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은 끝나지 않았다
  • 김 당 기자 ()
  • 승인 1992.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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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6년, 인류의 재앙 직시해야 … 20만명 추가 이주 추진



 “체르노빌의 비극은 아직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인류는 비소로 이 재앙으로 야기된 사회ㆍ의학ㆍ심리적 문제들의 전반적인 성격을 충분히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연방 대통령의 체르노빌 5주기 방송연설에서-

 

 1986년 4월26일 토요일 새벽 1시23분 전 세계를 경악시킨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우크라이나발전소 제4호기에서 터졌다. 당시 운전중이던 체르노빌 1ㆍ2ㆍ3ㆍ4호기에서 근무하던 발전소 직원은 1백76명. 공사중이던 인접 5ㆍ6호기 건설현장에는 2백68명의 건설 인력이 야간작업을 하고 있었다.

 발전소가 자리잡은 프리피야트강을 따라 서북쪽으로 3km쯤 떨어진 프리피야트시(발전소가 건설된 뒤 생긴 인구 4만5천명의 신흥도시)에 사는 주민들은 곧 닥쳐올 위험을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4호기로부터 남동쪽으로 15km이상 떨어진 우크라이나 전통적인 마을인 체르노빌을(인구 1만2천5백명)은 오히려 한결 평화로워 보였다.

 

소방원ㆍ기술자, 방호장비 없이 진화작업

 새벽 1시23분58초. 연속적인 두 번의 폭발음과 함께 4호기 원자로 건물의 지붕이 날아가 버렸으며 콘크리트ㆍ흑연ㆍ핵연료 파편 등이 원자로 건물에 난 구멍을 통해 분출됐다.

 지역 소방대가 화재경보가 울리고 5분 안에 발전소 소방대원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1백여명의 소방대원들이 터빈 홀과 4호기 건물안에서 발전소 직원들과 함께 진화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구조 작업자와 소방대원은 물론 운전원조차도 방사선 위험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사고 초기에는 방사선 계측기를 이용해 측정해보는 사람이 없었으나 시간당 100그레이(Gray:Gy)를 넘어선 곳도 있었다(Gy는 새 방사선량 단위 중 하나도 구 단위 100라드(rad)에 해당한다. 비전문적 차원에서는 100렘(rem) 또는 100뢴트겐과 같다고 여겨도 무방하다. 소련 정부 보고서는 구단위를 쓰고 있고, 뒤에 나오는 국제조사단은 국제표준단위인 신 단위를 주로 쓰고 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처도 지난 4월6일 방사선단위를 국제표준단위로 통일하기로 결정했으나 이 기사에서는 신ㆍ구 단위를 병용했다. 또 편의상 옛 소련은 모두 소련으로 통일했다).

 현장에 있던 운전원 중 상당수가 심각할 정도로 방사선을 쪼였으며 2명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사고 원전의 건설 엔지니어가 사고 조사단원으로 참여했던 그리고리 메드베데프씨의 저서 《체르노빌의 진실》(소련의 대표적 반체제 물리학자였던 사하로프 박사의 서문이 실린 ‘체르노빌스카야 흐로니카’가 원제인 이 책의 한국어판은 도서출판 따님에서 출간할 예정이다)에는 특히 방호장비도 없이 목숨을 걸고 불길과 싸운 소방대원들과 터빈 기술자들의 ‘영웅적인 희생’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메드베데프씨에 따르면 당시 중앙홀의 35.7m 높이에 있던 소방대원은 시간당 3만 뢴트겐, 분출된 핵연료와 흑연이 뒤엉킨 터빈홀 지붕 위를 거닐던 터빈 기술자들은 시간당 2만뢴트겐의 방사선량에 노출되었다.

 이 照射단위는 생물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까. 보통 사람이 1g의 라듐이 갖고 있는 방사능세기(1큐리)로부터 1m 떨어진 거리에서 1시간 동안 받은 방사선량이 1렘이다. 물론 이 조사단위에는 인체다 방사선을 쪼였을때의 영향을 나타내는 단위(렘)와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방사선의 특성을 이용한 방호원칙에서 알 수 있듯이 거기에는 시간 거리 차폐라는 3요소가 개입된다. 또 같은 에너지량이 흡수되더라도 방사선의 종류(αㆍβㆍγㆍχㆍ중성자선 등)에 따라 인체에 끼치는 효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국제방사선방호협회(ICRP)나 국제보건기구(WHO) 기준에 따르면 원전 작업자의 견간 피폭 허용치는 5렘, 암을 치료할 때 종양부위가 받는 양은 6천렘이고 1만렘을 전신 피폭하면 중추신경계증후근으로 사망한다. 결국 죽음에 이르는 방사선량의 기준값은 1만렘이고 그 이상의 선량은 생물학적으로 무의미하다. 사람은 두 번 죽지 않기 때문이다. 메드베데프씨는 당시 상황을 “그들의 목숨을 건 불길과의 싸움으로 화염은 진화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에 탔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또 다른, 눈에 보이지 않는 화염으로 치명적인 화상을 입었다. 그것은 바로 물로는 도저히 끌 수 없는 감마선과 중성자선의 불꽃이었다”고 묘사했다.

