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산업 물갈이 아리송한 전주곡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1.0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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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 단자사, 은행·증권업 진출…다음단계에 관심 집중
 "28일 오전까지만 해도 합병이 성사될 줄 몰랐어요. 합병은 대주주의 재산권 문제여서 상층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전혀 그런 조짐이 없었거든요. 오후 2시께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일은 이렇게 되는 것이구나 하고 혀를 내두를밖에요." 한양투자금융과 금성투자금융이 전격적으로 합병을 합의한 데 대해 인수회사인 한양투금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분위기를 전했다.

 두산 및 코오롱그룹이 대주주인 한양투금과 럭키금성그룹이 대주주인 금성투금의 합병은 ‘한지붕 세가족 은행’의 탄생이라는 국내 금융 역사상 첫 사례를 만들어냈다. 지분율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세그룹의 회장 사이에서 벌어진 것은 주인이 셋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필연적인 통과의례였다. 합병의 성사는 어느 단자사가 은행으로 바뀐다는 것 이상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지난해 10월 재무부의 ‘금융기관 합병 및 전환지원에 관한 법률안(합전법)’이 발표된 후 금융계를 뒤흔들었던 금융산업 개편안의 서곡은 일단 정부의 의도대로 연주되었다. 서울 소재 16개 단자가 중 9개사의 업종전환이 확정되었으며 이는 정부의 단자사 개편구도에 딱 맞아떨어지는 ‘황금분할’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단자사의 업종전환 신청 마감일인 지난달 31일 3개사가 은행으로, 6개사가 증권으로 갈 의사를 금융통화운영위원회와 재무부에 타진했다. 지난해 12월5일 16개 단자사 중 가장 먼저 전환의사를 밝혔던 한국투금과 신청마감일에 부랴부랴 임시 이사회를 연 한양투금도 ‘은행전환행 열차’에 올랐다. 증권사의 길을 택한 서울투금 한성투금 신한투금 고려투금 한일투금 동부투금 등 6개사는 정관변경안과 3년 동안의 사업계획서·증자계획서 등 내인가에 필요한 서류를 재무부에 보냈다.
 합전법이 처음 나왔을 때 금융계는 온통 시끄러웠다. 단자사를 정리하겠다는 정부의 의도는 대낮 같았지만 전환 기준이 무엇인지, 몇개나 허용한다는 것인지, 또 잔류하는 단자사의 업무는 어떻게 되는지가 굴속 같이 어두워 이들은 줄곧 ‘정보 빼내기’에 안테나를 곧추세웠다.
신한투금외엔 내인가에 어려움 없을 듯
 지난해 12월12일 세부 추진계획이 가시화되면서 이들의 ‘주판알 튀기기’ 소리는 요란해졌다. 막판 뒤집기를 한 투금사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전업 희망사들은 증권사의 경우 납입자본금 5백억원(또는 자기자본 1천억원 이상) 요건을 맞추기 위해 유상증자 계획을 세웠다. 은행으로의 전환은 더 까다로웠다. 현행 자기자본 1천억원 이상인 대형 단자사를 대상으로 하되 30대 재벌그룹에 속할 때는 합병전환만 허용한다는 전환대상 및 기준 때문이었다.
 9개 단자사들의 촉각은 지금 과천 정부종합청사 쪽으로 뻗어 있다. 내인가신청서 접수 때는 정부의 도리질이 없었지만 만약의 사태를 염려하는 것이다.
 증권으로 전환하는 서울(대주주 상업은행) 한성(조흥은) 신한(제일은)투금은 상대적으로 느긋하다. 정부가 은행 계열사에 우선적으로 전환을 허용하겠다고 밝혀 인가를 받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신한투금은 전 소유주인 金鍾浩씨가 낸 주식반환소송이 계류돼 있어 다소 불투명하다. 재무부는 문제의 불씨를 안고 있는 회사에 인가를 내줘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한국투금의 은행 전환은 "한국투금이라면 통과"라고 금융계에서 공공연히 얘기될 정도로 확실시되고 있다. 한양투금 역시 합병문제가 해결됨으로써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큰 이변은 없을 것 같다.
