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전파 융단폭격 CNN의 바그다드 쾌거
  • 김종환 국제부차장 ()
  • 승인 1991.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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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지구촌’시대 연24시대 연24시간 뉴스채널,걸프전쟁서 위력

 걸프전쟁 발발을 바그다드에서 위성방송으로 보도한 CNN의 위력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미국의 다른 대방송사들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버나드 쇼, 피터 아네트, 존 홀리만 등 바그다드 현지 취재팀의 3총사는 방송보도의 세계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이들 가운데CNN의 간판 앵커맨 버나드쇼의 감회는 더욱 깊을 것 같다. 10여년 전 ABC텔레비젼의 외회출입 기자로 뛰던 그가 CNN행을 결심하고 사표를 내자 룬 알레지 ABC 텔레비전의 의회출입 기자로 뛰던 그가 CNN행을 결심하고 사표를 내자 룬 알레지 ABC뉴스 사장은 “아직 전파도 쏘지 않는 네트워크로 가는 것은 중대한 실수이며 자네 경력에 전혀 도움이 안될 것이네‘라며 만류했었다. 쇼의 발을 묶어두려는 역심에서 알레지 사장은 상당한 금액의 돈을 제시했지만 그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

 24시간 뉴스만 방송하는 새로운 네트워크에의 참여야말로 새로운 땅을 갈아 자기의 이름을 심을 절호의 기회라고 본 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에드워드 머로가 방송사상 최초의 신 개척지를 가리켰다면 CNN은 최후의 개척지를 가리킬 것이다.” 머로는 2차대전 당시 독일의 런던 공습현장을 생생한 폭음을 배경으로 미국에 중계방송한 CBS의 민완기자. 그로부터 50년 후 쇼 자신이 바그다드의 호텔에서 전쟁현장을 전세계에 생생하게 보도하게 된 것은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 속담을 생각하게 한다.

 1980년 6월 첫 전파를 내보낸 CNN은 이번 걸프전쟁 보도로 세계 제일의 뉴스보도 기관으로서의 지위를 한층 다졌다. CNN이 전통적인 언론의 중심지 동북부에서 벗어나 남부 애틀랜타 교외에 자리잡을 때만 해도 CNN의 성공을 내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뉴욕에서 스카우트된 개국요원이 택시를 타고 도착한 CNN본부는 하얀 2층짜리 오두막. 방송국이라 믿기엔 너무나 초라해 택시운전사에게 몇 번이나 주소를 확인해야 했다는 이야기를 전설처럼 간직한 이회사가 10년만에 미국내 가입자 5천4백만, 해외 가입자 7백만명을 대상으로 세계95개국에 방영될 정도로 성장한 것은 위성통신기술을 바탕으로 한 생생한 현장보도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자체 위성장치로 95개국에 현장보도
 현지취재진이 특히 공습상황하의 전장에서 계속 생방송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 어디에서나 지구 궤도상의 위성을 향해 전파를 쏠 수 있는 자체 이동위성방송장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바그다드의 호텔에 송신기를 설치하고 ,직경3mdml 안테나를 옥상에 놓고 쏜 전파를 CNN본사에서 받아 전세계로 내보냈다. 이에 따라 다국적군의 공격개시와 함께 전화선이 단절된 상태에서도 방송을 계속 할 수 있었다.

 반면 일반 전화선에 의존한 경쟁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지난86년 미국의 리비아 공습을 생방송으로 특종보도한 CBS의 알렌피지 기자는 CNN 보도진과 같은 호텔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화선이 끊겨 낙종하고 말았다. NBC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으나 본사 데스크의 앵커맨 톰 브로코가 CNN의 쇼를 인터뷰하는 고육지잭을 썼다.

 이번 바그다드에서의 쾌거는 현지취재진 뿐만아니라 일체의 휴가가 금지된 가운데 주말근무와 철야근무를 하고 있는 1천7백여 CNN직원들의 자부심을 높여주었다. 특히 ‘미디어산업의 황제’라는 칭호를 듣고 있는 창업주 테드터너 회장의 긍지는 대단하다. 25세의 터너 회장은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아 키운 옥외광고사업을 발판으로 자본을 축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7년 아메리칸컵 요트대회에 출전, 우승의 영광을 안았던 그는 작년9월《시사저널》崔元榮발행이니과의 대담에서 자기를 ‘모험적인 사람’이라고 자평했다 (《시사저널》90년 10월18일자 보도).

