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은 ‘변화’를 거부했다
  • 런던ㆍ한준엽(언론인) ()
  • 승인 1992.04.3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총선서 보수주의 또 승리 “혼란할수록 동요 않는다” … 장기집권 부작용이 숙제

 “영국은 무엇보다도 보수주의 국가이다. 이것은 영국 국민이 이번 선거에서 다시 내린 결정이다. 노동당은 1945년 이래 보수당에게 30년이나 집권기회를 열어주었다. 이번 선거에서도 노동당은 ‘검은 목요일’(영국의 총선거는 관례적으로 목요일에 실시해왔음)을 맞았다. 최근의 ‘검은 목요일’은 영국이 철저한 보수주의 사회임을 증명해 주었다.”

 영구의 주용 일간지 10여개 가운데 친노동당을 표방하는 《가디언》지는 4월11일자 시설의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지난 9일에 실시된 영국 하의원의 총선거가 투표 당일까지의 여론조사 예측을 뒤엎고 집권 보수당의 승리로 나타나자 《가디언》지조차도 이처럼 영국 사회가 전통적인 보수주의가 뿌리깊게 자리한 사회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역대 총선거에서 거의 매번 노동당을 지지하고 이번 선거에서도 노동당과 닐 키녹 당수를 옹호하는 논조를 펴 온 《가디언》지가 노동당이 표방하는 민주ㆍ사회주의를 제쳐놓고 보수당이 내세우는 보수주의를 영국 사회의 전통적 성격이라고 규정한 것은 이번선거의 쟁점이 총체적으로는 보수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대결이었음을 시사한다.

 종 메이저 보수당 당수겸 총리도 선거 전회견에서 “이번 선거는 바로 보수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선택”이라고 선언하고 “특히 동유럽과 남미대륙에 걸쳐 사회주의가 이미 종말을 고했거나 사양길로 접어든 상황에서 선택은 분명하다”고 주장했었다.

 

두 당의 이념 차이는 혼합경제ㆍ복지정책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을 내세워 노동당 집권이 가져올 부정적인 결과를 부각시키는 데 주력한 보수당의 이번 선거 전략은 일단 시대적 상황에서 적중한 것으로 보인다. 보수당이 표방해온 보수주의는 4천3백만 영국 유권자에게 무엇을 약속하고 있는가.

 보수당의 정치철학은 개인의 영리 추구를 바탕으로 하여 자유기업주의를 옹호하는 것이며, 노동당의 정치철학은 국민의 복지와 공공의 봉사에 역점을 두고 부의 재분배를 통해 온건민주사회주의로 복귀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보수주의가 표방하는 주요한 이념들을 맨체스터 대학의 정치학 교수 빌 존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인간 본성은 이기적이고 약하다. 둘째, 이같은 약한 인간을 어두운 본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선 법의 지배가 필요하다. 셋째, 법 앞의 평등이나 기회에 대한 평등이 보장돼야 하지만, 능력의 차별 없는 일률적인 평등에 따라 개인에 대한 보수가 결정되어서는 안된다. 넷째, 급격한 변화는 피해야 하면 기존의 것은 아직도 유용한 경우 고수해야 하는 한편, 정부의 행정력은 될 수 있는 대로 억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 보수주의 이념은 75년 대처 전 총리가 보수당 당수로 등장하면서 변화했다. 대처는 취임 이후 민간의 자유활동을 중시하는 통화주의에 입각해 통화공급제한과 고금리정책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낮추는 데 중점을 둔 강력한 경제개혁을 추진해왔다. ‘대처리즘’으로 불리는 이 보수주의는 공영기업의 민영화, 노동조합의 활동제한 등으로 구체화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실업문제는 거의 해결하지 못했다.

 1990년 11월 대처의 하야로 총리직을 물려받은 메이저 총리는 이번 선거에서 노동당을 겨냥해 감세 제도, 국방력 강화유지, 의료복지 개혁, 유럽에서 영국의 시도자적 역할 제고 등을 보수당의 정강 정책으로 내세워 정권을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메이저는 16개월의 과도기 동안 자신을 얽어맸던 대처 전총리의 그늘을 벗어나 이제 메이저 시대의 개막을 선언하게 됐다. 메이저 총리가 앞으로 대처리즘으로 나타난 지난날의 보수주의를 어떻게 수정, 보완해나갈 것인가는 아직 미지수이다. 어쨌거나 1939년 이후 90년까지 보수당과 노동당의 정치적 성향 분포도는 혼합경제와 복지사회정책을 중심기점으로 극우와 극좌 사이에서 최대한도로 움직이고 있다.

