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N 보도에 춤추는 증권시장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1.0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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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전쟁 생중계로 ‘폭등·폭락’…투기세력, 초단기매매로 혼란 부추겨

 제일증권 嚴吉靑 영업추진부장은 1월17일 오전 7시 고르바초프의 리투아니아 무력진압 보도를 접하고 걸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걸프사태에 대해 미국과 긴밀히 협의하고 있을 고르비가 왜 이 시점을 택해 세계로부터 비난을 받을 조처를 취했을까. 걸프에서의 개전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증권분석가 특유의 머리회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점을 돌아보던 오전 8시46분 전쟁 발발을 알리는 외신 보도가 엄부장에게 전달됐다. 급히 본점으로 돌아온 엄부장은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했다. 이어 평소 한수 위에 있다고 생각한 선배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상황 외에 주목할 것이 뭐냐”를 물었다. 결론은 독단적으로 내리지만 산업금융정보시장에서 자신의 정보에 빠진 것과 추가할 것 등이 없는지를 점검해봐야 하는 것이다.

  대우증권 트레이딩룸(투자정보를 수집·분석하는 부서)은 벌집을 쑤신 듯했다. CNN텔레비전의 계속되는 보도와 로이터 AP등으로부터 텔렉스를 통해 들어오는 외신을 10명의 트레이딩룸 직원들이 급히 분담했다. 이들이 전쟁상황을 수집·분석해내는 데는 몸이 두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南炅辰 투자분석부장은 “17일 오전의 트레이딩 룸은 마치 전쟁작전 상황실을 방불케 했다”고 전했다.


  각 증권사의 지점에는 단말기를 타고 10분 간격으로 숨가쁘게 전황이 쏟아져나왔다. CNN이 생중계 하는 전쟁화면은 마치 이웃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생생했다. 객장으로 몰려나온 투자자 사이에는 “전쟁이 났으니 주가는 폭락할 것이다”라는 비관적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일순 객장은 얼어붙었다.

  그러나 오전장이 끝날 시점인 11시부터 금융업종을 중심으로 상한가로 ‘사자’는 세력이 대거 몰려들었다. 만만치 않던 ‘팔자’세력이 ‘사자’에 합류해 주가상승에 불을 붙였다. 장이 뜨는 조짐이 나타나자 일반투자자 못지 않게 증권사의 주식운용 관계자는 애석함을 금치 못했다. “때를 놓쳤다”였다. 17일 동시호가 시간에 만이라도 주문을 내 물량을 확보해놓았더라면 거액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후 1시3분 CNN이 미 국방성 관리의 말을 인용, 다국적군의 공격으로 이라크 공군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장은 폭등세로 돌변했다. 종합주가지수가 하루 전보다 무려 28포인트나 올라 단숨에 6백41로 뛰어올랐다. 한국증시 사상 5번째의 높은 상승률이었다. 걸프전쟁이 새해 들어 증시 최고의 날을 안겨준 셈이다.

“전쟁이 났는데 왜 주가가 오르는가”
 이런 폭등장세는 해외증시에서 먼저 나타났다. 17일 오후 1시18분 우리와 같은 시간대인 도쿄증시는 이미 하루 전에 비해 7백86엔이 올라 단숨에 2만3천엔대를 회복했다. 증시전문가들은 뉴욕증시가 힘차게 오르고 있고 정보력에서 한수 위인 도쿄증시가 뛰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 주가도 곧 폭등하리라고 쉽게 예상했다. 뉴욕증시는 ‘선생님’ 도쿄증시는 ‘우리 반의 최고 우등생’이라는 인식을 확인해준 셈이다. 발빠른 투자자들은 이미 장이 뜰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다음날도 ‘CNN주가’는 여전했다. 서울 뉴욕 도쿄의 증시가 걸프전쟁을 생중계 하는 CNN뉴스에 한 다발로 묶여 움직였다. 걸프전쟁 발발 후 투자사령탑은 CNN이 되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CNN특파원이 뭐라고 보도하느냐에 따라 주가가 오르락내리락했다. 한마디로 전황에 목이 매인 주가였다.

