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무덤’ 옆에 누운 ‘귀무덤’
  • 경남 사천ㆍ고명희 기자 ()
  • 승인 1992.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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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三中 스님 ‘壬辰倭亂 합장대재’ 봉행 … 12만6천여 호국영령 안식



 마침내 귀무덤의 주인공인 호국영령들은 머리무덤 옆에서 잠들었다. 조국에 돌아온 지 2년, 임진왜란 4백년 만의 일이었다.

 지난 4월22일 경남 사천군 용현면 선진리에서 ‘임란이총호국영령의분합장대재(壬亂耳塚護國英靈義墳合葬大齎)’를 봉행한 朴三中 스님(51ㆍ부산 자비사 주지)은 탈진해 있었다. 삼중 스님에게는 그의 노력으로 귀무덤의 12만6천여 영혼들이 안식하게 되었다는 한결같은 축사나. 3천여 불자들의 독경마저도 한낱 소음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삼중 스님이 귀무덤(耳塚)을 처음 발견한 것은 85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재소자 교화에 앞장서온 삼중 스님은 그때에도 재일한국인 재소자를 교화하기 위해 일본 교토에 들렀다가 豊臣秀吉의 사당 앞에서 國恥의 현장 이총을 발견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군의 귀와 코를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가져갔던 이 전리품은 교토의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어 일분을 찾는 관광객의 놀림감이 되어 있었다.

 ‘화롯불을 뒤집어쓴 듯’ 충격을 받은 삼중 스님은 86년 4월 현지에서 위령대재를 지낸 뒤 이총 영령들의 환국을 서둘렀고, 일본 불교계의 도움을 얻어 90년 4월22일에는 이총의 흙을 항아리에 담아 ‘귀무덤 영혼’을 부산으로 봉송해 자신이 주지로 있는 자비사에 모셔왔다. 그후 마땅한 안식처를 찾다가 머리무덤 韓ㆍ明軍塚을 발견해 합장하게 된 것이다.

 조ㆍ명군총은 임란때 왜군에 베인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머리무덤으로 그 넓이가 4백65평에 달한다. 최저 7천에서 최고 3만8천 수가 묻힌 이 무덤은 83년 사천문화원(원장 吳弼根)이 주변을 뒤덮고 있던 3백50여그루의 소나무를 베어내고 보존해온(사적 제80호) 국치의 또 다른 현장이다.

 

당국 반대로 ‘안장’에 머물러

 삼중 스님은 이번 행사를 위해 합장추진위원회(명예위원장 李康勛 광복회장, 위원장 尹吉重 전 국호부의장)를 구성하는 등 후손의 도리를 다하고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21일 부산 자비사에서 천도재를 마친뒤 22일 이총영령들이 꽃차에 실려 군악대와 의장대의 호의를 받으면서 조ㆍ명군총에 안착할 때까지 내내 마음이 쓰인 것도 그 때문이다.

 사천 행사장에서도 삼중 스님은 행여 정성이 모자랄까 걱정스러운 듯 끊임없이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제단만을 바라보았다. 35명의 일본진사사절단 대표 가기누마 센신 스님(일ㆍ한불교복지협회)이 “조상이 저지른 죄를 후손으로서 참회라며 사죄올린다”고 말하고 일본불교 전통의식을 거해했으며, 윤길중 전 국회 부의장은 자신이 지은 한시를 읊었다. 송서암 큰스님의 증명법사법어 순서가 있었고 부산여전의 몇몇 학생은 전통적인 작설차를 헌다하기도 했다.

 제단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삼중 스님은 이번 합장이 관계당국의 반대에 부딪혀 형식적으로는 ‘安葬’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고 안타까워 했다. 경상남도 문화재전문위원들이 사적지 원형보호 차원에서 합장불가를 주장해서 두 무덤이 하나로 합쳐지지 못한 채 겉모습은 별도의 봉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국론 분열로 자초하다시피 한 임란에서 죽음을 당한 조상들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냐”고 울분을 터뜨린 삼중 스님은 관계당국이 임란의 아픔을 새롭게 새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삼중 스님은 앞으로 이곳에 임란종합전시관을 세우는 등 성역화를 추진하겠다면서 “영혼은 모셔왔으되 껍데기는 교토에 아직 ‘문화재’로 남아 있으니 그것을 없애는 데 당국이 노력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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