 보수당은 이번 선거에서 유효투표의 42%인 1천4백만명의 지지도 의석수 6백51석 가운데 과반수를 넘긴 3백36석을 확보했으며, 노동당은 2백71석, 재2야당인 자유민주당은 지난 87년 선거에 비해 오히려 2석이 줄여든 20석을 차지했다.

 4천3백만명의 유권자 가운데 전통적으로 보수당을 지지하는 계층은 중산층 이상 대부분과 근로계급의 3분의 1에 가까운 유권자들이다. 영국의 근로인구는 2천5백여만 명. 이 가운데 1천1백여만명이 노조평의회(TUC) 산하 산업별 노조에 가입한 노동자이고 이중 반수 이상이 노동당원이다. 역대 선거 분석결과가 말해 주듯이 특히 숙련노동자 계층은 잠재적 보수성향이 강한 부동표 계층이다. 이번 선거 직전의 여론조사에서 이들은 보수당의 장기집권과 경기침체에 반발해 제3당인 자유민주당을 지지한다고 나타났으나 투표장에선 대부분보수당으로 다시 마음을 돌린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왜 보수당을 지지했을까.

 

보수주의 앞날, 장기집권으로 위험 부담

 떠들썩했던 투표가 끝나고 개표결과가 밝혀진 4월13일 아침. 런던에 직장을 둔 근로자들을 잔뜩 태운 기차가 출근시간에 중간역인 윔블던 역 못 미쳐 도중 정차했다. 3일 전 런던 시내 금융가에서 아일랜드 공화군(I.R.A)의 소행으로 알려진 테러사건으로 3명이 숨지고 80여명이 다친 후 교외선의 지하철과 기차역은 긴급대피를 위해 예고 없이 정차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승객들은 불평 한마디 없이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아침 신문을 읽거나 소리없이 책장을 넘길 뿐이었다.

 이때 보수당 지지자라고 자처한 50대 초반 승객인 데니스 허드씨가 영국인의 기질과 보수당의 승리에 대해 기자에게 한 말은 유권자의 성향을 한마디로 요약해준다.

 “극도의 혼란과 위기 속에서 선택할 대안이 없을 때 영국인은 결코 동요하지 않는다. 성급함과 혼란은 더 큰 혼돈과 희생을 가져올 뿐이다. 열차 안 승객이 참을성 없이 술렁거린다고 상상해 보라. 메이저의 승리? 그것도 그렇다. 보수당의 재집권은 급격하고 과격한 변화 가능성에 대한 거부의 표시이다.”

 메이저 총리는 총선 승리 뒤 새 내각의 진용을 대폭 개편했다. 노동당은, 13년 만에 이루어질 수도 있었던 집권의 꿈이 무너짐과 동시에 총리의 꿈도 사라진 닐 키녹 당수가 즉각 당수 사퇴를 선언함에 따라 이제 새 후계자 선택문제를 중심으로 한 당의 체질 개선 문제를 주요현안으로 떠안게 됐다. 양당체제를 위협하면서 제1당과의 연정을 통한 조정자 역할까지 기대했던 자민당의 패디 애쉬다운 당수는 뜻밖의 참패로, 선거전에서 줄곧 주장해 온 비례대표제 도입 등을 새 의회에서 쟁점화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보수당의 재집권 성공으로 런던의 주가 선거 이후 상승세를 유지하고 파운드화 역시 강세를 보이면서 경기 회복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2백70만명이나 되는 실업자가 올 상반기 안에는 좀처럼 줄어들 전망이 없다는 점에서 메이저의 앞날은 그리 밝지 못하다.

 나아가 18년째를 앞둔 보수당의 계속 집권은 그 자체가 위험을 안고 있다. 장기 집권은 도덕적인 부패는 아닐지라도 지배계층을 포함한 지식계급의 부패와 나태, 자기만족을 잉태하거나 절망의 씨앗이 싹을 틔울 모판을 마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못 가진 자, 혜택 받지 못한 계층의 불만이 분출구를 찾지 못할 경우 그들은 언젠가 폭발하거나 분명코 다른 대안을 선택할 것이라는 점은 지난날의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