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교육 ‘학원 전락’ 위기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2.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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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상화 무색한 새 입시안 … 학생ㆍ교사 “어쩌란 말인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지원할 대학을 결정해 공부하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입니다” 각 대학이 94학년도 입시요강을 발표하자, 서울 서라벌고 2학년 김홍일군(17)은 이렇게 말했다.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한 입시경쟁이 좀체로 수그러들지 않는 상황에서 이 학생의 말은 94학년도 대학입시안이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94학년도 대학입시는 크게 대학별 시험과 수학능력 평가시험으로 요약된다. 과거 예비고사와 대학별 본고사를 치르던 제도와 흡사하다. 즉 △내신성적을 40% 이상 반영하고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과 대학별고사의 반영 비율은 각 대학이 자율로 결정하며 △대학수학능력시험은 1회 또는 2회 중에서 학생이 선택한다는 점이 골자이다. 현재 교육부가 제시한 방침에 따라 1백32개  4년제 대학중에서 40개 대학이 대학별고사를 실시하고 나머지 92개 대학에서는 내신성적과 수학능력시험만으로 신입생을 선발하기로 결정했다. 교육부 金佐燃 대학학무과장은 “이번 입시제도는 고등학교 교육의 정상화와 대학의 자율성 확대에 목적을 두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대학별고사의 실시 여부와 과목선택권을 전적으로 대학에 일임했기 때문에 수험생과 지도 교사들은 어느 방향에 목표를 두고 입시준비를 해야 할지 일대 혼란을 겪는 것이다. 교육부는 수험생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대학별고사를 세 과목 이내에서 실시하라고 ‘권장’했지만, 서울대는 이를 무시하고 국ㆍ영ㆍ수를 포함해 네 과목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사실상 94학년도 대학입시에서 국가가 관리하는 시험은 수학능력 평가시험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위권 대학이 입시요강에서 대학별 고사를 보겠다고 발표하자 아직 지원할 대학을 결정하지 못한 1~2학년 학생과 학부모들은 어느 대학 시험에 맞춰 공부를 해야 할지 방향을 못잡고 있는 상태이다.

 94학년도에 인문계열 지원 수험생이 치러야 할 대학별 시험을 예로 들어보자.

 서울대 지원자는 국ㆍ영ㆍ수를 필수로 하고 독어 불어 중국어 스페인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고려대 수험생은 국어와 영어를 필수로 하고 수학Ⅰ과 한문을 포함한 제2외국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연세대 지원자는 국어와 영어는 필수로 하고 △어문계열은 일본어를 제외한 제2외국어나 한문 중에 하나를 △상경ㆍ법과대학은 제2외국어나 수학Ⅰ중에 하나를 △기타 학과는 제2외국어 국사 수학Ⅰ 한문 가운데 한 과목을 선택해야 한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만, 그것도 인문반 학생의 경우만 따져봐도 이렇게 복잡하다.

 그러나 대학별고사를 실시하는 각 대학의 입시요강에다 자연반까지 한꺼번에 염두에 둬야 하는 일선 교사들은 이보다 훨씬 많은 ‘조합’에 골머리를 앓아야 한다. 대부분의 상위권 대학에서 대학별 고사를 보기 때문에 국ㆍ영ㆍ수 세 과목은 ‘최대공약수’로 묶어낸다 하더라도, 나머지 과목은 학생들에게 맡겨야 하는 처지다. 더구나 대학마다 문제 유형이 달라 준비도 수월한 게 아니다.

 

“94년도 입시요강을 이제야 발표하다니…”

 “이런 상태라면 교사들이 자기 과목만을 가르치고 아이들이 알아서 공부하도록 나몰라라 내버려두거나, 아니면 학교가 대학별 특수반을 만들어 편법으로 지도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서울 강북에 있는 한 고등학교 교무주임의 푸념이다. 물론 일선 학교에서 학생들을 ‘자유방임’한다면 적어도 고교교육은 교육부의 의도대로 정상화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입시지옥에 내몰리는 수험생들은 “성적이라는 게 항상 변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특정 대학의 과목만 공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런 현상은 명문대를 지망하는 상위권 학생들에게서 두드러진다. 특히 현재 일본어를 배우는 상위권 학생들은 서울대와 연세대 이화여대는 지원할 수 없는 상태이다.(31쪽 보조 기사 참조).

 일선 교사들은 한결같이 “현재 고등학교 2학년 학생부터 적용되는 94학년도 입시요강을 올해에 발표하는 것은 적절한 조처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즉 현재 중학교 3학년 학생부터 적용될 수 있도록 과도기를 두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과도기를 두지도 않고 성급하게 시행하려 들어, 각 고등학교에서는 대학마다 다른 입시요강에 맞춰 당장 대학별 또는 과목별로 입시반을 구성해야 할 형편이다.

 

지원대학별 특수반으로 “헤쳐모여”

 실제로 각 고등학교에서는 입시학원처럼 ‘서울대반’ ‘연대반’ ‘고대반’등으로 특별반을 구성해 파행적으로 수업을 진행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서울 강북의 한 고등학교는 한 학년이 15개 반이지만 실제로는 16반과 17반까지 두고 있다. 국ㆍ영ㆍ수 세 과목 시간이 되면,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인문반에서 60명을 뽑고 자연반에서 60명을 뽑아 2개 반을 따로 만드는 것이다. 이 학교의 한 입시담당 교사는 “앞으로 대학별로 특별반을 구성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고등학교가 입시학원으로 전락할 상황에 놓인 셈이다.

 과열과의 현상도 더욱 거세어질 전망이다. 즉 내신성적 중 국ㆍ영ㆍ수에 가중치를 두어 세 과목의 비중이 40%를 넘는 상태이고 수학능력평각시험도 국ㆍ영ㆍ수 위주의 문제가 나온다. 그런데도 대학별고사에서 또 국ㆍ영ㆍ수 시험을 봐야 하기 때문에 수험생들은 온통 이 세 과목에만 신경을 쏟아야 한다. 그러니 과외가 과열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일선 교사들은 “94학년도 대입 제도는 학생의 공부 부담을 가중시키고 과외만 부추길 뿐 절대로 고교교육을 정상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게다가 처음으로 실시되는 수학능력평가 시험에 대해서도 아직 구체적인 학습모델이 마련되지 못해 교사는 교사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혼란에 빠져 있다. 언어 외국어 수리탐구 영역으로 나누어 실시하는 수학능력평가 시험에서 어느것 하나 뚜렷하게 방향이 정해지지 않아, 수험생들은 본고사 걱정보다도 수학능력시험에 더 큰 부담을 느낀다고 한다.

 ‘입시가 교육을 통제하는’ 우리나라 교육현실에서 과도기도 없이 대학의 자율권만 갑자기 높인 이번 대입제도는 교사와 학생의 혼란만 더했을 뿐이다. 지나치게 복잡한 입시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교육 정상화라는 교육부의 본래 취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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