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급소 찌른 ‘일본파 삼총사’
  • 양정석 (일본 데일리스포츠 신문 객원기자) ()
  • 승인 2006.03.1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승엽·구대성·이종범, 고비마다 해결사 노릇…현지 선수 경험이 큰몫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무대를 호령하고 있는 한국 야구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선수들은 단연 일본파다. 일본 무대 경험이 있는 ‘지일파’들의 활약이 일본 열도의 반응을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일본 언론은 지난 14일 한국이 강력한 우승 후보 미국마저 무너뜨리자 곧바로 속보를 내보내는 등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이었다. 미국전에서 심판의 어이없는 오심으로 다 잡았던 경기를 놓친 일본으로서는, 7대 3으로 압승을 거둔 한국의 믿기지 않은 기세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WBC 2차 라운드 전 경기를 생중계하고 있는 위성 텔레비전 J-스포츠의 야구 해설자들은 “한국이 이렇게 잘 짜인 팀이라고는 다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시아 라운드에서부터 한 경기 한 경기 신중하게 경기를 풀어가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팀이다. 벤치는 물론 선수들에게 도전 의식이 묻어 나온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11개 메달을 따낸 토리노 동계올림픽처럼 한국 선수들은 어떤 종목이든 국가의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힘을 모은다. 이 점은 일본 선수들이 꼭 배워야 할 점이다”라는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일본파 세 명 가운데 열도에서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선수는 단연 이승엽(30·요미우리 자이언츠) 이다. 이승엽은 일본 프로 야구팀 소속이라는 프리미엄이 맞물려 매 경기 홈런을 칠 때마다 일본 스포츠 신문의 머릿기사를 장식하는 등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다.

일본에서 두 시즌을 보낸 이승엽의 성장은 WBC를 통해 그대로 확인되었다. 일본과의 아시아라운드 최종전에서 왼손 투수 이시이 히로토시(야쿠르트), 멕시코와의 2라운드 첫 경기에서 로드리고 로페스(볼티모어), 미국전에서 돈트렐 윌리스(플로리다)를 상대로 뽑아낸 홈런은 모두 완벽한 타이밍과 스윙으로 만들어낸 만점짜리였다. 승부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 순간마다 해결사의 진면목을 보여 ‘아시아 홈런킹’의 위용이 더욱 빛났다.
이시이는 지난해 4승3패 37세이브, 로페스는 15승(12패), 그리고 윌리스는 메이저리그 최다승인 22승(10패)을 따낸 일본과 미국의 최정상급 투수들이다. 이승엽은 투수와의 수 싸움에서 압도하며 변화구와 직구 가리지 않고 공략했다.

이승엽은 지난 2년간 일본에서 각종 변화구에 능한 다양한 타입의 투수들을 상대로 절치부심하며 차곡차곡 실력을 쌓았다. 이제 절정을 향해 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는 지바 롯데에서 30홈런을 치며 부활탄을 쏘아 올렸던 지난해 시즌 때보다 더 간결한 스윙으로 무장했다. 불필요한 힘을 빼고 타이밍에 초점을 맞춘 치밀한 스윙은 투수들의 실투를 놓치지 않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시이와 로페스의 높게 컨트롤된 몸쪽 변화구를 놓치지 않고 두들긴 게 단적인 예다.
뭔가 잘 풀리지 않을 경우 자신에게 몰두하는 성격인 이승엽은 주위의 간섭에서 해방되어 ‘주인공’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더욱 힘을 내는 스타일이다. 비교적 별 간섭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인 대표팀에서 특유의 몰아치기에 본격 시동을 건 이승엽의 불방망이는 한국을 연승으로 이끌고 있다.

