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그러나 부러운 가족 친화 경영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6.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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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탁아소 등으로 자녀·가족 챙기는 회사 증가…대상 기업 가운데 22%만 시행

 
결혼하고도 일을 계속하려는 미혼 여성, 현재 직장에서는 일과 가정을 병행하기 어렵기에 괴로워하는 기혼 여성, 육아 문제로 아내와 갈등하고 싶지 않은 남성이라면 이런 직장에 눈을 돌려보라. 가족 생활과 일을 조화롭게 병행할 수 있는 일터 환경을 만든 가족 친화형 기업들이 있다. 여성가족부가 샘플 조사한 가족 친화형 기업만 20곳이 넘는다(표 참조).

태평양 뷰티트렌드팀에 근무하는 최숙희씨(32). 그녀는 태평양이야말로 자녀를 가진 여성이 일하기 가장 좋은 기업이라고 자랑한다. 그녀는 매일 아침 다섯 살짜리 아들 의경이와 함께 회사로 출근한다. 의경이를 사내 보육 시설 ‘태평양 어린이집’에 맡기는 순간 그녀는 아이에 대한 걱정을 잊고 일에 몰두한다. 점심 시간에 짬이 나면 의경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살짝 엿볼 수 있고, 야근할 때도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사내 보육 시설이 생기기 전에는 꿈도 못 꾸던 생활이다.

회사에 어린이집이 생기기 전에는 동네 아주머니에게 아이를 맡겼었다. 잘 돌봐주는 편이었는데도 안심이 안 되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해야 했고, 퇴근 후에는 아이의 다음날 먹을거리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가 아플 때면 회사 일이나 집안일 모두 뒤죽박죽이 되곤 했다. 최숙희씨는 “전에는 육아와 회사 일을 병행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둘 다 자신 있다. 올 해 안에 둘째가 태어날 예정인데, 아이가 둘이 되어도 육아와 일을 거뜬하게 병행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태평양은 보육시설 외에도 수유실·여성 휴게실 등을 마련해 여직원들을 배려하고 있다. 여성 휴게실에는 간호사가 대기하고 있어 직원들이 건강 상담을 할 수 있다. 최숙희씨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다른 회사에서는 결혼 또는 임신한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데, 여성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는 것은 회사가 나 같은 여성을 필요로 하고 열심히 일하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인사나 승진 평가에서도 남녀 차별을 경험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태평양, 탁아소·수유실에 여성 휴게실까지 운영

유한킴벌리 역시 가족 친화형의 경영을 하는 대표적인 기업이다. 이 회사를 들여다보면 일과 삶의 조화라는 경영 철학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이 회사에서는 회사와 직원, 남녀가 따로 없다. 채용·승진·임금·교육 기회가 모두에게 균등하게 주어진다. 배우자 건강검진·배우자 경조휴가·배우자 출산휴가·자녀 교육비 지원 등 근로자 복지 제도를 도입할 때는 늘 가족까지 함께 염두에 둔다. 심지어 전 사원 가족에게 컴퓨터를 지원해 어떤 가족도 정보화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다.  

또 이 회사에서는 결혼이나 출산이 누구에게도 ‘죄’나 ‘덫’이 아니라 ‘축복’이다. 출산 전후의 여직원을 배려한 제도가 그 어떤 기업보다 다양하다. 출산휴가는 물론 유산한 경우에도 유급 휴가를 주고, 회사가 항상 대체인력을 지원해주기 때문에 육아휴직계도 남녀 모두 당당하게 낼 수 있다. 아이를 낳으면 병원비의 절반을 회사에서 지원해 주고, 출산 선물을 한아름 안겨준다.

 
물질만 지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직원들이 가정과 일을 조화롭게 꾸려갈 수 있도록 시간도 배려해 준다. 일찍 퇴근하는 ‘육아데이’가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근무 시간제를 바꿔서 직원들이 가족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1993년부터 생산직을 4조 교대제로 바꾸고, 관리직과 영업직은 시차 출퇴근제나 재택 근무를 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 회사에서는 남자 직원들이 육아에 동참하는 것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사원 가족 상담 제도도 도입했다. 개인 및 가족 관련 문제, 스트레스, 업무나 재정 관련 문제까지 전문가에게 상담받을 수 있는 제도다.

태평양과 유한킴벌리 사례만 이야기하면 ‘여직원 비율이 높은 기업 또는 여성 소비자를 겨냥한 생활용품 기업이니까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할 이도 있을 것이다.