 절친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터너 회장은 기회를 포착하면 망설이는 법이 없이 즉각 행동에 옮긴다고 한다. 지난해 연말 오랜 염문 끝에 약혼한 영화배우 제안 폰다와의 만남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폰다가 남편과의 별거를 결정했다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나서 곧장 전화를 걸어 데이트 신청하더라고 이친구는 전했다.

 마음에 들면 곧장 달려드는 파격적인 적극성이 바로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24시간 뉴스방송을 시작하게 한 원동력이다. 《홈 비디오》잡지에 실린 터너의 인터뷰에 따르면 《제3의 물결》을 쓴 사회학자 앨빈토플러가 그를 만났을 때 “당신이 바로 제3의 물결이오”라며 반가워했다고 한다. 《제3의 물결》은 농업화와 공업화시대를 거쳐온 사회가 80년대에 정보화시대로 옮겨갈 것을 예견한 베스트셀러. 그린랜드 일부 지역과 북극지역을 제외하곤 세계 어느 곳에서든 안방에 앉아 생생한 현장뉴스를 시청할 수 있게 한 CNN이야말로 정보화시대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CNN의 보도원칙은 분쟁이 발생하면 양쪽에 다 취재진을 투입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파나마침공과 천안문사태 등 주요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특종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세계 어디서나 시청할 수 있기 때문에 외국지도자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 12시간 동안 방송을 중단시켰다가 재개를 허용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리비아의  가다피, 쿠바의 카스트로 등도 시청료를 내지 않고 CNN시청을 즐기는 단골로 알려져 있다.

 CNN은 미국지도자들에게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87년 10월 레이건 대통령은 3대 네트워크의 양커맨과 함께 버나드 쇼를 집무실에 초대, 간담회를 가졌다. 이 사건은 CNN 역사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 휴가중에도 CNN시청을 즐기는 부시 대통령은 88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2차 후보자 토론회에서 사회를 맡은 쇼로부터 만약 급사하면 돈 퀘일 대통령하에서의 나라가 격정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시카고 출신으로 일리노이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쇼는 64년 미국 최초의 뉴스전문 라디오방송국에서 방송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후 CBS뉴스 워싱턴지국을 거쳐 ABC뉴스에서 라틴아메리카 지국장을 지내다 의회반장이 되었다. 현재 그는 CNN 워싱턴지국의 메인 앵커이다.

서울텔레콤과 한국내 유선방송권 계약
 퓰리처상을 받은 바 있는 피터 아네트는 CNN예루살렘지국장이다.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대학을 마친 후 뉴질랜드 호주 태국에서 신문기자로 일하다 62년 AP통신에 들어거 75년 월남패망 때까지 사이공특파원을 지냈다. 86년부터 88년까지는 CNN모스크바특파원으로 소련의 격동을 취재했다.

 존 홀리만은 워싱턴에서 항공우주국 등 연방정부 산하기관을 출입하고 있다. 중동계로 알려진 그는 조지아대학에서 언론학을 전공했다. 고교시절부터 여러 방속국을 거쳐 CNN에 개국요원으로 입사하기까지 그는 AP통신 라디오 네트워크에서 농업부장을 지냈다. 해외취재는 버나드 쇼와 동행한 89년 6월 천안문사태가 처음이엇다.

 87년 이후 가속화된 국제화는 88년 세계의 절반을 덮고 있는 소련위성과 연결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20세기 언론학의 태두마셜 맥루흔도 만년에 국제화에 여념이 없는 테드 터너를 보고 “당신은 지구춘을 창조하고 있어요. 이런 일이 진짜로 이루어지다니···”하며 감격했다고 한다. 지구촌을 전파로 묶는다는 CNN의 국제화 바람은 한국에도 불어왔다. 지난해 CNN은 《시사저널》계열회사인 ‘서울텔레콤’과 한국내 유선방송권 계약을 체결했다. 터너회장은 최근 崔元榮 발행인에게 보낸 서한에서 “한국 시청자들에게 뉴스를 제공하게 돼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CNN의 눈부신 성장에 비해 직원의 급료 수준은 3대 네트워크의 절반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걸프전쟁 보도 덕분에 한국 시골 어린이들에게까지 알려졌으니 급료국제화도 머지 않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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