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여, 백제의 넋이여”
  • 충남 부여·이문재 기자 ()
  • 승인 1992.04.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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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년 이어내린 ‘은산별신제’…산신제 · 위령제 · 대동굿 아우른 큰 굿판

 

 

  지난 3월31일 밤 8시, 농악을 거느리고 마을의 동서남북에 네 대장군을 세우는 장승제를 끝으로 엿새 동안 계속된 은산별신제는 막을 내렸다. 東方靑帝逐鬼大將軍 등 사방에 버티고 선 네 장승들은 충남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를 지키는 ‘튼튼한 성곽’이 된 것이다.

  196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된 은산별신제는, 그 유래가 삼한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산신제와, 백제 패망 직후 왕국 재건을 꿈꾸다가 전멸한 ‘광복군’을 기리는 위령제, 그리고 공동체의 결속력과 안녕을 비는 대동굿 등의 성격이 복합돼 있어 일찍부터 민속학계의 조명을 받아왔다.

  은산별신제는 오래 전부터 격년제로 열려왔다. 최소한 엿새가 걸리는 이 큰 굿을 매년 치러내기에는 경비 조달이 버거웠던 것이다. 별신제가 열리지 않는 해에는 小山祭라는 마을굿으로 대신한다. 이 별신굿은 은산리 일대가 이 지역의 중심지로 한창일 때는 열사흘동안 벌어지기도 했다. 이 마을 태생이며 현제 은산리 농공단지에 다니는 안윤수씨(44)는 “20여년 전만 해도 은산별신제는 이 일대의 큰 잔치였다”고 기억한다. 안씨는 “그때는 당산 전체가 사람으로 가득했다”면서 “80년대 들어 참여 인원이나 주위의 관심이 눈에 띄게 줄었다”라고 말했다.

 

별신굿 성격 다 갖춘 은산별신제

  올해 별신제는 3월26일 아침, 은산리를 오른쪽에서 휘감아 돌아 부여 앞에서 백마강과 합류하는 은산천에 금줄을 치는 ‘물 봉(封)하기’로 시작되었다. 제사를 통해 정화된 이물을 떠다가 3일 만에 제주인 조라술을 빚는다. 물을 봉하고 본 제사가 있기까지 3일간 제관들은 비린 거나 누린 음식을 금하며 문앞에 금줄을 친다. 조라술이 익어가는 3일 동안, 농악대는 제관들 집을 일일이 돌면서 ‘집굿’을 벌인다. 별신제의 앞풀이는 진대(陣木)베기와 꽃받기 대목에서 절정을 이룬다. 참나무 네 그루를 베어오는 진대베기는 은산별신제가 백제 광복군의 위령제임을 잘 드러낸다. 다른 지역의 별신굿과는 달리 군사적 요소들이 깃들여 있는 것이다.

  진대베기는 대장이 주관한다. 27일 아침부터 오후까지 거행된 진대베기는 대장 사명 집사 등 말을 탄 6명의 ‘군인’과 무녀와 三絃六角이 동원되는데, 대장을 비롯한 지휘관들은, 별신당에 모셔진 복신장군과 토진대사의 현현이다. 평범하던 산신제가 위령제로 전환된 배경에는 백제 패망이란 비극이 깔려있다. 전해내려오는 이 설화에는 패망한 백제장수와, 왕국 부활을 위해 목숨을 바친 3천여 병사들의 한과 원이 배어 있다.

  설화는 이러하다. 옛날 어느 해에 은산지역에 괴질이 돌아 인명 피해가 극심하였다. 어느날 마을의 한 노인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백마를 탄 장군이 나타나 “우리 광복군의 유해가 수습되지 못한 채 사방에 흩어져 있으니, 이를 거두어 위령제를 지내주면 은혜를 갚겠다”고 말했다. 그 노인이 마을 사람과 여러 곳을 살펴보니 과연 백골들이 산재해 있었다. 은산리 사람들이 백골을 안장하고 당시 광복군의 주장이었던 복신장군과 토진대사의 영정을 산신당에 모시고 위령제를 거행하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진대베기는 선두를 이루는 나팔수와 25명의 기수, 그리고 장군과 병졸 등 30인이 대열을 이루고 그 뒤를 무녀와 농악대 등이 뒤따른다. 이때 무녀와 농악은 1백50여명에 달하는 일행의 고단함을 그때그때 풀어준다. 진대베기 행렬은 넓은 들판에서 두세차례 진치기 ‘훈렬’을 갖는다. 이때 베어온 참나무는 별신제 마지막 날 장승과 함께 세운다.

  이튿날 이어진 꽃받기는 별신제가 위령제에서 산신제 혹은 대동제로 넘어서는 분기점을 이룬다. 꽃받기는 인간이 정성들여 만든 꽃에 신을 개입시켜 그 꽃으로 하여금 잡귀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의식으로, 별신제 끝무렵에 참여한 마을사람들에게 나눠진다. 별신제를 공유하고 지속케 하는 것이다. 오색으로 염색한 이 꽃은 가까운 사찰이나 사당 같은 데 옮겼다가 제사를 지내고 받아와 일단 화주 집에 보관한다. 올해 꽃받기는 부여 삼충사에서 행해졌다. 이 꽃은 다음날 상당 행사 때 제물과 함께 본제가 벌어지는 별신당으로 운반된다.