이레전자산업, 자녀 어학 연수 자금까지 지원

그렇다면 건설사업관리(CM) 회사 한미파슨스를 보자. 이 회사는 여직원이 많을 수밖에 없는 여성 소비재 기업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 회사 역시 직원뿐 아니라 직원 가족까지 챙기는 가족 친화 경영을 실천하고 있다. 한미파슨스는 전 직원에게 자녀 수와 상관없이 첫째 출산부터 출산장려금을 50만원 지급하고, 대학 때까지 교육비를 지원한다. 유치원 자녀의 경우 연간 1백20만원, 대학생 자녀의 경우 연간 8백만원까지 지원해 준다. 양육비 부담을 회사도 함께 지겠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매년 직원뿐 아니라 배우자까지 건강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직원 배우자의 생일에는 회사에서 생일 축하 카드와 케이크를 집으로 배달해 준다. 김종훈 사장은 “가족이 행복해야 직원이 행복하고 그래야 회사도 행복해질 수 있다. 직원 가족을 챙기는 것은 결국 기업 가치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온다”라고 말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최고 경영자가 늘면서 최근 몇 년 사이 가족 친화적인 경영 기법을 도입하는 기업들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서비스 업종이 아닌 제조 업체 가운데 이레전자산업(디스플레이)이나 네오웨이브(통신장비) 같은 중소기업들도 이런 문화를 도입하고 있다. 이레전자산업은 겨울이면 전 사원 가족에게 김장 김치를 담가 주는가 하면 사원 자녀들을 위해 겨울 스키 캠프를 개최한다. 또 5년 이상 근속한 직원 자녀들에게는 1인당 3백25만원을 지원해 3주간 해외 어학 연수를 보내준다. 네오웨이브는 매년 두세 번 가족 단위로 뮤지컬이나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해피 패밀리 데이’를 시행한다. 또 매달 마지막 수요일에는 일찍 퇴근해서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도록 권고한다.

 
하지만 국내 가족 친화형 기업 문화가 선진국만큼 정착하려면 아직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국내 진출한 외국계 기업을 빼고 나면 가족 친화 경영을 하는 국내 기업 수는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직원들이 양육 부담을 덜고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일정 규모의 기업은 직장 보육 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의무가 되어 있지만 이를 시행하는 기업조차 극히 적다. 여성 근로자가 3백명 이상일 경우 보육 시설을 설치해야 하는데, 노동부가 지난해 의무 대상이 되는 2백54개 업체를 조사한 결과 57개 기업(22%)만이 설치했다. 물론 ‘돈’ 때문일 수 있지만, 정부가 시설 건립비를 1~2% 저금리로 융자해주고 보육 시설 운영 비용을 지원해주는 등 기업 부담을 줄여주는 데도 신청하는 기업이 많지 않다. 

이직률은 줄이고, 생산성은 높이고

탄력 근무제와 같은 제도는 기업이 부담하는 비용이 거의 없는데도 시행하는 기업이 드물다. 아이를 통학시킨 뒤 늦게 출근하고, 그만큼 저녁에 더 근무할 수 있는 탄력 근무제는 자녀를 가진 여성들이 가장 선호하는 제도이자 기업에서도 비용이 적게 드는 것 가운데 하나다. 일본 복지후생성은 지난해부터 3백명 이상 근무하는 기업은 탄력 근무제를 의무화시켰다.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한국아스트라제네카 강종희 차장은 “아침에 아이를 유아원에 데려다 주고 여유 있게 출근하니까 하루를 더 알차게 보낼 수 있다. 모든 직원이 함께 일해야 하는 시간(오전 10시~오후 4시)이 정해져 있어 다른 사람과 함께 업무를 진행하는 데도 전혀 방해되지 않는다. 발상만 전환하면 기업에서 탄력 근무제 같은 제도를 도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고 말했다.
노동부가 지난해 여성 근로자의 영아 보육 실태를 조사한 결과 산전·후 휴가를 받은 직장 여성 열 명 가운데 한 명 이상(12.9%)이 육아의 어려움 때문에 퇴직했다(68%). 가정과 일을 병행하기 어려워 아예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는 여성은 더 많다. 직장 여성 두 명 가운데 한 명 이상(61.2%)이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둔다. 전문가들은 직장 보육 시설이나 탄력 근무제만 도입되어도 이 가운데 상당수는 직장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고, 한국이 안고 있는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LG경제연구원 이지평 연구위원은 “노동 인력이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향후 10년 동안에 여성의 사회진출과 육아를 양립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야 저출산·고령화 사회에 대비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기업 처지에서 이해득실을 따져 보아도 가족 친화 경영은 실보다 득이 많다. 독일 헤르티에재단 연구에 따르면, 가족 친화 기업은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생산성이 30%나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직원에 대한 배려가 회사의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한킴벌리는 지난해 이직률이 0.2%에 불과했고, 신입 사원 열 명 가운데 일곱 명 이상(74%)이 유한킴벌리를 평생직장으로 여기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직장 저 직장 옮겨 다니는 ‘파랑새 증후군’이 난무한 요즘 가족 친화 경영이야말로 인재를 잡아두는 확실한 비책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화여대 함인희 교수(사회학부)는 “가족 친화 경영은 단순히 여성의 부담을 좀 덜어주겠다는 생각이나 근로자 복지 차원에서 접근하고 선택할 일이 아니다. 기업 생산성과 직결된 문제다. 직원들로 하여금 회사 만족도를 높여 이직률을 낮추고, 근로자가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도리어 기업에 이득이 된다”라고 주장했다. 기업의 사고 전환이 절실하다는 말이다. 

기업의 사고를 확실하게 바꿀 수 있는 ‘채찍질’은 없는 것일까. 가족 친화적인 기업의 물건만 사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가족 친화형 기업일수록 잘 나가고 인재가 모인다면 따르지 않고 배길 기업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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