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이 되어버린 황금어장
  • 우즈베키스탄 무이냐크.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0.09.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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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르포/유엔 선정 20세기 최악의 환경 재앙 지역 아랄 해를가다

무이냐크까지 세 시간쯤 걸립니다. 안내인의 설명을 들으며 카라칼팍스탄(우즈베키스탄에 속한 자치 공화국)의 수도 누크스를 벗어나는 순간 차창 밖으로 기묘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왕복 2차선 포장 도로 옆으로 펼쳐진 들판 위에 흰 가루가 듬성듬성 뿌려져 있는 것이었다. 버려진 땅에 비료를 뿌렸을 리는 만무했다. 길가에 차를 멈추고 내려 가루를 손가락에 찍어 맛보았다. 짰다. 안내인이 말했다. 아랄 해에서 날아 온 소금입니다.

죽음의 바다 저주받은 바다 유엔이 선정한 20세기 최악의 환경 재앙 지역 아랄 해와의 상견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맛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들판은 누크스-무이냐크를 잇는 2백여km 내내 계속되었다. 아니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아랄 해에 가까워질수록 소금 밭은 점점 소금 사막으로 변해갔다. 농작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길을  가로지르는 낙타를 빼고는 생물체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소금기 날리는 사막에는 이 지역 사람들이 살란차크라고 부르는 독초만이 어른 허리 높이로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무이냐크에 들어서자 아랄 해의 죽음은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무이냐크는 한때 아랄 해 남부 연안에 자리잡은 최대 항구였다. 만명이 넘는 어부가 이 마을에 살았고 이들은 매년 수천t에 이르는 물고기를 낚아 올렸다. 그러나 지금은 이 마을 어디에서도 옛날의 영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마을은 적막했다. 거리에 나와 있는 것은 우리 돈으로 100원이 채 안되는 수박이면 단야(메론)을 좌판에 늘어놓고 파는 남루한 여인과 어린이들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이냐크는 더 이상 항구 도시가 아니다. 바닷물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아랄 해는 이 마을로부터 멀어져갔고 현재 이 마을과 아랄 해 사이의 거리는 100km가 넘는다. 언제라도 웃통을 벗어 뛰어들 수 있었다는 푸른빛 바다는 이 마을에 존재하지 않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호텔 소년단 야영지 따위가 즐비하게 늘어선 바닷가 휴양지였던 무이냐크 전쟁승리기념탑 일대는 거대한 황토 사막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랄 해(아랄모레)는 사라지고 아랄 사막(아랄쿰)만 남아있다는 현지인들의 탄식이 실감 나는 현장이었다.

40년 동안 바다 넓이 절반으로 줄어
어떤 천재적인 소설가도 상상하지 못한 극적인 변화가 아랄 해를 덮친 것은 40년 전이었다. 본디 아랄 해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내해였다. 그 면적은 남한(9만9천㎢)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6만4천490㎢였다. 그런데 지난 40년 사이 그 면적이 절반으로 절반으로 줄어들었다.(49쪽 상자 기사 참조) 풍부했던 물은 37%(300㎦)만 남았다.

화를 부른 것은 인간이었다. 아랄 해가 풍부한 수량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톈산 산맥과 파미르 고원에서 발원해 중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두 개의 큰 강 아무다리야 강과 시르다리야 강이 끊임없이 아랄 해로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50년대 말 옛 소련은 중앙아시아 사막 일대에 대규모 면화 경작지를 조성하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면화는 부족한 외화를 벌어들일 하얀 금(white gold)으로 칭송되었다. 사막에 면화밭을 일구려면 관건은 물이었다. 소련 당국은 아무다리야 강과 시르다리야 강에 눈을 돌렸다.

이에 따라 1956년 카라쿰 운하가 개설되었다. 아랄 해 남서부의 거대한 사막 지대(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 영토에 속한다)로 강줄기를 돌리는 이 운하가 들어서면서 아무다리야 강을 흐르던 수량의 30%가 사막 지대로 빠져 나갔다. 이 중 50%는 면화밭에 도달하지 못한 채 사막에 흡수되었다. 카라쿰 운하를 필두로 다른 관개 시설도 속속 들어섰다. 그 결과 중앙아시아 일대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면화 생산지로 발돋움했다. 이 지역 면화 생산량은 한때 옛 소련 전체 생산량의 90%를 웃돌았다.