 

사망자 숫자 크게 엇갈려

 사고 현장과는 달리 주민들이 비교적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영웅적 희생 말고도 사고 발생 시각 덕분이었다. 한국전력공사 기술연구원 송명재 박사(보건물리학)는 “방사선 비상 때 주민이 취해야 할 1차적 행동은 옥내 대피인데 다행히 주민들이 잠들어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옥내 대피가 되어 주민들의 피폭량이 줄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고 당일 새벽 폭발과 화재를 동반한 심각한 사고가 4호기에서 발생했다는 보고는 모스크바의 원자력 이용에 관한 국가위원회에 즉시 전달되었다. 국가위원회의 첫 번째 조처는 방사선 측정 및 진화작업을 군대에 요청한 것이다. 국가위원회는 화재가 다른 기로 번질 경우를 우려해 흑연에 붙은 불길을 끄는 데 중점을 두었다. 공군 헬기들이 4월27일부터 5월10일까지 사고 노심 위를 선회비행하는 작전업무를 수행하면서 수백톤의 붕소 납 모래 등을 공중투하해 발전소를 거대한 ‘원자로 무덤’으로 만들었다.

 납으로 된 방호복을 입은 군인들은 1회에 한해서 40초 동안만 작업하고 철수했다. 사고 진화와 방사능 낙진을 제거하는 제염작업에 동원된 병력은 모두 60만명인데, 소련 당국은 그중 발전소 근처에서 작업한 20만명만이 방사선에 노출된 것으로 계상하고 있다. 원자로 내부상태가 안정을 되찾고 외부방출이 거의 정지된 때는 사고 후 10일이 지난 5월6일께였다.

 사고 당일 저녁 프리피야트시의 방사선 준위는 자연 방사선의 1천배(시간당 0.1mSv, 약 10밀리렘)를 나타냈다. 시 관리들은 일요일 정오께 주민들에게 사흘 동안의 준비물을 챙겨 오후 2시에 떠날 준비를 마치라고 짤막하게 방송했다. 인근 폴레스코이ㆍ이반코프 등지에서 밤새 수배한 버스 1천2백여대가 집결하여 수km에 이르는 장사진을 이뤘다. 4월28일 우크라이나 민방위당국은 반경 10km 이내 주민의 소개를 제안했고 5월2일에는 소개 범위가 반경 30km로 확대되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시 전역과 수도권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이 공식적으로는 ‘금지구역’으로 지정되어 1밸86개소 주민 11만6천명쯤이 반경 30km 밖으로 이주했다. 그후 정확한 환경 방사선 측정과 오염지도 작성에 따라 90년에 5만명이 추가이주했다(최초의 오염지도는 89년 3월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아직도 이주는 계속중인데 현재 20만명이 더 옮길 예정이다.

 체르노빌과 관련, 일반인들의 관심사는 사상자수와 방사능 유출량에 집중된다. 특히 인명피해 규모는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소련 정부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현재까지 ‘급성 방사선 영향’으로 사망한 사람은 31뿐이다. 그러나 그 발표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보가 단절된 상태에서 서방 언론들은 사망자수를 수백명 또는 수천, 수만명으로까지 보도해왔다. 우크라이나의 핵물리학자 블라지미르 체르노센코씨는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7천~1만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또 《체르노빌 참사》의 저자 중 한사람인 마르코 보쑨씨는 91년 4월 《뉴 사이언티스트》에 실은 기고문에서 정화작업자 중 군화학부대에서 파견된 8백명의 유격대가 제염작업에 집중투입되었는데 그중 3백50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진실은 어느쪽일까. 소련 정부의 요청으로 실시된 ‘국제 체르노빌 프로젝트’(이하 ‘프로젝트’로 줄임)에 참가한 국제자문단이 작성한 보고서(1천쪽에 달하는《테크니컬 리포트》와 그 요약 보고서)는 그 실마리를 제공한다. 비밀주의로 일관한 소련 정부의 국제조사단 구성 제의는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의 소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소련 정부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떠도는 풍문에 대한 무마와 복구비용원조라는 기대감이 깔려 있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주축이 된 이 프로젝트에는 세계 25개 국가와 유엔의 7개 국제기구(세계보건기구 식량농업기구 국제노동기구 유엔방사선영향과학위원회 세계기상기구 등)에서 모집한 2백여명의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국제조사단은 소련 정부의 공식조사ㆍ분석결과를 검증함과 동시에 독자적인 분석을 통해 비교했는데 조사기간은 90년 3월부터 91년 1월까지 약 10개월 동안이었다. 조사는 러시아 백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3개 공화국 30여개 오염 표본지역의 주민을 대상으로 하였다.