  18일 오전 8시30분(한국시간) 바그다드발 CNN뉴스는 “다국적군의 초기 공격이 있은 지 24시간이 지난 현재 바그다드 상공에는 다국적군의 공습이 재개됐다”고 알려주었다. 이 뉴스는 하루 전 주가 6백41포인트를 단숨에 6백67(오전 10시 현재)까지 밀어 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후 이라크의 이스라엘 침공,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반격자제 요청 등 ‘악재’와 ‘호재’가 시차를 두고 쏟아지면서 하루종일 치열한 매도, 매수 공방전이 펼쳐졌다. 종가는 전장의 시작인 6백67로 끝났다. 전쟁이 터진지 이틀만에 종합주가지수는 단숨에 54포인트나 치솟은 것이다.

  과거의 예를 보아 전쟁이 나면 단기간의 폭락장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예측은 완전히 뒤집혔다. 증권사에는 “전쟁이 났는데 왜 주가가 오르느냐”는 문의가 빗발쳤다.

  증시관계자들의 설명은 이렇다. 한국투자신탁 주식운용부 許昌浩 수석운용역은 “걸프전쟁은 예견된 전쟁이었다”는 점을 먼저 꼽는다. 철군시한인 16일 2시 이후로는 반신반의 상태였지만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상은 가능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10·10 반대매매 조치’이후의 양상도 그랬지만 예상된 위험은 이미 위험이 아니라는 증시의 격언이 입증된 셈이다. 대신증권연구소 趙龍伯 조사분석부장은 “미국 등 다국적군의 일방적 승리로 단기간에 판가름날 것이라는 확신이 폭등으로 이끌었다”고 지적한다. 또 단기전으로 끝난다면 6개월 가까이 증시를 시름시름 앓게 해온 걸프사태라는 ‘최대 악재’가 일순간에 사라진다는 희망의 표출로 해석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걸프전쟁이 장기전이 될 것이라는 우려감의 확산으로 주가가 하락세로 반전된 것은 19일이었다. 이스라엘의 이라크에 대한 보복방침 등이 전해지면서 장은 차가워졌다. 이어 유엔주재 이라크 대사가 부시 대통령에게 협상을 제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하락 폭이 좁혀지진 했지만, 이날 장세는 결국 4포인트 떨어진 6백63에 그쳤다.

  전황에 따라 투자자들이 일희일비하는, 춤을 추는 주가였다. 매수·매도주문을 취소하고 정정하는 일이 극심했다는 사실을 봐도 그렇다. 전쟁 발발 이후 19일까지 3일간 투자자들이 매수 또는 매도 주문을 취소 혹은 정정한 사례는 평소의 두배가 넘어 하루 평균 4만7천9백93건에 이른다. 특히 18일에는 취소 및 정정건수가 무려 7만8천4백63건에 달했다. 주문 폭주로 인한 체결 지연도 자주 있었다. 보통 오후 4시에는 증권거래소에서 그 날의 종가가 나오게 되는데 1~2시간 늦게 집계되기도 했다.

반대심리로 장 분석하는 평상심 중요
 21일 이후의 장세도 예외가 아니었다. 연합통신이 일본 <산케이신문>을 인용, 이라크가 전쟁 전에 2백50대의 전폭기를 이란으로 대피시켰다는 보도는 투매를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이라크의 사우디아라비아 공격등 다국적군에 불리한 미확인 전황이 장에 유포되면서 폭락장세로 치달았다.

