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연구에 ‘30대 新세대’ 등장
  • 한종호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2.04.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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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原典에 충실한 사실 연구” 주장…‘일방 매도·맹목 찬양’ 극복 시대

 

 

  통일원 특수자료과장 洪起樹씨는 얼마전 한 보험회사 직원 때문에 진땀을 뺀 적이 있다. 북한에 있는 보험회사의 사장이 누군지 알려달라는 요청을 받고 아무리 자료를 뒤져봐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얼마후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국제보험사회의에 참가한 북한대표를 통해 겨우 정보를 얻기는 했지만 홍씨는 이 일로 북한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이미 호기심의 수준을 넘어서 있음을 실감했다고 한다.

  비단 홍씨의 경험이 아니라도 한동안 전국을 뒤흔든 북한열기가 뚜렷한 사회적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징표는 많다. 최근 몇년 사이 전국 40개 대학에는 51개의 북한관련 강좌가 개설됐다. 부산대에서 ‘북한정치론’을 강의하는 한 교수는 매학기 3백명이 넘는 수강생이 몰려 즐거운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북한을 직업적으로 연구하는 학계에서도 이같은 사회적 경향을 반영한 듯 새바람이 불고 있다. 이들은 기존 북한연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신세대로 주목받을 만하다.

 

30대후반 이전 세대는 ‘반공’시각으로 한계

  학계에서는 나이와 연구성향에 따라 북한 연구가를 3세대로 구분하곤 한다. 1세대는 주로 60대 이상의 원로들로서 과거 북한정권 수립 과정에 직접 참여했거나 월남한 인사, 좌익활동 경험자, 공산권 유학생 출신자가 많다. 이들은 이론보다 경험을 앞세우는 일이 많고 철저한 반공주의에 젖은 눈으로 북한을 바라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들의 증언이나 논평은 ‘직접 경험자’라는 특성 때문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유년기에 한국전쟁을 체험한 2세대는 다시 해외유학파와 국내파로 나뉜다. 전자는 60년대 초 풀브라이트 장학금 등 여러 경로로 미국에 가서 공산권을 연구할 때 곁가지로 북한을 연구한 사람들이다. 이 가운데 서대숙 길영환 이정식 씨처럼 북한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사람들은 돌아와 봐야 연구를 계속할 수 없어 아예 그곳에 눌러앉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국내에 돌아와 대학 강단에 섰다. 이들은 서슬이 퍼렇던 70년대 중반에 ‘비교정치론’이란 과목을 통해 슬금슬금 북한문제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북한을 학문의 대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이때가 처음일 것이다.

  70년대 초 남북대화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이론무장과 정책대안이 필요했던 당시의 중앙정보부나 국토통일원은 이들에게 비밀용역을 주었고 그 연구성과를 독차지했다. 그래서 ‘권력과의 유착’이라는 눈총을 받기는 했지만 2세대 유학파들은 정부가 정책적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제공한 ‘돈과 자료’를 토대로 학문적 성과와 권위를 동시에 쌓을 수 있었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확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이들은 1세대와는 달리 북한을 연구하는 데 외국에서 배워온 다양한 이론을 적용했고 나름대로 객관성을 추구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대결적 시각’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기본적 한계 역시 2세대의 몫으로 남아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2세대 국내파이다. 이들은 74년~76년 중앙정보부에서 만든 이른바 ‘자유아카데미’ 출신으로 나이로 따지면 해외 유학파보다 5~10년 정도 후배에 해당된다. 7·4공동성명 이후 康仁德씨(당시 북한정보국장)가 “북한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교정하고 대국민홍보 활성화를 위해” 남산에 있는 내외통신사 자리에 만든 자유아카데미는 석사출신 가운데 1기(75년) 2기(76년) 각 30명씩을 선발해 2년과정으로 42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은 80년대 초 각 대학 국민윤리학과 교수요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코스는 김재규씨가 정보부장으로 오면서 ‘파벌을 만들려 한다’는 이유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는데 강씨는 지금도 자유아카데미의 중도하차를 아쉬워하고 있다. 어쨌든 풍부한 원전자료와 아낌없는 경제적 지원(당시 3급을 공무원 대우) 아래 북한을 집중연구할 수 있었던 아카데미 출신자들은 비록 북한연구에 저변확대를 이루는 계기가 되지는 못했지만 소리없이 튼튼한 학맥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5공화국은 북한연구의 공백기였다. 정부의 육성책도 학계의 특별한 연구동기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북한연구자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새로운 세대의 출현은 80년대 말이 되어서야 감지되었다.

 

정치 · 사상에서 문화·예술까지 폭 넓혀

  대학을 중심으로 불붙기 시작한 통일운동 열기, 그리고 정부의 의욕적인 북방정책은 민·관 모든 영역에서 북한연구 수요를 천문학적 수준으로 팽창시켰다. 그러나 공급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89년 이홍구 통일원장관은 ‘신진학자 개발을 위해’ 1천5백만원의 예산으로 북한연구프로젝트 희망자 15명을 공모했다. 응모자가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무색하게 각 대학에서 1백여명이 몰려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 프로젝트는 올해까지 이어져 ‘제도권’ 내에서의 북한연구 활성화에 상당히 기여하고 있다. 특히 이들의 연구는 정치·사상 위주에서 문화·예술 등으로까지 영역을 넓혀가고 있어 관심을 끄는데 다만 연구시각은 2세대의 그것을 답습하고 있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이와 같은 시기에 전혀 새로운 움직임이 생기기 시작했다. 크게 보면 진보의 깃발을 내건 흐름인데 대학원 석사·박사 과정에 있는 소장학자들이 기존 북한연구의 한계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면서 ‘북한원전에 충실한 내재적 비판’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북한 매도’ 일변도의 기존 연구를 벗어나면서 동시에 맹목적인 ‘북한 찬양’이라는 또 하나의 편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북한연구가 이데올로기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사실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이들은 자료수집의 어려움, 작업의 효율성 등을 고려하여 공동연구·저술 방식을 택하고 있다. 한국사회과학연구소와 산업사회연구소, 한국정치연구소의 북한분과 혹은 통일분과가 이들이 활동하는 중심무대이다.

  현재 북한연구에 관한 한 보수·진보 진영 어느쪽도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말하기 힘든 상황이다. 젊은 3세대 학자들이 각각 북한연구의 폭과 깊이를 확대시키는 데 진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강대 김영수 교수(정치학)는 “양쪽 진영 사이에 물꼬가 트여 서로 넘나듦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에 북한연구의 장래는 무척 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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