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샘 공방’ 열띤 컴퓨터 공청회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3.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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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부처나 단체건 특정 정책 사안을 놓고 공청회를 한번 열려면 그야말로 진이 다 빠진다. 주제 발표자 섭외하랴, 일반 참석자에게 초청장 보내랴, 행사장 단장하랴 하다 보면 정작 공청회를 왜 여는지 그 주제를 잊어버릴 지경이 되고 만다.

 그러나 청와대 정무비서실은 한 사람의 인력으로 1주일에 한번씩 공청회를 치러낸다 물론 컴퓨터 공청회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정무비서실은 미리 설정한 공청회 주제와 공청회 기간을 하이텔 게시판에 올리고 난 뒤, 이 기간에 들어온 의견을 취합하기만 하면 된다. 참여하는 사람들은 컴퓨터 화면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제시한 의견을 즉각 볼 수 있기 때문에, 컴퓨터 화면을 통한 열띤 공방전도 가능하다.

 이제까지 열린 두 번의 공청회 주제는 각각 ‘김영삼 대통령 취임 1백일 평가’(6월1일~6월7일) ‘조선총독부 청사(현 국립중앙박물관) 건물 철거’였는데, 여기에 모두 1백11명이 참여했다.

‘과거청산하자’는 의견 가장 많아
 ‘1백일 평가’는 ‘대통령에게 바란다’라는 통신란에서도 많이 다루어진 주제여서 그런지 30여명 정도만이 참여했다. 게다가 주제의 포괄성 때문에 쟁점을 둘러싼 공방전보다는 학원 문제, 교육 문제, 국가보안법 문제 등 저마다의 관심사를 개진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청년층이 대부분인 만큼 역시 가장 많이 나온 의견은 ‘성공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광주항쟁 진상 규명 등 과거를 반드시 청산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열린 ‘조선총독부 청사건물 철거’ 공청회는 1주일 동안 80여 명이 참여하는 열기 속에서 치러졌다. 한 철거 반대론자가 “부끄러운 역사가 후세의 엄청남 귀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에 대한 자신감만 있으면 우리의 오욕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역사를 이끌어가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실증적인 해답을 줄 수 있으리아 생각합니다”라는 첫 의견을 제시하자 격렬한 반대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일본인들의 자랑스러운 건물이 우리나라 서울의 삼장부에 박혀 있으니 자존심도 없는가”“그 건물이 어떤 건물인가. 우리 역사에 오욕을 남긴 건물이 아닌가”“당연히 철거돼야 한다. 산산이 부숴 버려야 한다”라는 의견이 그것이다.

 다시 “총독부 건물이라는 이유만으로 건물을 허무는 것은 합당치 않다. 건물을 허문다고 해서 일제 36년을 역사에서 지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건물이 우리의 수치스러운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장소로 쓰여지길 바란다”라는 철거 반대쪽의 의견이 제시되면서, 첫날 공청회는 밤을 넘겨 다음날 새벽 4시(컴퓨터 화면에 의견이 제시된 시각)까지 진행됐다.

 1주일 동안 비슷비슷한 철거와 반대 논리를 펴며 맹렬하게 공방전을 벌이는 가운데 일부 참여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각종 문헌을 제시하기도 했다. 특히 한 토론 참여자는 90년 한 계간지에 실렸던 <총독부건물 철저 해부>라는 꼼꼼한 고증 문헌과 경복궁 단면도가 실린 글을 올리면서 철거론을 주장해 다른 토론자들을 압도했다.

 그런가 하면 “저희들이 멋대로 지어놓은 것이니 비싼 돈 들어가는 철거도 그들이 직접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힘이 없어서 그런 요구를 할 수 있을는지 걱정이다.” “총독부 건물을 철거해서 독립기념관 보도 블록으로 새용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 만족을 깔아뭉갰던 것처럼 이젠 우리가 그들이 세운 건물을 뜯어 그 위를 깔아뭉개고 다녀야 한다”라는 과격한 주장도 나왔다.

 사실상 컴퓨터 통신망을 이용한 가입자간의 의견 교환이나 토론은 컴퓨터 세대들에게는 낯선 일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오히려 청와대측의 발상 전환이 ‘신기한 일’일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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