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도 정계개편 개혁파 ‘헤쳐모여’
  • 본·김호균 통신원 ()
  • 승인 1991.0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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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세력, 리투아니아 등 유혈사태에 반발 ‘독립선언’
 일부에서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는 가운데 내전으로 치닫는 듯하던 소련의 민족분규가 일단 협상의 길로 들어섰다. 리투아니아 공화국과 라트비아 공화국은 연방헌법에 규정된 대로 분리독립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발표했다. 고르바초프와 면담한 고르부노프 라트비아 대통령은 “매우 긍정적인 인상을 받았다”고 만족을 표시했다. 같은 시간에 고르바초프는 두 공화국의 유혈사태에 유감을 표명하면서 진상을 철저히 규명할 것을 약속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에 앞선 지난 27일 소련인민대표회의 강경보수파 세력인 소유즈그룹의 지도자 빅토르 알크스니스 대령은 소련에서 내전의 발생은 필연적이며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고 시사했었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군부 쿠데타와 연관지어 보는 시각을 의식한 듯 고르바초프는 “우경화나 독재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그의 자문위원인 게오르기 사흐나사로프는 《슈피겔》지와의 회견에서 작년 3월의 주권선언 이후 리투아니아에서는 1백30여명의 과학 아카데미에서 추방되었고 수십만의 러시아계 주민을 ‘이등 시민’으로 전락시키는 조처가 실시되는 등 수많은 인권침해가 있었기 때문에 군이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내전 위험이 높아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발트해 3국에 군대와 연방내무성 소속 특수경찰이 파견됨에 따라 소련내에서는 정치판도의 개편이 가속화되고 있다. 리투아니아에 대한 군사개입에 항의하기 위해 19일에 열린 모스크바 군중집회에서 급진개혁파 모임인 ‘민주러시아’는 공산당에 대한 야당으로 등장할 것임을 선언했다. 이로써 그동안 공산당 내부에서 고르바초프를 지지해왔던 좌파 사회민주주의나 자유주의 노선의 급진개혁파가 마침내 독립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90년 한해동안 소련에서는 이미 마르크스주의 노동당,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당에서부터 기민당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정당이 조직되었지만 사회적으로는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지도부가 반동세력을 지지하고 있다.”
 급진개혁파들은 비록 소수이지만 그나마 공산당에 대응할 만한 유일한 세력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날 군중집회에서 대리 낭독된 선언문에서 옐친은 “독재의 위험이 현실화 되었다”고 경고하면서 “연방지도부가 사실상 과거의 정치노선을 떠나서 반동세력을 지지하고 있다”고 비방했는데 그는 이미 고르바초프가 발트 3국에 군대를 파견하기도 결정했을 때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이로써 작년에 ‘5백일 경제개혁안’ 수립을 위해 한동안 형성되었던 중앙파와 급진개혁파 사이의 협력관계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일단 다시 경쟁관계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연방정부와 언제라도 협상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기 때문에 사태 추이에 따라서는 협력 관계로 다시 돌아설 수도 있다.

 군중집회가 있기 전날 소련의 ‘인터팍스’ 통신사는 알렉산더 야코블레프, 레오니드 아발킨, 스테판 시타리안,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유리 오시피안, 스타니슬라프 샤탈린, 니콜라이 페트라코프 등 현직에서 물러나는 저명한 정치가의 이름을 한꺼번에 발표함으로써 고르바초프가 보수화하기 때문에 이들이 물러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을 낳게 했다. 그러나 이들이 현직에서 물러나는 이유는 다양하기 때문에 전혀 우연의 일치인 경우도 많다.

 샤탈린과 페트라코프의 경우는 고르바초프와의 의견 차이 때문에 사임한다는 것이 그들의 발언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페트라코프는 공산당 청년조직 ‘콤소몰’의 기관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지와의 회견에서 그의 사임이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으나 그 스스로가 정책 결정에 “더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경제 정책에 관한 의견 차이 때문에 사퇴를 결심했지만 고르바초프와의 인간관계는 “여전히 좋고 긴밀하다”고 말해 고르바초프에 대한 비판은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에 비해 ‘5백일 경제개혁안’의 주입안자인 샤탈린은 고르바초프에게 “급진개혁파와 협력하거나 아니면 물러나야 한다”고 공개서한에서 요구했다. 이들과는 달리 야코블레프 아발킨 시타리안 프리마코프의 경우에는 대통령자문위원회가 해체되거나 개각이 이루어지면서 현직에서 물러났다는 사실 이외에는 밝혀진 바가 없기 때문에 이들의 장래 거취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전체주의가 와해돼가는 과도기
 따라서 이들이 동시에 현직에서 물러난다는 사실만으로 이들과 고르바초프 사이에 의견 대립이 있다고 보는 것은 셰바르드나제의 극적인 사임을 둘러싸고 무성했던 각종 추측과 같이 성급한 것일 수 있다. 셰바르드나제는 금년초 <모스크바 뉴스>지의 예고르 야코블레프 편집장과 가진 대담에서 자신의 사임 결정이 고르바초프와의 관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샤탈린과 페트라코프의 경우처럼 고르바초프와의 의견 차이 때문에 떠나는 사례도 있는데 이는 고르바초프가 보수화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동안 그의 주변에 있던 급진개혁파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들 두 자문위원을 비롯해서 가브리엘 포포프 모스크바 시장, 아나톨리 소브차크 레닌그라드 시장, 세르게이 스탄케비치 모스크바 부시장 등 저명한 급진 개혁파 인사들은 이미 리투아니아 사태가 발생하기 1주일 전에 “민주세력의 건설적인 프로그램이 급히 마련되어야 한다”는 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 자리에서는 일단 급진개혁파가 권력을 장악한 지역에서 시장경제 도입과 민영화의 가속화, 대중조직의 건설, 공식노선에 대한 건설적인 대안 제시 등이 합의되었다.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공화국 사태를 계기로 이들이 공산당과 선을 그으면서 결속을 가속화할 것이 분명하다.

 소련이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은 전체주의가 지배하던 사회에 다원주의가 도입되는 과도기에 겪는 고통이라 할 수 있다. 민주적 대결 문화가 결핍된 속에서 새로이 결집되고 있는 정치세력 사이의 대결과정이 폭력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다. 소련 정부가 해외홍보를 위해 발행하는 《오늘의 소련》 최근호는 “소련 사회는 과도기에 놓여 있다. 권력을 물려받을 새로운 세력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고 분석하면서 과도기의 혼란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소련인은 방향을 잃었고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 못하다. 법이 통과는 되지만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마치 전반적으로 혼란이 소련을 지배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 든다.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국민간에 당혹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이 잡지의 분석에 따르면 소련은 3가지 측면에서 권력 공백기적 현상을 겪고 있다. 첫째로는 당과 국가권력이 점차적으로 분리되면서 지금까지 행정명령에 의해 유지되던 사회체계가 부분적으로 무너지고 있는데 이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경제적, 도덕적 메카니즘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둘째로는 지난 수년 동안 생겨난 정치조직들도 해체되거나 위기에 빠져 있다. 셋째로 최고 권력기구인 소비에트마저 위기에 빠져 있다. 정부기관지 <이즈베스티야>지가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소비에트 주도하의 개혁 가능성을 믿는 응답자가 작년 3월에는 30%에 이른 데 비해 7월에는 이미 11%로 떨어졌다. 고르바초프가 연방평화의회를 중심으로 어떻게 새로운 연방을 꾸며나길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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