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좋아 ‘애견마을’에 산다
  • 경기 용인ㆍ송 준 기자 ()
  • 승인 1992.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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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탈출한 21가구…용인군 봉명리 모여 5백여마리 길러


 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데 모여 사는 애견인들의 마을이 있다.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 봉명리에 자리한 이 동네는 모두 21가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구마다 적게는 7마리부터 많게는 70마리까지 평균 20~30마리씩 족보 있는 명견들을 키우고 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단지 “개 한번 마음놓고 키워보자”고 모여든 동네이지만, 이들의 이웃사랑은 짧은 역사에 견주어 끈끈한 유대를 자랑할 만큼 도탑다. 이들은 담장을 대신한 향나무 탱자나무 또는 철망 울타리 위로 사랑을 주고받는 열린 이웃들이다.

 이웃 사이에 애정의 매개가 되는 것은 물론 ‘개’이다. 어느 집 개가 아프거나 새끼라도 낳는 날이면 같이 밤을 지새주는 경우가 잦다. 어느 집을 지칭할 때 ‘호돌이네’ ‘세미네’ ‘하찌네’ ‘마미네’하고 그 집에서 기르는 개의 이름을 쓰는 것도 이곳의 관행이다.

 “어딘가에 정을 쏟아붓는 것 자체가 좋다. 그리고 개는 그 애정에 금방 반응하며 속이 거나 숨길 줄을 모른다.” “개가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이나 재롱을 보면 마음에 위안이 된다”  “개는 아기와 같다. 개 기르기는 아기 키우듯 해야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이 개를 사랑하는 이유와 마음가짐이다.

 오산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벗어나 평택을 거쳐 차로 30여분을 달려야 도착하는 이 외진 부락은 ‘노후에 대비한 전원마을’로 특징지을 수 있다. 구성원들 거개가 자녀교육이나 경제력의 굴레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장ㆍ노년층으로, 고즈넉하고 평화롭게 인생의 황혼기를 지내려고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얼마전 군생활을 마치고 이 마을에 합류한 60대 퇴역군인 ㅅ씨는 송아지만한 ‘그레이트 데인’을 데리고 주위의 들판을 돌아보는 것이 큰 낙이라고 한다.

 이 애견마을은 산업화ㆍ현대화에 따라 급변하는 생활형태의 한 가지이자,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일기 시작한 새로운 주거문화의 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얼마 전부터 교외의 산자락이나 호숫가에 세워지기 시작한 통나무집 산장 별장촌 등 전원주택은 永住를 위해서든 별정으로서든 물질문명에 대한 반발이자 하나의 대안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애견마을은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의 연장선상에 있다.

 잡초가 무성하던 봉명리 들판에 현재의 마을이 들어서게 된 것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부터이다. 이 마을에서 맨 처음 개 기르기를 시작한 金泰日씨(59)가 70년대식 슬라브 가옥들이 줄맞춰 서있는 이 ‘전시용 마을’(도로 주변에 목가적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정부가 주도한)을 찾았을 때, 마을 어귀는 물론 집집마다 뜰에 사람 키만한 잡초들이 우거져 인근 주민들이 전설의 고향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김씨는 이곳이 개와 함께 생활하는데 적합한 곳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지난 88년 3월부터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찾았다. 알음알음으로 모여든 사람들 가운데는 멀리 포항에서 찾아온 이도 있다. 지금은 번식 전문가 두 사람을 중심으로 동물병원 원장, 동물 보호가, 애견 전문잡지 발행인 등 전문인들이 모여들어 나름대로 구색을 갖추었다. 이밖의 구성원들은 교수, 비행기 조종사, 외국인 선교사, 사업가, 퇴역군인 등 경제적ㆍ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도시에서 개를 길러본 사람이라면 이들이 왜 이곳을 찾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웃에게 개의 배설물 냄새 털 따위로 인한 불편을 끼친다든가, 수면을 방해한다든가, 또는 개에게 물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 등은 유쾌한 경험이 아닐뿐더러 도시 생활 자체가 개의 건강에 유익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몇가지 이점을 더 누리고 있다. 질병, 출산, 훈련 등에 관한 상식을 같이 나눌 수 있을 뿐 아니라 교미 등 번식에 드는 비용을 절감하는 실질적인 이익이 있는 것이다.(시중에서는 종견의 씨를 한번 받는 데 대략 15만~30만원이 든다). 이렇게 번식시킨 개를, 수십만원에서 심지어 수백만원대에 이르는 다른 종류의 개와 쉽게 바꾸어 기를 수 있다는 점도 큰 즐거움이다.

 월간 ≪애견 세계≫의 발행인 金尙純씨(52)는 개 기르기에서는 물론 책 만들기에서도 애견마을에 사는 덕을 톡톡히 보는 사람이다. 갖은 종류의 개 사진을 쉽게 찍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웃들이 애견 전문가여서 잡지에 실을 원고를 부탁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애견 세계≫ 4월호에는 옆집에 사는 유라씨가 지난 1월 세상을 떠난 애견 ‘루디’에 대해 쓴 ‘진혼의 글’이 실려 있다.

 애견가들에게 이 마을을 소개한 애견보급가 장재관ㆍ노동주씨 부부는 조만간 의정부와 포천 지역에 또 다른 애견 마을이 생겨날 것이라고 밝혔다. 차츰 자리를 잡아가는 애견 마을이 각박한 도시형 주거양식의 대안 구실을 해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애견가들이 행복한 노후를 보내는 ‘실버타운’으로서의 구실은 이미 해내고 있는 듯하다.

 지금은 철거했지만, 얼마전 이 마을에서는 개도둑이 드는 바람에 경보장치를 설치한 적이있었다. 집을 지키려고 개를 길들인 인간이 개를 지키기 위해 경보장치를 단 일은 아이러니컬하다. 이 마을에서 진도개는 대개 대문 옆에 살면서 ‘귀한 외국개’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한다. “왜 하필 외국개냐”라는 노골적인 비판도 나올 법하다.

 “애견마다 개성이 다르고 나름의 매력을 지녔다. 우리개는 종류가 얼마 없다. 우리 개 새종자를 개발해낼 때까지는 외국개 선호를 국산품 애용 차원에서 비판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상업적 의도가 끼어들 때 ‘개 사랑’의 본질은 변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토종개 애호가 朴仁鶴씨(32)의 말은 몇가지 곱지 않은 시각에 대한 해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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