밀
  • 朴相基 기자 ()
  • 승인 1989.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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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朴憲永의 아들이다”
 “내가 태어난 곳이 청주라고 알고 있는데, 그곳 어디쯤인지는 전혀 기억에 없습니다. 네 살 때인 1944년에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 이손저손을 거치며 천덕꾸러기로 자라나는 통에 핏줄의 끈도 다 끊어져 버렸지요.”
 朴憲永의 아들 - 이 짧은 ‘족보’는 한인간의 50평생을 옴쭉달싹 못하게 짓눌러온 멍에요 운명의 굴레였다. 경기도 내 모사찰의 주지인 圓鏡스님이 바로 음지식물처럼 기구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아온 주인공이다.
 그는 1941년 2월8일, 박헌영과 鄭씨라고만 알려진 여인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과 관련된 비밀을 짐작하려면 어렴풋하게나마 당시에 박헌영이 처해 있던 형편이 어떠했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박헌영은 1933년 7월에 피검되어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언도받고 생애 세 번째의 복역을 치르게 된다. 1939년 대전형무소에서 만기 출감한 그는 옥고에 지친 몸을 끌고 고향인 충남 예산군 신양면을 찾았다. 얼마 동안 고향에 칩거하면서 건강을 되찾은 그는 현지 경찰의 눈을 속이고 고향을 탈출, 서울로 잠입하여 비밀 공산운동 단체인 경성 ‘콤 그룹’을 지도했다. 그후 경찰의 검거선풍으로 ‘콤 그룹’의 조직이 와해되고 신변에 위험이 닥치자 박은 1942년 12월 전남 光州의 한 벽돌공장에 몸을 숨겼다. 그는 8⋅15 광복을 맞기까지 그곳에서 인부로 일하면서 극비리에 골수 당원들과 접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박헌영은 고향에 머물던 때거나 아니면 ‘콤 그룹’의 초기에 정씨와 부부의 연을 맺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원경스님의 생모이자 박헌영의 두 번째 아내가 된 정씨의 신원에 관해서는 두가지 설이 떠돈다. 하나는 그의 밥수발을 들어주던 평범한 시골 처녀라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이념적으로 무장되어 박을 추종하던 ‘세포’였다는 설이다. 그러나 원경조차도 어머니나 外家쪽에 대해서는 기억하는 바가 없으니 진위를 확인할 길이 없다.
 이미 박헌영은 20대 초반에 上海에서 열렬한 사상적 동지인 朱世竹과 만나 결혼한 바 있었다. 朱여인은 ‘영아’라는 이름의 딸 하나를 낳고 1932년 1월에 모스크바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아버지를 나는 여섯 살 때 처음 뵈었습니다. 큰아버지(朴芝永)가 서울로 나를 데리고 가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었던 것 같아요. 선친의 전기를 쓴 朴甲東씨는 서울로 데리고 온 아이가 ‘박돌맹’이란 이름의 어린애라고 하였는데 그건 잘못입니다. 박돌맹은 큰댁 4촌형님인 朴秉奭의 아명인데, 그 형님은 당시 스물다섯살이었고 모스크바에 유학중이었죠.”
 원경스님의 속명은 朴秉三. 병삼 소년을 데리고 동생을 찾아 고행을 떠난 박헌영의 이복형 朴芝永은 그뒤 행방불명이 되어버렸다. 예산군 신양면사무소에 보관돼 있는 박지영의 호적에는 그의 외아들 박병석은 1922년생으로 1943년 9월에 서산 처녀 이경용과 결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몇 차례인가 더 아버지를 만나뵈었던 적은 있었지만 한번도 아버지 곁에서 잠을 자본 적은 없어요. 떨어지기 싫다고 생떼를 써봐도 그때마다 낯선 사람들에게 손잡혀 낯선 곳에 끌려가곤 했으니까요. 그 무렵에 李鉉相, 金三龍씨도 만났던 기억이 납니다.”
