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의 세월 돌아보며 눈물글썽
  • 이성남 사회․문화부 차장대우 ()
  • 승인 1991.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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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만신 金線花/17살 때 외할머니가 손수 내림굿…84년 무형문화재 지정

 지난해 12월23일, 천마산 자락을 베고 있는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면 가곡 1리의 굿당에서는 한 사람의 새로운 만신이 탄생하고 있었다. 치마를 펼치고 서있는 入巫者에게 황해도 만신 김선화는 巫具인 부채와 방울을 던져주면서 만수받이조로 노래하며 이렇게 일러준다.

 “…불리러 가요 늘리러 가요/치맛자락 잡아라 가까이 오너라/옳은 길로 바른 길로/선한 길로 착한 마음으로/산을 넘어 물을 건너/넘어지면 일어서구 일어서면 넘어가라/또 넘어진다 또 넘어가라/또일어서라 또 일어서면/또 넘어진다 모든 의혹이 다 사라진다/이겨내라…”

 이날 내림굿을 받은 이는 두 아이를 둔 42살의 주부였다. 친정어머니 오빠 남편 동생 등 일가붙이가 잇따라 죽자 마침내 내림굿을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다리를 앓아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 몸인데도 이날 온종일 춤을 추며 죽두타기까지 내림굿 18과정을 거뜬히 마쳤다.

‘미신타파’ 구호 속 배급 밀가루로 연명
 굿판에서는 인간의 눈으로 이해되지 않는 광경이 벌어진다. 이날은 굿 중간에 느닷없이 박정희 전대통령의 넋이 그녀의 몸에 실려들어오는 이변이 일어났다. 총에 맞아 쓰러지는 시늉을 하던 그녀는 일어나 박정희의 육성으로 말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아프구나, 내가 정치를 뭣을 잘못했는고. 잘살아보자 잘살아보자 새 마을사업 하는 것도 죄냐…나는 기자 양반을 제일 미워하지요.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한 것이 무엇입니까. 나라는 흥망에 놓여 있고 노태우 정치 물러가라 외치는 학생들. 학생들은 무엇을 했느냐. 통일은 힘들다…이 삼십년은 더 있어야 이루어진다.” 굿판에 이런 넋이 실려오는 경우는 드물며 그다지 상서롭지 않다는 것이 주무의 설명이다.

신병을 앓는 이들에게 내림굿을 해주며 시퍼런 작두날 위에서 공수를 내리는 큰만신 김금화는 누구인가. 그는 황해도 옹진군 흥미면 괴암리에서 태어났다. 외할머니 김천일은 무당이었는데 유달리 그를 미워해서 굿당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열한살 때부터 시름시름 앓았으나 쪼들리는 가정형편에 병원에 갈 처지도 못되었다. 열셋에 시집을 갔으나 열여섯에 쫓겨나고 말았다. 

 그날 이후 신병이 더욱 깊어져 시퍼렇게 날이 선 낫만 보면 매달리고 싶은 충동이 솟았다. 결국 할머니는 손녀딸의 내림굿을 손수 해주었다. 열일곱살 때의 일이다.

 그후 해남면의 안만신과 관에서 굿을 하던 권만신을 따라다니며 3년 동안 굿을 배웠다. 처음에는 무복을 개는 일과 방울 흔드는 일을 배웠다. 굿판에서는 선생 만신의 뒷수발을 들면서 무가를 외고 굿을 익혔다. 열아홉살 때 처음으로 세 살 아래인 육손이 처녀에게 내림굿을 해주었다. 

 황해도 해주 지역에서 이름을 날릴 무렵 6.25가 터졌다. 대개의 황해도 사람들처럼 그의 가족은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스물다섯에 다시 결혼했으며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남편은 바람이 났고 그는 무당이기에 남편을 단념해야 했다. 새마을운동이 확산되어 ‘미신타파’의 구호 속에 전국의 굿당이 헐리던 시절이어서 구호 밀가루로 끼니를 때우며 궁핍한 생활을 했다.