세 명 다 일본 무대에서 쓴맛 경험

 
올 시즌 일본 프로 야구 최고의 명문 요미우리에서 피날레 승부를 벌이고 자신의 꿈인 빅리그 진출을 원하는 이승엽으로서는 WBC를 통해 미래의 팬들에게 화끈한 시범을 보인 셈이다. 메이저리그 홈페이지는 “메이저리그 구단 30여 곳에서 이승엽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라고 전했다. 메이저리그 슈퍼 에이전트인 스콧 보라스 씨는 “하체의 힘이 뛰어나고 유연한 데다 1루수라는 포지션도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다. 빅리그에서 30개 이상의 홈런을 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승엽은 ESPN이 실시하고 있는 최우수 선수 투표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이승엽에게는 내년 시즌 빅리그 팀을 고르는 즐거운 고민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일본 프로 야구에서 한동안 최고의 왼손 투수로 이름을 떨쳤던 구대성(37·한화)의 절묘한 피칭도 한국의 상승세를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아시아 라운드 대만·일본전에서 무실점 피칭으로 깔끔하게 시동을 건 구대성은 2차 리그 멕시코·미국·일본전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마운드에 올라 안정된 피칭으로 승리의 디딤돌을 놓았다.
스트라이크존 외곽을 얄미울 정도로 살짝살짝 걸치고 파고드는 ‘컴퓨터 제구’와 어떤 상황에서도 머뭇거림 없이 자신의 투수 패턴을 밀어붙이는 ‘배짱투’는 일본 오릭스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구대성은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오릭스에서 뛰었다. 입단 첫 해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7승9패 10세이브, 방어율 4.06을 기록했다. 꼴찌 팀의 허약한 타격만 아니었으면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2002년과 2003년에는 퍼시픽리그 방어율 부문에서 줄곧 1, 2위를 다툴 만큼 구대성은 빼어난 피칭을 했다.
일본의 야구 해설자들은 “얼굴에서부터 자신감이 넘쳐난다. 공이 나오는 각이 까다로워 특히 왼손 타자들이 공을 보기 힘들다. 마치 안방 무대에서 던지듯 편안하게 승부를 한다”라고 평가했다. 구대성은 일본을 떠날 때까지도 일본 프로 야구의 왼손 투수 중에서는 늘 ‘톱 5’에 이름을 올렸다.
대표팀의 ‘캡틴’ 이종범(36·기아)은 장 내·외에서 큰 역할을 해내고 있다. 모래알같이 흩어져 지내던 후배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정신적 역할 뿐 아니라 베테랑 투혼으로 타선을 이끌고 있다. 이종범은 아시아 라운드에서부터 ‘투고타저’의 고민에 빠진 대표팀에서 이승엽과 콤비를 이루어 그나마 타선의 갈증을 풀어주고 있다.
이종범은 1998년 한국 최고 유격수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다가 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리그의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해 전반기에 펄펄 날았다. 하지만 가와지리의 빈볼에 오른쪽 팔꿈치 골절상을 당한 이후 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유격수에서 외야수로 자리를 옮긴 이후 수비에서의 불안감이 타격에까지 영향을 미쳐 2000년 시즌 뒤 쓸쓸히 돌아와야 했다. 야구 천재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인지 일본전에 대한 이종범의 각오는 늘 남다른 구석이 있다.

대회 초반부터 맹타를 휘두르며 대표팀 타선을 이끌던 이종범은 지난 5일 도쿄돔에서 열린 일본과의 예선전에서 1대 22로 뒤지던 8회 1사 후 일본의 구원 이시이 히로토시(야쿠르트)로부터 중전 안타를 뽑아내며 추격전에 불을 댕겼다. 이어 이승엽이 바로 홈런을 때려 한국은 승리를 낚았다. 16일(이하 한국 시간)에는 천금같은 2타점 결승타를 터뜨리며 한국의 4강행을 이끌었다. 예선 패배를 설욕함과 동시에 4강 진출을 달성하겠다는 일본야구를 완전히 무너뜨린 한 방이었다.

WBC에서 해외파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는 가운데 이들 일본파 삼총사의 공통점은 한국 프로 야구에서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선 경험과 함께 일본 프로 무대에서 한 번씩 쓰라림을 당했다는 점이다. 일시적인 추락의 좌절을 딛고 끝내 자신을 곧추 세운 이들의 값진 경험이 국제 무대에서 그대로 빛을 발하고 있다. 아시아 야구 종주국이라는, 콧대가 높은 일본 야구를 놀라게 만든 세 명 일본파의 활약은 미래의 한국 야구를 짊어지고 나갈 후배들에게도 더없이 좋은 귀감으로 남게 되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