  주가가 전황에 따라 움직인 것은 전 세계가 한결같았지만 우리나라 증시의 극심한 혼란은 외국 증시보다 강도 높은 뇌동성에 그 원인이 있었다. 전쟁이라는 고도의 위험상황을 놓고 도박을 한판 벌려보겠다는 세력이 ‘작전’을 개시한 것이다. 최악의 경우 손해 폭은 10% 정도로 추정되는 반면에 단기전으로 끝난다면 지수 8백선 회복이 가능해 한판 승부를 걸어볼 만했다는 얘기다. 따지고 보면 19일 이후 다국적군에 불리한 전황이 들어오긴 했지만 장세가 폭락한 것은 이들의 치고 빠지는 게릴라식의 초단기매매가 성행했기 때문이라는 진단도 있다.

  증시전문가들은 당분간은 전황에 따라 춤을 추는 ‘CNN주가’ 현상이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여기에 초단기매매를 일삼는 투기세력이 끼어들어 장은 극히 혼돈의 양상을 보일 것 같다. 이런 상황일수록 근접 촬영보다는 원거리 촬영을 하고, 또 ‘겨울에 밀짚모자를 사라’는 식의 반대심리로 장을 분석하는 평상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전황에 따라 널뛴 주가
17일 
08 : 46 ABC TV “다국적군이 바그다드 공습중. 하늘이 온통 붉게 물들고 있다.” 
10 : 46 CNN “이라크의 화학무기 제조공장 및 핵무기 시설. 미사일기지 등이 거의 파괴됐다.”  11 : 00 부시 미 대통령. ‘사막의 폭풍’ 작전 개시를 공식발표. 
13 : 03 CNN. 미 국방성 관리의 말을 인용 “이라크 공군 치명적 타격 입었다.” 
14 : 27 CBS “이라크 포대가 쿠웨이트 국경 근방의 사우디아라비아 정유시설을 포격했으나 큰 피해는 없었다.” 
16 : 20 바그다드에 2차공습 시작. 방공호 피격. 융단폭격.

18일
08 : 30 CNN “다국적군 공격 재개.” 
09 : 12 바그다드 라디오방송 “이라크 군이 다국적군 항공기 60여대 격추했다.” 
09 : 16 CNN “이라크.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 스커드 미사일 3발 발사.” 
10 : 10 카이로발 타스통신 “후세인이 골란공원과 레바논이 해방될 때까지 싸울 것을 다짐했다.” 
10 : 12 미국. 이스라엘에 보복자제 요청. 
11 : 30 CBS “이라크. 스커드 미사일로 사우디아라비아 다란시 공격.” 
13 : 25 부시 대통령. 이라크에 대한 보복을 다짐하면서 “이라크의 미사일 위협 없애겠다”고 밝힘. 
16 : 00 미 전폭기 4차 출격.

19일 
08 : 22 사담 후세인에 불만을 품은 이라크의 군 장교들이 정권 전복을 계획하고 있다고 <워싱턴 타임스>가 미 행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보도. 
08 : 30 다국적군 측은 손실된 항공기 수가 7대라고 밝혔으나 바그다드방송은 72대라고 주장.  08 : 41 이스라엘의 알렌슨 국방장관이 이라크에 대한 보복 밝힘. 
08 : 44 시리아의 모하마드 살만 정보장관 “이스라엘이 요르단이나 이라크를 공격하면 시리아는 공격당한 아랍국가 편에 설 것이다.”
09 : 10 소련 텔레비전. 부시가 고르비와의 전화통화에서 “전쟁은 앞으로도 수주일 계속될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다고 보도.

21일 
08 : 55 이스라엘 내각은 보복을 자제하겠다는 샤미르 총리의 정책을 승인. 미국 언론. 이스라엘 전투기가 터어키의 인서리크 공군기지로 파견됐다고 보고. 
08 : 58 CNN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서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 폭발.” 
08 : 59 일본 <산케이신문> “이라크의 전투기 2백50대가 이란에 대피되어 있다.” 
09 : 32 ABC. CNN 등 미국 방송 “미군이 제공권을 장악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등 슈워츠코프 대장과의 대담내용 보도. 
19 : 30 이라크는 20여명의 다국적군 포로를 인간방패로 이용하겠다고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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