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계로 빛보는 동시통역
  • 우정제 기자 ()
  • 승인 1991.0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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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수 3백만원의 국제화시대 인기직종…모국어 표현력, 상식 겸비해야
 걸프전쟁 개전 첫날 갖가지 해프닝을 속출했던 KBS와 MBC 양텔레비전의 동시통역은 그 후 며칠 동안 매끄러운 통역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사전녹화·요약보도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실은 개전초 며칠간 ‘생방송’이라는 자막과 함께 동시통역으로 보도된 뉴스 중 일부도 생중계가 아닌 사전 녹화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주변 관계자들에 따르면 “보다 매끄러운 통역을 내보내기 위해 방영 직전에 완성한 녹화물을 진짜 생중계물과 살짝 섞어 방송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전녹화의 경우, 통역이 아무리 유창하다 해도 대사를 써서 읽는 낭독에 가깝지 엄밀히 말해 동시통역이 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여론과 상대사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방송사도 문제지만, 이야기의 주제나 화자의 신분 등 사전 정보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 뉴스 동시통역의 어려움과 본질을 모르고 내용이 충실치 못하더라도 그저 매끄러운 것만이 최고인 줄 아는 일반인의 인식도 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통역사의 메카. 파리와 브뤼셀
 국내에서는 걸프전 중계를 통해 동시통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지만 국제사회에서 이 직업이 부각된 것은 이미 40년전, UN총회의 회의 내용이 미국 전역에 라디오로 중계되면서부터였다. 이후 국제화시대가 열리면서 그 수요가 급속히 늘어 현재는 ‘국제회의의 꽃’이라 할 만큼 필수 불가결한 전문직의 하나가 되었다.

  현재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회의통역사협회(AIIc·통역사의 권익을 옹호하는 일종의 노조)에 등록된 통역사는 전 세계적으로 약 1천8백명. 세계 외교의 중심지이자 유럽의 심장부인 파리에만 3백명의 통역사가 상주, 명실상부한 ‘통역의 도시’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유네스코 등 큼직한 국제기구들이 개최하는 각종 국제회의가 연중 줄을 잇고 있는데 특히 프랑스 외무성 같은 기관은 국제회의통역사협회와 특별 통역요율협정을 맺을 만큼 1급 통역사에 대한 수요가 크다.

  브뤼셀에 위치한 EC본부는 9개국어 통역사들이 주야로 뛰는, 가히 유럽 통역사들의 메카이다. 이곳에서는 연간 운영예산의 4분의 1을 통·번역 소요경비로 지출하고 있는데 2백명의 상임 통역사 외에도 최고 6백명까지의 통역사를 수시로 고용한다. 그 때문에 1급 통역사들은 파리, 브뤼셀 등 전 유럽 도시를 내집 드나들 듯 드나들며 귀빈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국제회의통역사협회 규정에는 타지에서 통역사를 부를 때 비행시간이 8시간 이상이면 반드시 휴식일을 주도록 되어 있다. 즉, 8시간 이상 16시간 미만 비행기를 타고 가면 통역 당일 전후 하루씩 이틀 간, 16시간 이상이면 통역 당일 전후 이틀씩 나흘 간의 휴식일을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회담기간 중에는 통역 업무가 없는 날도 통역일수로 가산되며 통역료 외에 숙식비와 용돈을 포함한 퍼디어(1일 체류비)이 지급된다. 그러므로 전문 통역사를 처음 초빙하는 회의 주최측에게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 되는 것이다.

  이들 통역사의 세계에서 철저하게 지켜지는 직업윤리는 “통역을 위해 안 사실을 절대로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는 것. 이 같은 규정은 곧 통역사의 생명과 직결된다. 고위급 회담일수록 회담이 끝나기 무섭게 기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게 마련이지만 통역내용과 무관한 듯 보이는 회담 지속시간까지도 언급할 수 없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국내 남자 통역사 드물어
 현재 국제회의통역사협회에서 승인한 한국 회원은 86, 89년 두차례 한·프랑스 정상회담에서 미테랑 대통령의 통역을 맡았던 한국 외국어대 통역대학원의 최정화 교수와 청와대에 근무 중인 곽중철씨, 2명이다. 국내 유일의 통역학 박사인 최교수에 따르면 “국제회의통역사협회에 가입하지 않았어도 구미 통역사들과 어깨를 겨룰 만한 프로급은 한국에도 10여명이 있으므로 한국의 통역수준은 국제무대에서 손색이 없다”고 한다.

  이들 통역사들은 대부분 대사관을 비롯, 국회 정당 대기업 등에 1~2명씩 소속되어 있으며 일부는 프리랜서로 뛰고 있다. 이들 중 활동이 두드러진 50명을 전공언어별로 살펴보면 영어 20명, 일어 10명, 불어 5~6명, 러시아어 중국어 독어 스페인어 각 3~4명, 아랍어 2~3명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고정직을 가진 통역사들의 월평균 수입은 1백50만원~2백만원 선인 반면, 성수기 프리랜서 통역사들의 수입은 3백만원 선으로 월등 앞선다. 앞에 말한 국제 규정에 따라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는 통역요율은 1일 30만원~35만원 수준인데 이번 걸프전 보도에 투입된 통역사들 역시 KBS MBC 양사로부터 이에 준한 대우를 받고 있다. 하지만 초과근무시에는 시간당 5~7만원이 추가되므로 이들의 일당은 최고 80만원 선까지 기록한 날도 있다는 게 주위의 귀띔이다.

  88올림픽 이후 그 수요가 격감하리라는 예측을 뒤엎고 최근 국내 통역사들의 취업은 매우 호조를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국제회의 개최가 늘고 있고 보수도 높아 급속히 인기직의 하나로 부상하고 있다. 91년 한국 외국어대 통역대학원의 입시에서 한영과 20:1, 한일과 10:1, 한노과 7:1등 전례없이 높은 경쟁률을 기록한 것도 이 직종에 대한 인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학생 1명당 강사진 3명꼴”의 철저한 훈련을 받고서도 졸업후 통역사로 정착하는 비율은 매우 낮다. 학교측에 의하면 졸업생의 1할인 10명 정도만이 통역사로 입문한다는 데 이는 통역사의 길이 얼마나 피나는 ‘고행’인지 짐작케 한다. 흔히 통역사의 3가지 요건으로 어학실력과 전문분야에 대한 상식, 적성을 꼽지만 “풍부한 모국어 표현력을 바탕으로, 들으면서 분석하고, 내뱉으면서 종합하는” 기술이 말처럼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높은 보수에 끝없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도전적인 직업, 그러면서도 연사의 ‘영광’을 위해서만 ‘봉사’해야 하는 특이한 서비스 직종. 남의 그림자로만 남는 이 ‘3차산업적’ 특성 때문에 유교적 배경을 가진 우리나라에는 현재 남자 통역사가 매우 드물다. 프로의 세계에서 뛰는 사람은 대여섯명에 불과할 만큼 남자 통역사들의 갈등이 심하고, 특히 30대후반을 고비로 이직률도 매우 높은 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직종에 대한 인기는 계속 상승중이어서 이 같은 현상은 국내에서 통역사가 자유업으로 확립돼가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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