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 한권에 미국언론 생트집
  • 김재일 경제부차장 ()
  • 승인 1991.0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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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 ‘우리농산물애용’ 홍보책자에 “정부주도 불매운동이다”

 한권의 만화책이 국제적인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의 유력자들은 지난 11월 중순부터 최근까지 우리 농협중앙회가 출판한 만화책의 내용이 수입품 불매 운동을 부추긴다며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어떤 내용이길래 미국 언론이 대서특필하는가, 그리고 ‘만화파동’의 본질은 무엇인가?

 문제의 만화책은 농협중앙회가 제작, 배포한 56쪽자리 《달리의 방학기행》으로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울의 한 국민학교 5학년인 유달리군은 여름방학 때 친구의 초청으로 충청도 밤골에 내려가 농촌의 어려움을 알게 된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돌아온 달리군은 친구들에게 농촌의 어려운 실정을 설명하고 “외국 농산물을 사지 말고 우리농산물만 사먹자”고 주장한다. 친구들은 그의 주장에 동조하여 부모가 수입 농산물을 사려하면 이를 적극 만류한다. ‘우리 농산물 애용운동’은 전국으로 퍼진다.

“일본에선 이런 만화책 흔하다”
 농협중앙회는 지난해 10월하순경 이 만화책 60만부를 단위농협을 통해 전국의 국민학교에 배포 했다. 11월초 랄프 기포드 미농업무역관장은 수행원 2명을 데리고 농협중앙회를 방문, 만화책의 내용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다. 미국측이 문제삼는 내용 중에는 ‘자몽에서 알라가 검출됐다’는 등 자몽의 유해성 여부처럼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양국간 문화 및 인식의 차이로 인한 오해라고 볼 수 있는 대목도 있다. 예를 들어 방학 동안 바닷가에서 지내다가 검게 탄 얼굴로 학교에 돌아온 한 학생에게 선생님이 “어느 흑인나라에서 왔나?”라고 묻자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이다. 이를 미국측은 인종차별적인 내용으로 보고 있다.

 우리 정부와 농협측은 그 정도로 문제가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11월14일 <월 스트리트 저널>이 ‘미국은 현대 자동차의 타이어를 펑크내기 위해 가필드(탐정만화 주인공)를 고용할 수 있다’는 제목의 기사로 이 문제를 다룬 데 이어 다른 신문과 통신이 1~2주 간격으로 만화 컷과 함께 이 문제를 취급했다. 대강 살펴 보면 11월20일자 <저널 오브 커머스>의 ‘만화가 수입반대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다’, 12월14일자 <뉴욕 타임스>의 ‘무역회담은 비공식 무대에서 계속될 것이다’, 12월16일자 <시카고 트리뷴>의 ‘한국인들, 미국제품 불매운동 열올려’, 12월28일자 <워싱턴 포스트>의 ‘한국은 수입품에 대해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등이다. 이에 앞서 11월 21일에는 AP통신이 가세했고 최근에는 <로스앤젤러스 타이스>가 만화책을 문제삼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문들은 한결같이 ‘한국 농협의 만화책 제작, 배포는 수입반대 운동의 한 형태로서 이 운동은 정부가 주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농협측은 “민간단체의 순수한 우리 농산물 애용 운동에 미국이 괜한 시비를 걸어와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특히 정부의 사주에 의해 만화책이 만들어졌다는 미국 언론의 시각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고 있다.

 농협중앙회에 따르면 89년 7월중순 조합장 12인으로 구성된 농산물 수입개방 대책분과위원회에서 우리 농산물 애용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했고 90년 6월하순 이 운동의 일환으로 국민학생 대상의 홍보용 만화를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농협은 학생 교사 소비자단체 농민단체로부터 “매우 재미있고 유익한 내용”, “농협홍보책자중 제일 잘된 책”,“꼭 필요한 내용이며 추가 배부 요청” 등의 호응을 얻었다고 말했다. 또 일본에서는 이런 류의 만화책이 흔하다는 것이다.

 농협중앙회의 吳弘明홍보과장은 “89년 조합장들이 결의한 우리농산물애용운동의 일환이므로 지난해에 시작된 과소비추방운동과는 무관하다”고 말하고 “학생들에게 농촌의 어려움을 일깨워주고 어린 시절부터 우리농산물을 애용하는 습관을 가지게 하는 일은 농협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며 농협의 존립 목적 자체다” 라고 주장했다.

 만화작가인 김우영씨는 “그전부터 다루고 싶은 내용이었는데 미국측이 우리 실정을 너무 모르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처음 원고에서는 고추 값 파동으로 인한 농민 자살소동 등 더 강한 내용을 담았으나 농협측에서 삭제했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러면 왜 미국측은 우리시각으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만화책에 ‘과민반응’을 보일까. 이는 앞으로 유사한 사건의 방지와 순조로운 대외관계를 위해서도 짚어볼 가치가 있는 부분이다. 미 대사관의 조지 포우프 농무참사관과 랄프 기포드씨가 인터뷰에 응했다. 미대사관에서 만난 그들은 우선 ‘오프 더 레코드(비공개)’를 전제로 만화사건의 배경에 대해 기자와 자유토론을 한 다음, 인용을 위한 답변을 할 정도로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포우프씨는 문제의 만화책에 관한 정보를 국민학생 자녀를 둔 미국대사관의 한국인 직원을 통해 한국인 직원을 통해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만화책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게 느꼈고 대단히 당혹스러웠다. 한국 독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지 모르지만 미국인과 다른 나라 사람들을 화나게 했다. 따라서 과민반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도 미국상품 애용 캠페인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농협 만화는 순수한 국산품애용운동이 아니라 수입품 불매운동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89년 7월 농협이 우리농산물애용운동의 추진계획을 미대사관에 통보해왔을 때 그 운동 자체에는 “전혀” 이의가 없으나 외국 농산물 불매운동 쪽으로 “선을 넘어서면 안된다” 고 강력하게 경고했음을 상기시켰다. 기포드씨는 “어느 누구도 농협을 정부로부터 1백% 독립된 기관이라고 보지않을 것” 이라고 말하고 농협중앙회를 ‘준국영(parastatal)’ 기관이라고 규정했다.

 농협에서 비슷한 내용의 책을 또 다시 낸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포우프씨는 “그러지 않으리라고 믿고 또 바란다. 또 다시 그런 문제를 일으켜 수십억달러어치의 상품교역이 논의되는 양국무역회담에 해를 끼칠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반문했다.

마찰 가져올 불씨는 없애야
 미국대사관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농협은 미대사관이 만화책에 관한 정보를 흘려 미대사관이 만화책에 관한 정보를 흘려 미국 언론을 ‘조직적으로’ 부추겼다고 믿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일정 기간을 두고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겠냐는 것이다. 서울대의 姜明求 교수는 “미국 언론이 특정 정권을 비호하는 것은 아니나, 그들이 국내문제를 다룰 때의 사실성 균형성 공정성의 원칙이 외국 문제를 보는 시각에도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한다. 미국 신문이 국외문제에 관한 기사를 철저하게 국익의 관점에서 다루며 대외관계를 팽창주의적 관계에서 보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는 것이다.

 표면상 사소한 표현문제에서 출발한 만화책 파문은 여러 면에서 양국간 인식의 차이를 드러내주었다. 이는 껄끄러운 한미 통상관계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민감한 시기에 덜미를 잡힌 꼴이 된 것이다. 이와 함게 우리의 시각으로는 당연할지라도 미국측에서 볼 때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표현이나 행위는 피하면서 실속을 차리는 지혜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우리는 지금 열린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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