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바닷가 마을잔치 “굿 잘 치러 복받겠네”
  • 박상기 사회․문화부 차장 ()
  • 승인 1991.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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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흘 동안 동해안 별신굿을 벌인 하저리 마을은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의 꽤 규모가 큰 어촌이다. 1백76세대 7백3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이 마을은 너른 앞바다에 7ha에 으르는 마을 공동의 우렁쉥이(멍게) 양식장과 정치망 어장을 가지고 있다. 이 마을에는 연안어업용 통통배 10여척이 접안할 수 있는 방파제가 30m쯤 바다를 향해 뻗어 있고, 방파제 안쪽으로 활처럼 휜 모래받이 펼쳐져 있다. 마을 뒤편에는 야트막한 야산에 소나무 참나무 떡갈나무가 밀생해 있으며, 군데군데에 크고 작은 과수원과 농작물을 거둔 빈 밭이 눈제 띄었다. 구불꾸불한 뒷산의 골짜기에는 채 한 마지기도 안되는 작은 논들이 층층이 켜를 짓고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2백가구가 넘는 동네에 1천2백여명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젊은이들이 도회지로 빠져나가 마을의 생기가 전만 못해졌다. 게다가 마을 앞으로 2차선의 영덕~강구 포장도로가 뚫리고 있고 해안축조 및 방파제 확장공사가 진행중이어서 머지않아 마을의 본디 모습이 크게 달라질 조짐이다. 벌써 개발이익을 노리는 투기꾼들이 몰려들어 마을의 땅값을 몇배로 치솟게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우리 마을은 5백여년 전에 安公이 林里라는 이름으로 처음 만들었소. 마을 오른쪽에 할배사당이 있고 왼쪽에 할매사당이 있는데, 두 사당에서 우리 마을의 開洞主 여섯 어른의 위패를 모십니다. 매년 음력으로 정월 보름과 9월9일에 제사를 드리지요.”
 하저리 경로회장 李合乭(80) 노인의 말대로 할아버지당에는 순홍 安公, 밀양 朴公, 월성 前公 3위, 할머니당에는 월성 李公, 순홍 安公, 김녕 金公 3위가 모셔져 있다. 마을의 수호신인 이들은 주민 모두의 지극한 정성을 받는다. 마을의 근본을 간추려 “안씨 터전에, 박씨 골매기에, 유씨 배판”이라고 하는데, 할아버지당에 모신 神位의 순서대로 아득한 옛날에 이 마을을 창건한 조상들을 일컫는 것이다.

 동해안 일대의 별신굿은 마을의 수호신인 골매기신을 비롯한 무속의 여러 신들에게 마을의 안녕과 생업의 번영을 비는 마을굿이다. 지방에 따라 대동굿․도당굿․영등굿 등으로도 불리는 마을굿은 마을 공동의 길복과 평안을 기구하는 집단무속의례이다. 따라서 개인이나 한 가족을 위한 ‘재수굿’이나 죽은 사람의 넋을 위한 ‘넋굿’(진오귀굿) 수왕굿 다리굿 망묵굿 오구굿 씻김굿 시왕맞이굿 등)과는 달리 마을굿은 주민 모두가 참여하여 벌이는 한 마을의 ‘무속 축제’라고 할 수 있다.

“굿을 안하니까 죄를 짓는 것 같다.”
 하저리는 전에는 10년돌이로 별신굿을 해왔다고 한다. 더 예날에는 3년돌이, 5년돌이로 굿판을 벌였다고 하나 마을 노인들 조차 정확히 기억을 하지 못하였다. 지난 12월1일부터 나흘동안 벌인 굿은 16년만에 가진 것이었다. 이처럼 굿 주기가 길어진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굿의 경비를 장만하기가 쉽지 않은 탓이었다. 무당패를 초청하는 데 든 비용, 굿청을 만들고 제물을 갖추는 데 쓴 비용, 마을 사람들과 인근의 구경꾼들이 먹고 마신 음식 비용, 굿거리 하나하나마다 내놓은 뒷돈 등등을 합하면 이번의 하저리 별신굿에 약 2천만원의 모갯돈이 축났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이유는 굿에 대한 주민들의 믿음이 약화된 데에 있다. 전국 어디서나 새마을운동으로 서낭당이 헐리고 당집이 불살라진 ‘농어촌근대화’ 물결에 쓸려 ‘굿은 미신’이라는 관념이 젊은 세대의 머리에 새겨진 것이다.