 조사결과는 지난해 5월21일부터 4일간 빈국제원자력기구 본부에서 열린 회의에서 발표됐다. 그 핵심 내용은 방사선 영향에 대한 소련측 공식평가가 대체로 타당하며 논란의 대상이 되는 건강 장해들은 방사선보다는 스트레스 등 심리적 요인에 따른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우선 환경오염평가의 경우 소련측 공식 오염지도를 검토한 결과 세슘과 플루토늄 오염분포도는 대체로 일치하나 스트론튬은 소련측이 과대평가한 것으로 분석했다.

 주민의 방사서 피폭평가의 경우 조사단은 7개 표본지역의 주민 8천여명에게 두달간 필름배지(선량 측정기)를 착용케 해 그중 6천개쯤을 회수했는데 90%이상이 계측기 제한치 0.2mSv(20밀리렘) 이하였다. 또 조사단은 주민 8천명에 대한 외부 피폭 전신오염 측정자료를 프랑스 및 오스트리아의 연구소와 국제원자력기구 연구소가 분석했다. 유엔방사선영향과학위원회 베네트씨는 이에 대해 “소련측 자료들을 2~3배쯤 과소평가하면 거의 일치했다는 점에서 소련측 분석기법 자체는 과학적이었다”고 평가했다(63쪽 도표 참조).

 주민 건강영향평가의 경우 조사단은 7개 지역 주민 1천3백56명을 선정하는 한편으로 사회ㆍ경제적 배경이 비슷한 7개 지역에서 동수의 주민을 임의로 선정해 비교 역학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조사단은 오염지역과 청결지역 모두 사고와 관련된 불안과 정신적 스트레스는 내재했지만 피폭선량과는 함수관계가 없는 경향을 보였다고 밝혔다.

 

제염작업중인 금지구역에 수천명 몰래 입주

 마지막으로 방사선 방호조처에 대한 평가에서는 소련 당국의 대응조처가 다소 미흡하고 비계획적이었지만 사고 규모나 성격상 사상 유례없는 재난임을 감안할 때 대체로 국제기준에 준한 것으로 평가했다. 조사단은 장기 이주대책의 기준이나 음식물 통제조처는 오히려 다소 과도한 것으로 분석했다.

 프로젝트 결과는 소련 정부에 ‘우호적’인데도 소련의 ‘기대’를 만족시키지는 못한 것 같다. 조사단이 소련 당국에 권고한 내용으로도 이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조사단은 보고서에서 다소 과잉조처된 규제를 당장 완화하는 것은 보건물리학적 관점에서는 바람직할 수 있지만 주민들의 불안감과 정부에 대한 불신감이 크고 치료보상에 대한 기대심리 또한 큰 만큼 더 큰 손실을 초래할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체르노빌은 현재 발전소는 물론 반경 30km 전체가 세계적 원자력 연구센터가 됐다. 두차례에 걸쳐 현지 탐문조사를 다녀온 몇 안되는 국내 전문가 중 한사람인 이재기 박사(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보건물리실장)는 “단편적인 보도들과 비밀주의에서 비롯된 풍문들이 체르노빌에 대한 실체적 진실에의 접근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박사에 따르면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직접 인과관계가 없더라도 나타난 결과가 그러하면 그 원인은 결국 사고로 인한 방사선 때문이라는 주장에 더 눈과 귀가 쏠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체르노빌이 우리에게 남긴 진짜 유산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체르노빌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금지구역에서는 아직도 제염작업이 진행중이고 또 수천명의 주민들이 몰래 들어가 살고 있다. 국제조사단의 보고서가 나왔을 때 미국과 영국의 ‘자연의 친구들’은 이를 “과학적으로 불충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사실 지적받은 대로 방사능낙진이 궁극적으로 암으로 인한 사망을 야기시키는지를 따지기에는 너무 이른지도 모른다.

 체르노빌 사고로 인하 백혈병 희생자들이 상당수 나타나려면 아마도 10년은 걸릴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는 체르노빌에 대한 중간평가에 해당하는 것일 뿐이다. 실체적 진실을 찾으려면 더 많은 시간과 인내, 그리고 일과성이 아닌 지속적인 탐구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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