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홀로서기 ‘뉴 시네마’ 물결
  • 송준 기자 ()
  • 승인 1993.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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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독립 영화등 통해 새 철학과 운동 담아

마침내 한국 영화계에 ‘뉴 시네마’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영화 속에 세계관의 골격을 세운 일단의 젊은 영화인들이 나름의 진지한 영화철학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물결은 한국 영화사 90년 만에 처음 나타나는 것이어서 너무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만큼 한국 영화의 타성은 두텁고 공고했었다. 세계 영화사에 굵은 획을 그은 네오 리얼리즘(이탈리아)⋅누벨 바그(프랑스)⋅프리 시네마(영국)와 같은 일련의 경향들은 한 나라 영화 예술의 차원을 수직 상승시켰다.

 일찍이 이장호의 <바보 선언>⋅배창호의 <고래사냥>⋅이명세의 <개그맨>으로 이어지는 영상 표현의 변화 조짐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사조로 자리잡기엔 정도가 미미했고 파급력도 약했다. 반면 최근 들어 뚜렷한 흐름을 형성한 뉴 시네마는 한국 영화의 내일을 현격히 변모시킬 잠재력을 보여준다.

 뉴 시네마는 박광수 배용균 홍기선 박종원 홍규덕 같은 감독과 이재용 김성수 장기철 양윤호 등 단편작가들, 그리고 ‘장산곶매’ ‘푸른영상’ ‘현실’ 같은 영화운동 단체들을 아울러 지칭한다. 이 때의 뉴 시네마는 새로운 영상미학이나 형식이 탄생했다는 말이 아니다.

 이들은 일단 충무로에 대해 ‘외인부대’이며, 독학으로 영화를 익혔고, 작품을 통해 자기의 영화 철학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한 울타리 안에 수용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뉴 시네마가 큰 잠재적 영향력을 갖는 것은 이들의 방법론을 존중하는 고급 인재들이 끊임없이 뉴 시네마에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뉴 시네마를 좀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 영화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나치가 패망한 뒤 독일 영화는 점령국인 미국⋅소련⋅영국⋅프랑스 4국의 강력한 통제를 받아야 했다.  게다가 57년께 텔레비전이 대중화되면서 독일 영화 산업은 붕괴했다. 이 절망적인 시기에 터져 나온 것이 ‘오버하우젠 선언’이다. 여기서 빔 벤더스, 베르네 헤어초그, 라이너 베르네 파스빈더 등 젊은 단편 영화 감독⋅제작자 26명은 “낡은 영화는 죽었다. 우리는 새로운 독일 영화를 창조할 것이다”라고 외쳤다. 이들이 내세운 무기는 단편 영화(15∼20분)였다. 이들이 작품은 국제 영화제에 입상하여 세계 평론가들이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곧 이어 장편 영화에서도 크게 이름을 떨치면서 차츰 세계적 작가로 떠올랐다. 6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친 이들의 활동을 가리켜 뉴 저먼 시네마라고 말한다. 한국이 뉴 시네마는 소형 영호 운동에서 출발한다. 극장용 상업 영화(35mm, 70mm⋅1백∼1백20분)에 견주어 소형 영화(8mm, 16mm)는 제작비가 적제 들어 실험용으로 적합하다. 소형 영화는 뉴 시네마가 충무로를 벗어날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이었다. 이들이 처음 영화에 매달린 것은 80년대 초⋅중반이다. 그때까지 영화는 충무로의 전유물이었다. 제작⋅상영 등 모든 비법이 충무로 안에서만 독점적⋅배타적 도제 형식으로 전수되었다. 뉴 시네마들은 도제 형식을 거부했다.

 주로 각 대학 영화패와 연극영화과 속의 작은 모임, 그리고 영화진흥공사가 주관하는 ‘영화 아카데미’가 이들을 영화와 만날 공간이었다. “참담한 수습의 나날이었다. 영화의 어둠을 각개전투로 돌파해야 했다. 87년부터 <인재를 위하여> <그날이 오면> <울타리를 넘어서> 등 영화다운 작품이 선보이기 시작했다. 불을 훔쳐낸 프로메테우스의 심정이었다.” 단편 영화 감독 장기철씨의 회상이다.