  29일 오후에 진행된 상당행사는 별신다에 제물과 꽃을 옮기는 일로써 엄숙과 정결을 위해 참가자들은 입에 흰종이를 문다. 밤 9시경에 본제를 올리는데 산신과 장군을 위한 두 종의 축문이 바쳐진다. 이어 마을 사람들의 무병장수를 비는 축문이 낭독되고 제관들은 별신제에 성금을 낸 사람의 축복을 기원하는 개별 소지를 올려준다. 이 축문들이 보여주듯 은산별신제는 산신제와 위령제 그리고 대동제가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별신제는 네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는 글자 그대로 통상적인 굿이 아니라 격년제 혹은 몇년에 한번씩 벌이는 굿이다. 둘째는 마마귀신 등 질병을 쫓는 굿이며, 셋째 시장부흥책의 일환으로 펼쳐지던 굿이었고 넷째는, 드물지만 기우제로도 올려졌다. 젊은 민속학자 주강현씨(경희대 민속학연구소 연구원)는 “은산별신제는 마을 축제라는 대동굿의 기본 성격을 유지하면서도 별신제의 보편적 특성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존보다는 전시에 치우친 느낌

  “백제 유민의 넋을 일찍부터 이 별신제에서 신으로 정착이 된 것으로 보이지만, 시장부흥 기능까지 갖춘 별신제로의 이행은 조선 중·후기 이후로 추측된다”고 그는 풀이한다. 주씨에 따르면 꽃받기 행사에서처럼 이 별신제는 시장에 활력을 주어 왔다. 한때 꽃을 팔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20년 전만 해도 별신제 기간중에는 난장이 벌어졌다고 기억한다. 서커스나 약장수판, 노래자랑이 며칠씩 펼쳐지고 전국에서 명인명창, 장돌뱅이들이 몰려들었다. 은산은 조선시대 때 역촌이었다. 역촌은 교통의 요지임을 말해준다. 당연히 큰 장이 섰으며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통상 별신굿은 동해안과 남해안에서 지내는 풍어제를 말한다. 또한 경북 안동의 하회별신굿탈놀이도 있지만, 은산별신제처럼 별신제의 여러 기능을 아우르고 있지는 못하다.

  30일 오전에 상당굿(강신굿)이 펼쳐졌다. 별신당 앞에 대살받이에 요령을 매단 대나무를 세워놓고 강신을 기원하는 이 굿에서 제사에 드린 정성의 정도가 가늠된다. 대장과 화주가 대나무를 붙잡고 있는 동안 무녀가 농악과 삼현육각의 반주에 맞춰 춤과 노래(주문)을 하는데, 이때 방울 소리가 강신을 표시한다. 치성이 부족하면 방울이 흔들리지 않으므로 방울이 흔들릴 때까지 제관들은 별신당 앞 은산천에서 목욕 재계한다.

  신과 조상들을 기렸으니, 이제 남은 것은 인간세계이다. 마을사람을 위한 굿이 이날 오후에 벌어진 하당굿이다. “잔치로 말하더라도 상청만 잘 먹이고 하청을 못 먹이면 뒷말이 많습니다” 혹은 “나라가 편하면 산하도 편한 법이요, 그 골 백성도 편한 법이요”라고 무녀는 노래한다. 이 하당굿 마당은 무녀가 대장제관 등 별신제에 참여했던 이들을 위로해주는 것이지만 굿판은 이내 구경꾼들과의 경계를 허물어 버렸다. 술과 고기를 서로 나누며 한판 놀이마당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은산별신제의 또다른 특징은 장승제가 대미를 이룬다는 것이다. 통상 장승제는 장승제 하나로써 굿을 이루지만 은산별신제에서는 여러 굿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신과 조상과 인간이 세 기둥을 이루는 은산별신제는 신의 뜻에 감사하는 독산제와 네 대장군으로 ‘울타리’를 치는 장승제와 함께 끝났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별신제는 썰렁해 보였다. “사람 동원이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은산별신제보존회 박창규 회장은 말했다. 청년들이 농촌을 떠나고, 2백80여호밖에 안되는 마을에 세군데나 있는 교회의 신자들은 별신제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박회장은 “이 별신제는 백제를 되찾고자 했던 조상들을 기리는 제사로써 개인 숭배와는 관계가 없다. 우리겨레가 단군을 섬기듯이, 종교 차원을 떠나 참여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별신제는 유상렬옹 등 기능보유자 세 사람과 이수자 18명, 그리고 전수자 5명으로 이루어진 보존회와 관의 지원으로 겨우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또 있다. “카메라를 위한 별신제로구먼”이라는 한 사진작가의 푸념처럼, 보존회측은 ‘보존’보다는 ‘전시, 홍보’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독산제와 장승제는 같은 시간에 열려야 하는데, 텔레비전 카메라를 위해 장승제를 뒤로 미뤘다. 장승제에는 농악 다섯명과 제관 둘, 그리고 주민 두사람만이 참여했다. 장승제 때는 은산리 사람보다 취재진의 수가 세배 정도는 많았다. 마을 어귀에 세워진 네 대장군들은 크지 않았다. 그 장승들의 작은 몸집이 지금·여기 우리 전통문화의 ‘이정표’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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