 1946년이면 미군정 치하에서 좌익과 우익이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피비린애 나는 투쟁을 벌이던 시기다.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인 박헌영으로서는 아무리 어린 자식이 안쓰럽더라도 자식을 내칠 수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그해 9월5일, 그는 미군정청의 체포령을 피해 비밀월북을 감행했다.
 아버지와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떠나고, 큰아버지마저 종적을 감춰 사고무친이 되어버린 병삼 소년. 아버지는 그가 다가갈 수 없는 곳으로 훌쩍 떠나갔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그에게 평생 숨어살며 저자거리를 마음놓고 행보할 수 없는 ‘天刑의 삶’을 남겨준 것이다.
 길거리에 내던져진 거나 다름없이 放棄된 그를 맡아기른 사람은 寒山이란 법명을 가진 스님이었다. 寒山이 무슨 까닭으로 그 시대의 가장 ‘불온한 인물’의 아들을 거두어 길렀을까.
 “한산스님은 선치보다 열 살 밑인데, 동경제대 동양사학과를 나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평소의 언행을 보면 옛날부터 무척 선친을 따르고 존경했던 것만은 틀림없는데, 스님의 과거는 나도 잘 모릅니다. 절집에서는 서로간에 출가전의 얘기를 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으니까요.”
 한산스님은 그를 작은 암자에 떼어놓고 탁발을 나서거나 며칠씩 행처 모를 곳에서 머물다 오고는 했다. 해질녘이면 빈 암자에 남은 병삼 소년은 무서움에 떨며 이제나 저제나 스님의 모습이 산길 초입에 나타나기를 기다리곤 했다. “지금도 해 넘어갈 무렵이면 사람이 그리워 마음이 산란해지곤 하는 버릇”은 그때부터 싹튼 것이리라.
 출생신고조차 되어 있지 않는 처지라 국민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그에게 스님은 “만권의 책을 읽으면 대학 나온 것보다 낫다”며 글을 가르쳤고, 주로 동⋅서양의 역사에 관한 책들을 읽도록 했다. 하지만 그는 산속이 너무 갑갑하고 심심해서 한산스님이 출타한 틈을 타 마을로 내려가곤 했다. 학교가 파하는 시간에 맞춰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또래들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가 열 살 나던 해에 육이오가 터졌다. 남과 북이 한 차례씩 밀고 밀리는 북새통이 일어나자 스님은 그를 한 절에 오래 두지 않았다. 공산주의자와 그들의 피붙이에 대한 적의의 시선이 날카로와질수록 더 빈번하게 거처를 옮겨다녀야만 했다. 어린 병삼의 마음에는 정을 붙일 만하면 털고 일어서는 스님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世人들과 인연을 맺지 말아라. 어쩐 일이든 끼어들면 너는 희생물이 되기 십상이니, 그저 부처님만 모시고 산속에서 다소곳이 살아야 한다.”
 그가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할 때부터 귀에 공이가 박히도록 들은 스님의 다짐이 그러했다. 스님과 그는 무주 적상면의 安國寺, 구천동의 백련암, 지리산 용추사, 소백산의 龍華寺, 상주의 남장사 중궁암, 속리산 중사자암 등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사찰과 암자와 토굴을 전전했다.
 열두살이 되던 해 그는 전주 근교의 한농가에 맡겨졌다. 그 집안의 형편이 몹시 어려워 ‘쉰 고구마 한 개가 인절미로 보일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마을에 섞여 있는 탓인지 제일 추억거리가 많다고 했다. 그 집에서 10개월쯤 지낼 무렵인 겨울철에 그는 땔감을 장만하러 산에 갔다가 낫질을 잘못하여 손등을 찍는 바람에 손가락의 힘줄이 끊어지는 상처를 입기도 했다.
 다시 전주 松廣寺, 모악산 歸神寺, 삼척의 관음암, 예산의 定慧寺 등등을 옮겨 다니다가, 예산군 광시면의 大蓮寺에 머물때였다.