 이렇게 축적된 역량은 장편(소형) 영화로 발전하기도 했다. 장산곶매의 <파업 전야> <닫힌 교문을 열며> 등이 그것이다. 소형 영화라는 명칭도 작은 영화(84년)⋅열린 영화(85)⋅독립 영화(87)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영화적 표현이 실험되는데, 대체로 영화 아카데미 출신들이 미학적 상상력을 발전시켜 나간 반면, 대학 영화패들은 운동 영화를 지향했다.

단편영화 극장 상영 점차 활기
 그렇게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뉴 시네마들은 작품의 질에서, 방향에서, 그리고 제작비 마련⋅기획 방식에서 나름의 성과를 축적했다. 이 기간에 박광수⋅홍기선⋅박종원은 제도권 영화계에서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상자 기사 참조). 영화운동 단체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장편 전문 제작단 장산곶매는 대학 학생회⋅동아리 연합회 및 전교조를 통해 영화 배급 체계를 확대했으며 지금은 <땅의 사람들> 촬영을 앞두고 있다.

 다큐멘터리 제작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이다. 몇몇 방송 프로와 <대한뉴스> 말고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찾아볼 수 없는 게 우리 현실이다. 다큐멘터리를 전문으로 제작해온 ‘서울영상집단’ ‘노동자뉴스단’은 노조 조직과 철거민⋅노점상 조직 들을 이용해 다큐멘터리 필림을 상영해 왔다. 이밖에 장기철이 화교 문제를 다룬 <홈리스>를, 박남현이 동물⋅환경 다큐멘터리를, 김시우가 <한국인 BC급 戰犯>(징용 끌러갔다가 전범 처리된 한국인 이야기)을 만드는 중이다. 푸른 영상은 국제 매매춘 문제를 찍은<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변영주 연출)을 6월11일 서울 기독교연합회관에서 상영한다.

 샌프란시스코 영화제(미국) 최우수작품상과 클레르몽페랑 영화제(프랑스) 젊은 비평가상⋅예술부문상을 받은 <호모비디오쿠스>(이재용⋅변 혁)나 일본 고베 영화제 본선에 진출한 <비명 도시>(김성수) 같은 단편영화들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단편⋅소형⋅운동⋅독립 영화들은 ‘내일의 뉴 시네마’라는 의미 말고도, 매우 독특한 하나의 영화 장르 구실을 한다.

“한국 영화의 희망이자 대안”
 문제는 이제까지 단편 영화와 관객이 만날 기회가 드물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단편⋅소형 영화의 제작⋅상영⋅배급⋅유통을 중시하는 전문가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독립영화협의회는 월 1회씩 독립영화 발표회를 갖고 있으며 단편 영화 제작 워크숍도 개최한다. 영화연구소 ‘르네상스’도 분기별로 단편 영화 제작 워크숍을 갖는다. 독립영화창작후원회(대표⋅전양준 문성근)는 매년 1천여만원을 마련해 단편 영화 시나리오 두편을 선정해 제작비를 사전 지원한다. <비명 도시>가 그 첫 번째 성과이다.

 한편 ‘씨양씨에’(대표⋅손채연)에서는 6월10일과 24일<호모비디오크스>와 <비명 도시> 등 4편의 단편을 상여할 예정이다. 또 6월 말쯤 <호모비디오크스> <비명 도시>와 함께 지난해 국내 3대 단편 영화제인 신영⋅금관⋅동백 영화제를 석권한 <가변차선>(양윤호 연출)과 두편의 실험 영화 <Wet Dream) <Here I Am>을 묶어 서울 코아아트홀에서 ‘단편 영화제’라는 이벤트로 일반관객에게 상영할 예정이다.

‘신영상’(대표⋅최보근)은 단편 영화 기획⋅흥행을 전문으로 하는 단체이다 최씨는 우수 시나리오를 선정해 감독과 스태프를 결정하고 제작을 진행한 다음, 여와를 상영할 극장가지 교섭하는 등 영화 유통의 전부문을 활성화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영화 평론가 이효인씨는 “충무로는 <서편제>를 내놓기도 하지만 <뽕> 시리즈를 만들기도 했다. 영화의 미래를 안심하고 맡길 수 없다는 얘기다. 뉴 시네마는 그 공백을 메워 줄 유력한 희망이자 대안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뉴 시네마의 미래가 완전히 보장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기왕의 영화와 확연히 다른 점은, 스스로 돕는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같은 열정은 스스로의, 그리고 전체 한국 영화의 미래를 보장하는 유력한 안전판이 될 듯하다.
宋 俊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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