 하저리 마을굿 추진위원회장을 맡은 金榮德(53)씨는 “이번 굿은 마을 노인분들이 강하게 주장해서 성사가 됐습니다. 조상 대대로 해오던 굿을 안하니까 당집에 모신 골매기 할배한테 죄를 짓는 것 같고…. 꼭 그래서 그런 건 아니겠지만 요 몇 년 사이에 우리마을의 40대 남자들이 여럿 죽는 등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지요”라고 말했다. 남녀노소 할 것없이 마을 사람들은 뒤늦게나마 굿판을 열어 마음 한구석의 께름칙함을 씻어내게 되었다고 반가워했다.

 행사 규모로나 절차의 복잡함으로나 마을굿은 몇몇 사람만이 나서서 될 일이 아니다. 하저리 주민들은 마을굿 추진위워노가 총무 재무 접대 경비 식사관리 등을 분담지어 각자의 몫을 맡았다. 그리고 당제를 모실 祭官과 도가집을 정했다.

 제관에 뽑힌 金有完(70) 李合乭(80) 金孝道(62) 세 노인은 제사 올리기 보름 전부터 바깥출입을 삼가고 집안에서 조신하게 지내야 했다. 혹시라도 부정한 기운이 끼어들면 당사자인 제관은 물론 마을에 큰 횡액이 닥친다는 것이다. 한번 제관에 뽑힌 사람은 제사가 끝나고도 1년 동안 초상집 출입을 삼가는 등 근신을 해야 한다. 당제에 쓰일 음식을 만드는 도가집은 제관의 우두머리인 祭主 김유완 노인댁으로 정해져 문에 금줄이 쳐지고 마을사람의 출입이 일절 통제되었다.

제물과 가무로 신을 즐겁게 하는 굿
 굿이 시작되기 전날 밤 자정 무렵에 똑같이 잿빛 두루마기를 입은 제관 3인은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에 제사를 지냈다. “허물없고 탈없이 마을굿이 잘 치러지고, 자손들이 마을에서나 객지에서나 어디에 있더라도 할아버지 음덕으로 항시 건강하고 하는 일마다 잘되게 해주십사”하는 제주의 간절한 비나리가 낮으막하게 이어졌다.

 이튿날부터 본격적으로 굿거리가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돌연한 사고로 미뤄졌다. 새벽에 강풍이 몰아쳐 비닐 천막으로 곡마단 무대처럼 지어놓은 굿청의 지붕이 날아간 것이다. 바람이 잦기를 기다려 동네 청년들이 굿청을 수리하느라 하루가 순연되었다.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굿구경을 온 인근 부락의 아낙네들은 잔치국수 한그릇씩을 비우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이 마을 출신으로 대구 포항 부산 등 객지에 나가사는 사람들도 휴가를 얻어 속속 돌아왔다. 이들은 사정상 귀성하지 못하는 이 마을 출신자들의 부조돈 봉투를 여러개씩 받아와 마을굿에 보태도록 하였다.

 하루를 공친 다음날 아침부터 굿은 시작되었다. 신칼로 물을 찍어 뿌려서 굿청의 부정을 씻어내는 부정굿으로부터 청좌굿과 당맞이굿으로 이어졌다. 당맞이굿은 마을의 수호신이 깃들어 있는 사당에 가서 마을 신을 모셔다가 굿청으로 옮기는 굿이다. 할아버지당에서 긴 청대나무로 된 서낭대 끝에 신이 실리자 무당의 입을 빌어 골매기신의 노여움이 터져나왔다.

 “십년 세월에 강산도 변한다는데 16년이 웬말인고, 때가 늦고 시가 너무 늦었어….” 골매기신은 16년만에야 굿을 하게 된 데 몹시 화가 나서 자손들을 꾸짖었다. 제관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잘못을 빌고 나서야 ‘그래도 내 자손이기 때문에’용서한다는 반응이 왔다.

