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에 취해, 향기에 반해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6.0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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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사들의 세계/구매욕 돋우는 향 연구…매일매일 온갖 냄새 조합

 
추억을 더듬을 때, 또는 새로운 물건을 탐색할 때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각 기관은? 후각이다. 잊고 있던 무언가가 냄새로 인해 생생하게 기억나거나 낯선 물건이 풍기는 냄새에 따라 그 물건에 대한 평가가 엇갈렸던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냄새는 지식이나 경험, 심지어는 세월까지도 무력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헬렌 켈러는 냄새를 ‘살아온 모든 세월을 가로질러 우리를 데려가는 강력한 마법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향기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향사’로 불리는 그들은 냄새의 마법을 연구하는 일을 한다. 얼마 전 문을 연 ㈜LG생활건강(대표 차석용)의 향 전문 연구소 ‘센베리 퍼퓸하우스’(Scent Berry Perfume House)에는 14명의 ‘마법사’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이성을 사로잡는 향에서부터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향, ‘살인 미소’에 어울리는 향 등을 개발하고 있다. 이들이 개발한 ‘마법’은 향수·치약·샴푸·비누 같은 다양한 생활 용품 속에 담겨 사람들 속으로 파고든다.

이 마법사들을 이끄는 수장은 김병현 연구소장이다. 지난 22년 동안 향의 마법만 연구해 온 국내 대표적인 조향사다. 그는 “향은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해서 제품 이미지를 높이거나 떨어뜨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미지에 딱 들어맞아 그 제품을 사고 싶게끔 유인하는 향을 개발하는 것이 우리 같은 조향사들의 임무다”라고 설명했다. 새로운 향을 찾는 일만 해오다 보니 그의 코는 누구보다 예민하다. 처음 보는 사람이 어떤 종류의 샴푸나 향수, 화장품을 사용하는지 냄새만으로 알아맞힐 수 있을 정도다.

조향사 대부분 오감 예민한 화학 전공자

예민하고 독특한 직업이다 보니 아무나 조향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내 조향사 대부분은 화학을 전공한 이들인데, 그 가운데서 오감이 예민한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만이 조향사로 발탁될 수 있다.  

과거에는 향기 연구가 향수 회사의 고유 영역이었다. 생활 용품 회사들은 원료 냄새를 없애는 데만 향기를 부수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부터 감성 마케팅이 뜨면서 향을 이용한 ‘향기 마케팅’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상자 기사 참조). 생활 용품 회사들도 원료의 냄새를 없애는 동시에 구매욕 또는 소유욕을 일으킬 수 있는 향을 개발하는 일에 관심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드봉 비누는 향기가 생활 용품의 성패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처음 시장 점유율이 18%까지 올라갔던 드봉 비누는 차츰 판매율이 줄면서 시장 점유율이 3~4%대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향을 바꾸면서 시장 점유율이 다시 12%까지 올라갔다. 새로운 향이 ‘죽은’ 제품을 부활시킨 것이다. 

시장에서 향기의 영향력이 커지자 LG생활건강은 향을 보다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센베리 퍼퓸하우스’를 설립했다. 제품군별로 흩어져 있던 향료 연구팀을 ‘향’이라는 단일 카테고리로 통합해 새로운 연구소를 만든 것이다. 연구소의 조향사들이 제품에 맞는 향을 찾아가는 과정은 간단치 않다. 신제품 개발팀에서는 ‘도회적이고 세련된 이미지의 향을 찾아 달라’는 식으로 추상적으로 주문하곤 한다. 그러면 조향사는 온갖 다양한 향을 조합해 보면서 그 이미지에 부합하는 향을 찾아내야 한다. 향이 아무리 강하고 좋아도 제품과 어울리지 않으면 실패한다. 반대로 너무 약한 향을 사용하면 원재료의 향을 가리지 못해 불쾌감을 심어줄 수도 있다.

“올해는 새콤달콤한 향 유행”

센베리 퍼퓸하우스 김후덕 과장은 “조향은 예술가의 작업 과정과 비슷하다. 어떤 향은 영감이 떠오르는 순간 단박에 조합해내기도 하지만 어떤 향은 6개월, 1년이 걸려도 조합하기 힘들 때도 있다”라고 말했다. 고급 한방화장품 ‘환유고’를 개발할 때 일이다. 신제품 개발팀에서는 ‘고급스러우면서도 가장 희귀한 향을 찾아 달라’고 요청했다. 머리를 맞댄 ‘향기 마법사’들이 찾아낸 아이디어는 송이버섯 향이었다. 귀하고 향이 좋은 송이버섯의 이미지를 담은 향이라면 고급 한방 화장품에 어울릴 것 같았다. 마법사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독특한 향을 가진 ‘환유고’는 시장에 나오자마자 큰 인기를 얻었다.

김병현 소장에 따르면, 향기에도 사회 트렌드가 반영된다고 한다. 전쟁이 일어나거나 각종 사건·사고가 많아 사회가 뒤숭숭할 때에는 자연에 가까운 향이 유행한다. 사람은 자연 속에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게 마련이어서 불안한 시국에서는 자연에서 흔히 맡을 수 있는 향이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든다는 것이다.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활성화하기 시작하면 밝고 경쾌한 향이 유행의 중심에 선다. 김병현 소장은 곧 다가올 향기의 트렌드는 ‘펀앤조이(Fun&Joy)’가 되리라고 내다본다. 사람을 즐겁고 기쁘게 해주는 새콤달콤한 향이 시장을 움직이게 될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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