그로테스크한 몰골의 배 무덤
그 이면에서 아랄 해는 죽어갔다. 1960년 이전만 해도 연간 56㎦씩 아랄 해로 흘러들던 수량은 1975년 7~10㎦로 줄어들었다. 1975년에는 급기야 시르다리야 강이 아랄 해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무다리야 강 또한 1982년 처음으로 아랄 해에 도달하지 못했다. 아랄 해 수량은 급감했다. 1960년 이래 40년 동안 아랄 해 수위는 20m나 낮아졌고 지금도 계속 낮아지고 있다.

수량이 줄다 보니 바닷물은 급속도로 짜졌다. 1960년대 1ℓ당 10.2g 수준이었던 염도는 1990년 대 58~60g 으로 상승했다(참고로 태평양의 평균염도는 1ℓ당 35g이다). 수면이 얕아지고 염도가 올라가면서 물고기가 떼죽음 당했다. 1960년대 아랄 해에는 토종 물고기 20여 종과 외래종 물고기 14종이 살았다. 그러나 오늘날 토종은 씨가 말랐고 짠물에 강한 외래종 2종만이 살아 남았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아랄 해는 우즈베키스탄 전체 어획량의 98% 옛 소련 전체의 어획량의 5~7%를 생산하던 황금 어장이었다. 어종 또한 철갑상어 잉어 돌잉어 메기 등으로 질이 좋았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부모가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뒤 무이냐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고려인 채 알레그(64)씨는 60㎏이 넘는 상어를 잡아 올리는 일은 예사였고 철갑상어 알은 숟가락으로 퍼 먹을 만큼 흔했다고 옛날을 회고했다.

그러나 아랄 해에서의 고기잡이는 1983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일자리를 읽은 어부들은 고향을 등졌다. 1962년 4만 7천명이던 무이냐크 인구는 2000년 현재 2만6천 명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오늘날 무이냐크가 항구 도시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표는 어부들이 버리고 떠난 배밖에 없다. 낡고 녹슨 이들 고깃배는 뭉크의 그림만큼이나 그로테스크한 몰골로 사막 군데군데 서 있다. 무이냐크 사람들은 이를 배 무덤 이라고 부른다.

생명 앗아가는 아랄 해의 소금 바람
무이냐크 시가지 한복판에 있는 생선 통조림 공장의 문 또한 굳게 닫혀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전선에 통조림을 보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 공장에는 한때 6천명이 넘는 노동자가 북적거렸다. 이 공장에서 27년째 근무하고 있다는 나스이로바알티나이(44)씨는 아랄 해에서 물고기가 잡히지 않게 되면서 러시아에서 물고기를 수입해 가공 판매해 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 일머저 끊겨 놀고 있다라고 말했다.

아랄 해의 비극은 어부들의 삶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었다. 아랄 해에서 불어오는 독성이 강한 소금 바람은 반경 수백km에 이르는 지역을 초토화했다. 농작물은 마르고 가축들은 죽어갔다. 1980년대까지 농약을 함유한 농업 용수가 강물로 흘러들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했다. B-58 DDT 메타포스 같은 고농축 살충제가 물을 오염 시키면서 동물의 내장 기관뿐 아니라 여성의 모유에서도 살충제 성분이 검출되었다. 러시아 학자들은 이 모든 일련의 상황을 아랄 카트스트로파(아랄 참사)라 불렀다.

일리야 졸다소바 교수(우즈베크 학술원 카라칼팍스탄 지부 생물연구소장)는 이같은 환경 파괴가 야기한 가장 심작한문제로 생물 다양성의 황폐화를 지적했다. 아랄 해 연안에 살고 있는 동식물 가운데<크라스나야 크니가><멸종 위기에 있는 러시아 동 식물 연감)에 오른 것은 가금류 98종 포유류 27종에 이르며 그 명단은 해마다 늘고 있다. 투란 호랑이 제이란 사슴 따위는 이미 멸종했다.