 다음에는 마을의 당면 문제를 신에게 물어 대답을 구하는 순서가 이어졌다. 신탁은 서낭대의 떨림으로 내렸다. 마을 사람 중의 한 남정네가 대잡이를 하고 있는 서낭대가 진저리치듯이 떨리면 신의 승낙이 떨어진 것으로 받아들였다.

 “도로 및 해안축조 공사로 굿청의 장소가 마땅찮아졌는데, 다음번에는 장소를 옮겨도 괜찮겠습니까” 하고 묻자 한참만에 승낙의 떨림이 내렸다. 음력 시월은 너무 추우니까 굿 날짜를 3~4월로 바꿔도 되느냐는 물음에는 “시월에 그냥 하라”는 대답이 왔다. “제관을 맡은 사람은 1년 동안 길흉사에 다니지 못하므로 애로가 많습니다. 1년을 한달로 줄이면 안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한달은 곤란하다. 백일 동안만 부정한 데 가지 말고 조심하도록 하라”고 응답했다. “마을에 상수도 시설이 완비되어 우물이 필요없어졌는데, 공동우물 세 곳을 묻어버릴까요”라는 물음에는 “그렇게 하라”는 대답이 내렸다. 마을 公事를 다 물은 뒤 대를 앞세우고 제관들이 위패를 안아다가 굿청으로 옮겼다. 마찬가지로 할머니당의 위패도 옮겨왔다.

 굿의 과정은 크게 請신 娛神 送神으로 나뉜다. 청신은 당나무나 당집에서 신을 청해서 굿당으로 모셔오는 것을 말한다. 오신은 신이 인간의 정성에 감동해 복을 내리면서 춤추고 노래하는 과정이며, 마지막으로 신을 본디의 자리로 되돌려보내는 것이 송신이다.

 대개 굿의 본체는 인간이 음식과 제물로 신을 대접하고 춤과 노래로 신을 즐겁게 하여 마침내 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오신의 과정에 있다. 그러므로 무당은 신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가무와 풍류에 능해야 한다. 특히 마을 전체의 집단제의적 성격을 띠는 마을굿에서는 며칠 동안 온 마을 주민들을 흥겹게 하고 신명이 오르게 해야 하므로 종합연희적인 기예에 뛰어나야 한다.

 하저리 마을굿을 주관한 무당패는 모두 13명으로 이뤄졌다. 휴전선 밑에서 경남 통영지방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에서 宋東淑패와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세습무가인 金石出(73)패의 일부가 참여한 것이다.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김씨는 동해안 최고의 양중(양중)으로서 무속의례 전반에 능하고 악기 연주도 일품이다. 동해안 지방에서는 무녀를 ‘무당’ ‘무당각시’라 하고 무부를 ‘양중’ ‘화랭이’라 부르는데, 무당과 양중은 보통 부부를 이루고 있다. 양중은 굿판에서 무악을 반주하고 가무를 지휘하며, 무당집단의 대표자로서 굿의 의뢰자와 계약을 맺기도 한다.

 석출씨의 조부인 김해 김씨 金千得은 본디 양반이었는데, 춤과 노래를 좋아하여 이옥분이라는 무당을 첩으로 얻으면서부터 巫家를 이루었다고 한다. 석출씨는 형 好出, 동생 載出과 함께 수십명에 달하는 세습무가를 이루었으나, 형과 아우가 죽고 없는 지금 그가 김씨 무가의 중심인물이다.

 하저리 별신굿에는 김석출과 그의 처 金有善(63), 그의 세딸(영희 동년 동언)과 첫째사위 諸葛泰伍(49),  셋째사위 김동렬씨가 참여했으며, 그의 친조카들인 金龍業(56) 金龍澤(46)김정희 김정국씨도 함께 했다. 석출씨는 연로한 탓으로 굿판에서 한걸음 물러난 입장이며, 김씨 무가의 다음 세대 중심인물로는 김용택씨가 떠오르고 있다.

