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만 바뀔 아프간 분규
  • 하창섭 기자 ()
  • 승인 1992.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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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군, 내전 끝나자 민족갈등…강·온파 남북전쟁 위기



1979년 12월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친소 바브라크 카말 정권을 세우자 카불주재 미국대사관은 급히 비밀전문을 띄웠다. “…마침내 대경기는 끝났다”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남으로 세력을 뻗으려는 제정 러시아와 인도를 거쳐 북으로 식민지를 늘이려는 영국이 아프가니스탄 선점을 위한 경쟁을 벌인 19세기말 이후 냉전시대에 들어서까지 미국과 소련이 벌인 ‘대경기’가 마침내 후자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 친소 정권이 수립된 후 회교 반군들은 줄기차게 반정부 게릴라 활동을 펴왔고 그 피해는 엄청났다. 유엔의 통계에 따르면 내전 13년간 1백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전쟁으로 인한 난민도 약 5백만이 발생해 이웃 파키스탄과 이란에 피난해 있다. 침공군도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소련이 쏟아부은 전비는 1백억 달러가 넘었고 3백대 이상의 항공기가 격추 됐으며 전사자도 1만3천명에 이르렀다. 또한 살아돌아간 병사들은 이른바 ‘아프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친소정권이 세워진 지 13년이 흐른 지금, 소연방은 해체되고 나지블라 대통령도 실각한 상황에서 반군들은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고 회교정부를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반군들은 89년 2월 소련군 11만5천명이 완전히 철수할 때에도 나지블라 정권을 전복시킬 기회를 가졌으나 실패했다. 카말 정권에 이어 87년 11월 대통령에 취임한 나지블라는 소련군이 철수한 후 더욱 고삐를 죄오는 반군의 공세와 군부의 쿠데타 기도에 시달려왔다. 최근 그는 날로 가중되는 경제난에다 집권당의 내부분열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처해 있었다.

 최근 유엔이 정부 및 반군측 인사 15명으로 구성되는 과도평의회를 수립하자고 제안했고 나지블라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내전종식이 현실로 다가왔다. 유엔중재안에 따르면 15인 평의회가 구성되는 대로 나지블라는 사임하고 이어 모든 정파가 참여하는 평화회의를 통해 과도정부를 수립하도록 돼있다. 그러나 최대 반군세력인 온건파 자미아티 이슬라미(이슬람 협회)는 과도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에 참여하겠다고 나섰으나 경쟁파벌인 강경파 헤즈비 이슬라미측은 이를 거부해왔다.

 바로 이같은 반군파벌 간의 견해차로 내전이 끝난다 해도 아프가니스탄의 앞날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약 1천6백만 인구 중 다수인 푸쉬툰족(54%)을 비롯, 21개 민족에다 언어만 해도 30개나 되어 상황이 복잡하다. 내전중 종족배경이 다른 반군지도자들은 오로지 ‘꼭두정권 타도’라는 공동목표 아래 뭉쳤으나 과도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이 활발한 요즘 반군지도자들 간에 해묵은 민족갈등이 다시 터져 자칫 아프가니스탄은 또다른 내전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특히 이 나라를 수백년간 지배해온 부족인 푸쉬툰 출신의 헤즈비측과 소수민족 출신인 자미아티측은 권력배분을 놓고 한치도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자미아티측은 반군세력 중심으로 과도정부를 수립한 후 6개월 안에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를 실시하자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헤즈비측은 정부를 무조건 굴복시키고 회교원리주의 세력이 주축이 된 이슬람국을 세우는 것 외에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고 있다.

 

21개 민족, 공동의 적 상실후 갈등 심화

 두 세력이 이처럼 반목하는 까닭은 정치적 견해차 외에도 종족이 다르고 활동무대가 다른 데 원인이 있다. 헤즈비 반군은 푸쉬툰족 출신으로 카불 남부에서 활동해온 반면 자미아티는 소수민족인 타지크족·우즈베크족들이 주로 사는 북부지역을 근거지로 한다. 두 파벌 지도자의 배경도 각기 다르다. 자미아티측의 마수드 사령관은 타지크족 출신으로 북부 반군연합체인 이슬람성전협회 의장이다. 이에 반해 헤즈비 지도자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는 푸쉬툰족 출신이나 마수드만큼의 카리스마는 없다는 평이다. 다만 마수드가 소수민족 출신이기 때문에 그의 정치지도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있다.

 아프가니스탄 정정이 혼미를 거듭하고 있지만 막상 음으로 양으로 반군을 도와온 미국 파키스탄 등은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지난 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모든 회교반군에 대해 무려 20억달러어치의 무기지원을 해왔다. 역시 반군에게 무기를 대운 파키스탄이나 이란도 미국처럼 내전 당사자에게 자제를 호소하는 것이 고작이다.

 전문가들은 문제의 두 반군 파벌이 타협하지 못하고 끝내 충돌할 경우 이 나라가 또다시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다. 신정부측의 하티프 임시대통령이 최근 “정부를 반군측에 이양할 준비가 돼있다. 그러나 우선 반군 간에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밝힌 것도 이같은 우려를 나타낸 것이다. 자미아티측의 마수드 사령관은 헤즈비측의 헤크마티아르에게 협상참여를 유도하되 실패할 경우 자파 세력만으로 과도정부 수립을 강행할 가능성이 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한때 나지블라의 심복이자 우즈베크 소수민족 출신인 압둘 도스탐 장군과 연대할지 모른다. 이런 조짐이 구체화되면 헤즈비측은 2만명의 정예병사를 거느리고 즉각 전쟁을 선포할 것이 뻔하다.

 반군파벌 간의 유혈충돌을 피할 수 있는 한가닥 희망은 반군과 정부측 사이에서 활발한 접촉을 벌이고 있는 베논 세반 유엔특사의 활동에 달려있다. 아프가니스탄 내전종식을 위해 지난 4년간 노력해온 그는 이달초 15인 평의회 구성을 골자로 한 평화안을 내놓았으나 자미아트측이 거부함으로써 사실상 쓸모 없게 됐다. 그는 또 카불주재 유엔사무소에 피신중인 나지블라 전대통령의 국외망명을 주선하고 있으나 반군측이 반대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만일 유혈충돌이 벌어지면 종족 간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전쟁으로 비화할 것이 뻔하다. 북부의 소수 민족과 남부의 푸쉬툰족 간에 일종의 남북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 같은 사태발전은 자칫 독립국가연합(CIS)중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타지크와 우즈베크 공화국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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