 “하루는 스님이 조용히 부르시더니, 선친의 죽음을 알려주시더군요. 북에서 첩자의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것은 분명한데, 돌아가신 날짜를 알 수 없다며 평양최고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내린 12월 15일을 忌日로 삼아 제사를 드리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스님은 훨씬 전에 그 사실을 아셨지만 그때서야 입을 연 것같기도 합니다.”
 그의 나의 열여덟살이던 1958년의 일이었다. 제사를 드린 다음 그는 스님의 품을 몰래 빠져나와 파계를 했다. ‘슬픔도 아니고 허탈도 아니지만, 하여튼 그대로는 견딜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저지른 행동이었다.
 어디 한 군데 마음 붙일 곳이 없는 서울. 얼음과자 장수, 식당 종업원, 막노동 등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지만, 서울은 세상살이에 철부지인 그가 결코 뿌리내릴 곳이 못되었다. 그는 삶의 의욕을 잃고 부랑아처럼 전국을 떠돌았다. 살아보려고 발버둥칠수록 세상은 저만치 달아나며 자신을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오랜 방황에 지쳐버린 스물세살의 청년 박병삼은 원주의 태장동 영천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했다.
 “청산가리를 그냥 삼키면 목구멍만 타고 죽지 못한다는 말은 들은지라 그걸 배추잎으로 말아 싼 다음 수면제 40알과 함께 삼켰지요. 눈을 떠보니 원주 도립병원입이다. 수면제 탓인지 위기능이 정지돼서 살아났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아셨는지 한산스님이 나타나셨어요. 스님은 쌀을 갈아 쌀물을 떠먹이며 몇 날을 두고 어찌나 혼을 내던지···”
 그가 회복되자 스님은 한동안 산간벽지와 섬으로 데리고 다녔다. 발길이 제주도에 이르자 스님은 “마음이 잡힐 때까지 이섬에서 살아라”는 말씀을 주고 떠나셨다. 그것이 스님과는 이승에서의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그는 스님의 명을 좇아 하논마을(서귀포 大畓洞)의 밀감밭에 있는 조그만 암자에서 6년을 살았다. 가슴의 불을 삭이고 ‘조금이나마 부처의 참모습을 바라볼 눈이 떠졌다면’ 그건 바로 이 기간에 얻은 깨달음의 덕이었다.
 1970년에 뭍에 나온 그는 1973년에 문중 스님들의 보증으로 南宮赫이란 이름을 호적에 올린다. 6⋅25때 元山에서 피난 내려오다 부모를 잃고 사뭇 절집에서 자란 것으로 身元을 꾸며댔다. 태어난지 32년 만에 그나마 성명을 바꾸고서야 비로소 한 사람의 ‘대한민국 국민’으로 입적된 것이다.
 “자손을 둘 바도 아니니, 내 선친을 밝혀서 원적을 찾는 소란은 피우고 싶지 않아요. 9촌 되는 조카가 나서서 寧海 朴氏 족보에는 제 근본을 찾아놓았습니다만, 저는 이제 이것 저것 다 잊고 조용하게 살고 싶을 뿐입니다.”
 충남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299번지, 아버지의 고향집을 찾아가는 차 속에서 담담하게 들려준 말이다. 아버지 朴憲永의 생애가 지칠 줄 모르고 타오르던 불꽃이었다면, 아버지가 남긴 잿더미에서 시작한 그의 생은 승복 빛깔의 잿빛에 비유될 수 있을까.
 신양장터의 큼지막한 국밥집이었던 박헌영의 집은 박씨 一門이 풍비박산 나는 바람에 당시 그 집에 세들어 살던 사람이 쌀 몇 가마에 팔아넘겼다고 한다. 그뒤에도 몇 차례인가 집주인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집마저 허물어져 텅빈 집터에는 잡초만이 제멋대로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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