 66년에 주위의 권유로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 ‘풍어제’로 출전,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떡 해놓고 돼지 잡고 장구치는 것쯤으로 여겨지던 굿이 종합예술로 당당히 인정받은 것이다. 눈물이 나고 목이 메었다. 

 82년 한․미수교 1백주년 기념으로 미국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작두타기를 공연한 일은 그의 무당 일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다. 84년 2월 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 서해안 풍어제 기능보유자로 지정되던 순간의 감회도 그는 잊지 못한다.

 팔도의 여러 무당 중에서도 그의 이름이 유독 드높은 것은 황해도 내림굿에 들어 있는 작두타기 때문이다. ‘비수거리’라 불리는 이 과정을 하려면 3m 높이에 승전기를 양쪽으로 세우고 그 사이에 칠성단을 쌓는다. 맨 밑에 드럼통을 놓고 그 위에 안반․밥상․송판․물동이․양푼 등을 쌓은 뒤 두 개의 작두를 올려놓는다. 주무는 날이 시퍼런 작두를 올려놓는다. 주무는 날이 시퍼런 작두를 자기 팔과 다리 혀 등에 대고 누른다. 자국만 날 뿐 베지 않는다. 곁에서 작두신 어르는 법을 배운 입무자는 한달음에 작두날 위에 올라선다. 몇 번이고 발을 움직여본 후 굿판에 모인 사람에게 공수를 준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작두타기를 40여년동안 해온 김금화에게 시퍼런 작두날이 제대로 보이는지 물어보았다. “물론 보인다”는 답변이었다. 어떨 때는 무의식적인 힘에 이끌려 후다닥 올라가지만 어떨 대는 무섭다고 말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작두를 탔지만 발을 다쳤던 경험은 통틀어 세 번이다. 열아홉살 때 작두신령을 모시고 가는데 어떤 이가 죽은 아이를 끼고 앞을 지나갔다. 그걸 모르고 날 위에 서있는데 발끝이 선뜻선뜻했다. 부정을 탄 것이다. 또 한번은 굿 준비 과정에서, 도 한번도 작두를 몰래 가는 과정에서 부정을 탔다.

 지금까지 그가 내림굿을 해준 사람은 줄잡아 20명이 넘는다. 그의 경험에 비추어 지적 수준이 낮은 여자가 신병을 앓는 비율이 높다. 그러나 81년 6월에 내림굿을 한 채희아․김경란 같은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채희아는 경기여고와 서울음대를 졸업한 후 도미하여 캘리포니아대학 로스앤젤레스 분교에서 종족무용학을 연구하던 중 신병을 앓았으며, 김경란은 경기여고․서울미대를 중퇴한 후 내림굿을 받은 이다. 더러는 남자한테 내림굿을 해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더 미안하고 안됐다는 마음이 든다.

고아원 양로원 등에 수익금 기부
 그 자신은 콩나물죽을 끓여먹을망정 어려운 사람에게 고기 한근이라도 사줄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이다. 요즈음에도 굿판에서 들어오는 수익금의 상당부분을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기부한다는 것이 주위 사람들의 말이다. 몇해 전 세실극장에서 공연했을 때는 그 수익금으로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는 나병 환자촌에 차 2대를 사주었다.
 
무당들이 화가 났을 때 하는 악담이 있다. “니네 집안에 무당이나 나와라!” 스스로 가장 밑바닥 인생임을 고백하는 이 말은 무당의 뼈아픈 고통을 단적으로 나타내준다.

 김금화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무당이라해서 사람한테 놀림받고, 설 자리에 서지 못했던 일이 가장 안좋았다”고 털어놓는다. 결혼식 회갑연 같은 경사스러운 잔칫집엔 “손가락질받을 것 같아서” 가지 않았다. 사람을 시켜서 축의금을 전달할 뿐이었다.

 “그동안 사람도 잃고 돈도 잃고 많은 외로움 속에서 나 혼자만이 절벽에 매달려서 살려고 용심을 쓰다가 이제 겨우 평지길에 접어들었는데 그만 인생행로가 다 저물어간다.” 하염없는 한숨 속에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예순살 큰무당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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