먹이사슬의 정점인 인간에게서도 생태계 파괴의 영향은 이미 나타났다. 아라 해의 70%를 끼고 있는 카라칼팍스탄 자치공화국의 통계를 보면 1974~1989년 이 지역의 장티푸스 발병률은 30배 바이러스성 간장염 발병률은 7배 증가했다. 1996년 <알랄 해 남부 지역 거주민의 단명 및 높은 수준의 영유아 사망률에 관한 연구>를 발표한 러시아 학자 차르자우 압지로바는 이같은 질병이 증가하는 가장 큰 이유로 식수의 질을 꼽았다. 그에 따르면 이 지역 상수원의 80%는 수질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아랄 해 일대의 열악한 보건 상황은 영아 사망률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생후 1년간 아기는 성인에 비해 환경 악화와 비위생적인 생활 환경에 훨씬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영아 사망률은 한 나라의 보건 수준을 가늠하는 주요 잣대로 취급된다. 1975~1998년 카라칼팍스탄 영아 사망률은 천명당 25.7~61.6명을 넘나들고 있다. 옛 소련 지역에서 이는 가장 높은 수치였다. 참고로 1998년 현재 한국과 일본의 영아 사망률은 가각 7.7명과 3.8명이다.

같은 기간 모성 사망률(임신 분만 및 관련 합병증으로 인한 사망자)또한 10만명당 64.1~145명으로 선진국 평균인 10만명당 6~7명을 크게 웃돌았다. 누크스 시립 제 1병원 의사 라비가 타시모바 씨는 이 지역 여성의 90%가 영양 불균형으로 빈혈을 앓고 있다라며 이 때문에 출산할 때 체력이 떨어져 사망하는 산모가 많다고 말했다.

산모의 영양 불균형은 태아에게 영향을 미친다. 산모의 영양 불균형은 태아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 지역의 선천성 질별 발생률은 1980~1998년 10배 가까이 증가했다. 아랄 해에서 불어오는 소금 바람 때문에 피부병과 인후암을 앓는 환자가 많은 것도 이 지역의 특징적인 현상이다. 갑상선 기능 저하나 갑상선종을 호소하는 환자도 많다. 누크스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턱 아래 갑상선이 부풀어 오른 남녀노소를 쉽게 만날 수 있다. 과거에는 물고기를 통해 요오드를 충분히 섭취할 수 있었는데 아랄 해가 망가진 이후 물고기가 귀해지면서 갑상선 질환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 타시모바 씨의 설명이다.

아랄 해 환경 난민 7만5천명
상황이 나아질 전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랄 참사는 더욱 비극적이다. 고르바초프 전 서기장의 개방 정책으로 아랄 해 문제가 국제 사회에 처음 알려진 뒤 세계은행(WorldBank)와 유네스코가 잇달아 아랄을 살리자 고 나섰지만 밑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카라칼팍스탄 정부 관계자는 소금 바람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1990년대 들어 아랄 해 남부 연안에 연평균 300ha 씩 방풍림을 심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는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 정부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아랄 해 문제는 아무다리야 시르다리야 강을 끼고 있는 중앙아시아 다섯 나라(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가 모여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 정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옛 소련에서 독립한 직후 이들 다섯 나라는 아랄 해 복구를 위해 물 소비를 줄이고 공동 기금을 조성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렇지만 실질적인 조처는 전문하다시피 한 상황이다. 아랄 해를 고갈시킨 주범인 면화 재배지는 여전히 이들 나라의 주요 수입원이며 따라서 이들은 여전히 아랄 해로 흘러들어야 할 물을 끌어다 쓰고 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은 이대로라면 환경 재앙으로 인해 무력 충돌마저 일어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이 기구에 따르면 아랄 해 축소와 경작지 사막화로 이 지역을 떠난 환경 난민은 7만5천명에 이른다. 세계적인 환경단체인 월드워치연구소 또한 이들 지역에서 대량 기아 폭동 전쟁 따위 예측하지 못할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올 들어 아랄 해의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있다. 아랄 해 수위는 지난 1년 사이  85cm나 더 낮아졌다. 이 지역의 유일한 식수원인 투이아뮌 저수지의 저수량은 최근5년간 평균치의 36%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시민단체는 세계 각국에 긴급원조를 요청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주재 한국대사관 장 훈 대사는 중앙아시아를 휩쓴 전례 없는 가뭄으로 아랄 해 일대의 식수 식량 난이 심각하다라며 한국이 인도적인 차원에서 이들 지역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호소했다.

획기적인 조치가 없으면 2010~2025년께 아랄 해가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하는 학자들도 있다. 설사 아랄 해가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해도 이런 추세라면 2020년께 아랄 해 염도는 1ℓ당 80g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 짠물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생명체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리야 졸다소바 교수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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