 전업을 하더라도 단자사는 1년간 기존업무를 할 수 있다. 당장 새 업무를 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다. 단자사들은 은행이나 증권으로 전환하더라도 이 기간 동안 기존의 기업고객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전략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전환 전 고객은 전환 후도 고객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현재 임시국회에 계류중인 합전법은 회기마감일인 7일 통과가 확실시 된다.
 지난 29일 한양투금의 5층 회의실은 관계자외 출입이 통제됐다. 합병팀이 긴급 구성돼 비밀리에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이들은 당장 전환에 따른 서류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였지만 전환 후 해결해야 할 산적한 현안에 몰두했다. 한양투금의 경우는 이질적인 두 조직이 합쳐진데서 오는 갈등의 해소도 문제다.
 전환사들은 인력충원·증자 등에 필요한 자금부담이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 몇개의 지점을 내줄지 모르지만 상당수의 인력을 기존사에서 '모셔 와야' 한다.
 올 하반기께 집중 개설, 영업이 개시될 것으로 보이는 새 지점은 증권사가 30개, 은행이 20~30개 등 모두 50~60개. 새로 영입할 인력은 증권사 9백명, 은행 5백명에 달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단자사가 은행으로 갈 경우 기존의 도매금융에 익숙한 체질을 소매금융으로 바꾸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특히 단자와 증권업과는 매우 이질적이므로 종업원의 혼란과 갈등요소가 우려되고 있다. 증권으로 전환하는 ㅅ단자사의 경우 사장이 직원들에게 불이익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재교육 등을 통해 이질적 업무로 인한 어려움을 합리적으로 풀어나가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경쟁체제 속 '대출세일즈' 시대 올 수도
 증권업이든 은행업이든 신규 참여자는 당분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ㅅ투금의 ㅂ과장은 "증권 전환사의 경우 은행 계열사들은 회사채 인수 등이 상대적으로 쉬워 유리한 고지를 점하겠지만 기존 증권사의 축적된 노하우를 당장 따라잡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본다. 게다가 대형 단자사라고 해도 기존사에 비해 중소형의 규모에 그친다. 5년간은 적자를 감내해야 한다는 사업계획을 짠 단자사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직접적 언급은 피하고 있지만 선발 단자사들은 해볼 만하다는 견해를 비친다. 한양투금 남진 상무는 "기존의 은행과 같이 한다면 은행 하나 느는 것 외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 창의성에 바탕을 둔 혁신적인 경영을 펼칠 것"이라고 밝혀 은행계에 돌풍을 몰고올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단자업계 1위를 확고히 지킨 한국투금의 한 관계자도 "고객의 욕구를 충분히 수용하는 공격적이고 발빠른 영업전략을 구사하면 1~2년 내 발판 마련이 가능하다."라고 낙관했다. 20억원까지의 대출을 대리급에서 결정해온 단자사의 영업형태로 보아 순발력에서 은행보다 월등하다는 판단이다.
 이는 곧 불어닥칠 '대출세일즈' 시대를 준비하는 전략도 될 수 있다. 도매금융을 주로 해온 외국은행이 일반 소비자에게까지 파고들어 시장을 확장해온 사례에서 이러한 전략의 가능성이 확인된다. ㅈ은행의 한관계자는 "단자사가 공격적이고 발빠른 영업전략으로 파고들면 무서운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면서 우려를 표시했다. 비대해진 몸집에다 무사안일주의 각종 규제와 부실금융이 은행 경영의 현주소이고 보면 이들의 돌개바람은 자극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또 시장의 '귀재'로 알려진 재벌 소유의 증권 전환 단사자들도 가벼운 상대가 아님이 분명하다.
 이들을 경쟁자로 받아들여야 하는 은행과 증권사의 눈매는 고울 수 없다. 은행은 일단 단자사가 들어와도 게임이 되지 않는다고 '여유만만'이지만 경영합리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1만명에 육박한 인원을 7천명선으로 감축하는 감량경영을 선언하고 있다. 은행의 경영합리화 움직임은 개방의 폭풍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작전이지만 단자사의 동승이 촉발시킨 측면도 없지 않다.