 이들은 부산 포항 구룡포 등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상호간에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굿판에 함께 나다닌다. 갓난아기 대부터 동해안 곳곳에 굿을 하러 다니는 부모 등에 업혀 다니기 때문에 이들은 “말보다는 굿장단을 먼저 배운다”고 할 만큼 무가적 분위기에서 자라게 된다.

 석출씨의 아우인 재출씨의 아들 김정희씨는 “두세살 때부터 꽹과리를 두드리기 시작해 네 살 때는 제법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는 장구 제금 징 꽹과리에 모두 능란하여 한때는 국립국악원의 사물놀이패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철들 무렵 한때는 무당 팔자로 타고난 것이 한스러워 무업을 피하려고 하였으나 자신의 핏속에 흐르는 ‘끼’를 버릴 수가 없더라고 했다. 그러나 해가 바뀔수록 굿을 청하는 마을이 줄어들고 있어 내심 장래가 불안하다. 이제 서른줄에 들어선 그와 그의 동생 정국씨의 경우에는 아버지 세대처럼 무업으로 생업을 삼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동해안 별신굿은 24거리(度)를 갖춰야 제격이다. 하저리 마을굿은 문굿 부정굿 청좌굿 양당맞이굿 하해굿 조상굿 세존굿 성주굿 군웅굿 황제굿 산신굿 천왕굿 지신굿 심청굿 장수굿 용왕굿 손님굿 걸립굿 탈굿 꽃노래 뱃노래 등노래 대잡이 대거리의 24석에다가 도둑잡이 놀음과 원님놀이를 곁들인 총 26석으로 거의 완벽하게 별신굿의 전과정을 보여주었다.

 거리마다 무당이 바뀌어 나와 몇시간씩 除災招福의 가무를 진행하였다. 흥에 겨울 때는 마을사람들이 덩실덩실 춤추는가 하면, 슬프고 애달픈 사설이 풀어져나올 때는 굿청은 눈물바다로 바뀌곤 했다. 

마을굿 통해 공동체 의식 다져
 무당은 굿거리마다 그 굿의 해당신에게 마을의 안녕과 번성을 빌어준 다음 마을 사람 개개인에게도 무병장수와 길복을 축원해주었다. 축원공덕으로 몇백원의 동전을 내놓는 할머니, 몇천원의 용돈을 내놓는 아낙네들, 굿의 흥취를 돋우기 위해 무당의 머리와 가슴에 만원권의 지폐를 어지럽게 꽂아주는 남정네들로 굿판은 흥청거렸다.

 아침 9시부터 시작된 굿은 매일밤 자정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저승돈 팔아 이승돈 사는’ 해녀 생활을 하는 최옥순(54)씨는 해삼 전복 성게가 눈에 잘 띄게 해달라 기원했으며, 아들이 객지에서 운전기사 노릇을 한다는 어떤 이는 “핸들 잘 돌아가고, 빵구 나지 말고, 신호 잘 지켜 사고내지 말라”는 무당의 축원에 낯색이 활짝 피었다. 노인들은 ‘사흘만 앓다가 자는 듯이’ 죽기를 바라고, 선주들은 출어 때마다 동해의 고급 활선어들을 쓸어담아 만선의 신호인 청깃발 홍깃발을 올리기를 기원했다.

 밤이 깊어 그날의 굿거리가 끝나면 한동안 마을사람들의 노래잔치가 벌어지곤 했다. 온동네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춤추고 노래하는 이 ‘뒷풀이 놀음굿’도 마을굿의 빼놓을 수 없는 여흥이었다. 한바탕 난장을 벌이면서 한마을에 모여사는 한동네 사람으로서 공동체 의식을 다지는 것이다.

 하저리 사람들은 마을굿을 통하여 같은 골매기 할배의 자손으로서 정신적인 유대를 튼튼히 하고, 마을에 대한 애정과 긍지를 높이는 것이었다. “죽기 전에 굿을 해서 원이 풀렸다”는 공순근(72) 할머니나 “큰돈 들여 굿을 잘 치렀으니까 앞으로 마을에 좋은 일이 많을 것”이라고 이장 全福述(53)씨의 얼굴에는 별러온 마을 축제를 잘 마친 안도감과 기쁨이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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