 당장 내년에 자본시장 개방을 맞고 있는 증권사들은 더 다급하다. 이번 단자사 정리와는 다른 차원에서 정부가 추진하고 있지만 한국산업은행이 자회사 형태로 증권업에 진출한다는 사실도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증권업계는 산업은행이 국제금융시장에서 쌓아온 노하우를 펼칠 때 무서운 경쟁자가 되리라는 우려를 감추지 않는다.
 물론 증권업계로선 외국 증권사가 가장 두려운 존재다. 정부는 국내사무소를 설치한 지 2년 이상이 되는 외국 증권사에 대해 수용 가능한 범위내에서 지점 신설을 허가해주겠다는 강화된 요건을 제시하고 있으나 증권사들은 외국의 발달된 금융 기법에 시장을 잠식당할 것이라고 걱정이 태산이다. 이미 17개 외국 증권사가 상륙을 꾀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증권업협회 자본시장 대책반이 최근 내놓은 보고서를 통해 '구조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풀이될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개방파고에 휘둘리고 있지만 '밥그릇'이 작아지는 잔류 단자사의 착잡함 또한 그에 못지않다. 鄭永儀 재무장관은 합전법 발표 직후 "단자사 기능은 축소된다"고 밝힌 바 있다. 그 뒤 재무부에서 흘러나온 얘기도 축소론을 확인시킨다. 기업어음콜 등 단기 금융자금 중개라는 단자사 고유업무로 영역이 대폭 축소된다는 것이다.
 전국투자금융협회는 단자사에 도매금융만을 하게 할 경우 5개사 정도만 생존할 수 있고, 기업어음할인 업무를 은행 등과 공유하면 3개로 줄어들 것으로 추정한다.
 또 단자사 정리 후 자금중개 규모(약 20조원)가 급격히 축소돼 기업들은 돈 빌리기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강조한다. 기업이 돈을 빌릴 수 있는 곳이 바뀌고 있음은 분명하다. 단자사 정리 후 올 수 있는 금융시장의 혼란을 막을 제도적 장치가 강구되어야 하다는 주장은 그래서 설득력을 갖는다.
 단자사 정리로 드러난 금융산업 개편의 신호탄은 마지막 국면에 들어선 형국이다. ㅎ은행의 한 관계자는 단자사 정리가 금융 산업 개편의 전주곡이라면 제2, 제3의 방향은 과연 어느 쪽으로 잡혀나갈지가 궁금하다고 말한다. 여전히 금융권의 관심은 앞으로 금융산업 개편 방향에 쏠려 있는 것이다. 이들은 다음 순서의 구도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어 불안할 수밖에 없다.

금융이 제 궤도 올라야 실물경제 발전
 이들의 관심은 특히 업무영역이 어떻게 조정될 것인가에 있다. 정부가 전체적인 구도를 그려놓고 제도적 장치를 내놓은 관행을 볼 때 정부가 금융산업 개편에 관한 마스터플랜을 짜놓고 그 첫째 순서로 '골치덩어리'였던 단자사부터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금융산업 개편방향에 대한 구도를 갖고 있지 않다고 재차 못박는다. 합전법 마련은 임박한 증권산업 및 금융시장 개방이라는 대외적인 환경변수를 맞아, 국내 금융기관을 대형화하는 등으로 대응하기 위해 길을 터주었을 뿐이라고 거듭 설명한다. '집안단속'이라는 것이다. 바깥으로 '빗장'을 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먼저 대내개방을 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는 일이라고도 덧붙인다.

 금융산업 개편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금리자유화 등 금융자율화가 같이 진전되어야 한다. 현재 상태에서 금융기관들로 하여금 경쟁력을 키우라는 요구는 물고기에 물도 안 주소 키우려는 처사와 다름없다. 이런 점에서 '칼로 자르기' 식은 곤란하지만 정부가 금융산업의 개편안을 마련, 유도책을 마련하는 것은 발전을 위한 중요한 첫걸음 일 수 있다.

 금융산업의 구조조정은 산업의 구조조정과 같이 단기간 되는 것은 아니다. 졸속의 ‘헤쳐 모여’는 부작용만 낳는다. 그러나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대로 가다간 안방까지 내줄지 모른다는 외국 금융사와의 경쟁도 문제이지만 금융의 비효율이 이미 뿌리가 깊어 경제의 피돌기가 여의치 않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금융이 제 궤도에 들어서야 실물경제의 발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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