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대필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김 당 기자 ()
  • 승인 1993.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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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위,3천쪽 총자료집 발간으로 ‘진실’규명 기대 재심 운동 본격화할 듯 ․ ․ ․ 현정부가 나설 가능성도

유서대필 사건, 자살방조 사건,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2년전 이맘때 강기훈(당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총무부장)이라는 운동권 청년이 김기설(전민련 사회부장)이라는 동료에게 유서를 ‘대필’해 주면서 죽으라고 부추겨 자살(분신후 투신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구속된 사건을 언론은 이렇게 불렀다.

 언론은 또한 강경대군(당시 명지대 1학년)의 죽음 이후 잇단 분신으로 초래된 시국 상황을 ‘6공 최대의 위기’라고 불렀다. 사나흘 간격으로 여섯명의 젊은이가 죽음으로 정권에 항거한 전례없는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이들이 분신 ․ 투신 자살하기 전에 외친 구호나 남긴 유서는 달랐지만 그 목표는 한결같앗다. “노태우 정권 퇴진하라!” 그야말로 노태우 정권이 퇴진할 때까지 전국에서 분신과 투신이 잇따를 기세였다. 이 사건은 바로 그 최대의 위기 속에서 터졌다.

형사 사건 자료집 발간은 처음
 그후 2년 만에 노태우 정권이 물러나고 이른바 문민 정권이 들어선 지금 국민들에게 그 사건에 대한 역사적 심판을 요청하는 ‘사건’이 전개되고 있다. 그 사건이란 다름 아닌 ‘유서사건 강기훈씨 무죄석방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위원장 함세웅 신부)에서 《유서사건 총자료집》(이하 자료집)을 발간한다는 사실이다. 한 형사사건에 대한 자료집이 나오는 것이 ‘사건’일 수 있는 까닭은 우선 사법사상 전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강씨 사건의 변호인 중 한 사람인 김창국 변호사(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는 “우리나라 사법 역사에서 한 사건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수집해 역사 기록으로 남긴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크지만 특히 이를 객관성 있게 제시함으로써 역사의 평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가했다.

 7월2일 정식으로 출간될 이 자료집의 총분량은 무려 3천쪽(4×6배판)에 이른다. 공대위에 따르면 이자료집은 91년 5월에 발생하여 92년 7월 24일에 대법원 확정판결로 ‘끝난’ 자살방조 사건에 관한 모든 자료를 집대성한 것이다. 즉 사건 발생에서부터 강기훈씨가 기소되기까지의 모든 수사기록, 공판 조서, 논고문, 변론 요지, 판결문, 법원에 제출된 각종 참고자료 등 공식 문서는 물론, 이 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 1천여 점과 이 사건과 관련된 각종 성명서 수십점 그리고 92년 2월에 터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뇌물감정사건’에 관한 주요 기록까지 총망라되어 있다.

 자료집 발간의 실무책임자인 서준식씨(전국연합 인권위원장)는 이 의의를 “법적 ․ 제도적 방법에 의해 강기훈씨의 원죄를 벗길길이 거의 없어진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사건에 관한 모든 기록을 국민의 양식 앞에 공개함으로써 강씨의 무죄와 명예회복을 얻어내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다”라고 밝힌다. 공대위가 이처럼 자신감을 갖는 것은 지난해 대법원에서 유죄확정 판결이 난 날에 보도된 일부 언론의 기사처럼 ‘유서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공대위는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입장이다. 즉 자료집 발간을 계기로 이 사건의 실체와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에게 판단의 근거를 제시한 뒤 본격적인 ‘재심 운동’을 벌여나가겠다는 처지,형편,견해,주장이다.

 공대위의 기대대로 자료집 발간이 여론을 환기시켜 재심을 청구할 만한 사유가 발생하는 사건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전과 다른 유리한 여건이 조성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우선 자료집 발간과 더불어 이 사건에 대한 각계의 관심과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이어질 전망이다. 이와 관련해 민족사진연구소(소장 박용수)에서는 6개월 전부터 이 사건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비디오 기록물을 제작해 오고 있다. 편집 과정을 남겨두고 있는 이 다큐멘터리 드라마에는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 사건 재판에서 결정적인 증인이 되었던 홍성은씨(강기훈씨의 대학 후배)의 최근 진술이 포함돼 있다. 그동안 언론과의 접촉을 극구 피해온 홍씨는 당시의 강압적인 수사 분위기와 변호인측의 증인신청 요구에 검사가 법정증인 출두를 만류한 사실 같은 중요한 진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명곤씨, 영화 제작에 깊은 관심
 또 최근 연극 ․ 영화계에서도 이 사건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 사건 발생 당시의 급박한 시국상황, 명동성당에서의 필적공방과 긴장감 감도는 대치, 사건의 진상을 둘러싼 검찰과 재야의 ‘조작’ 공방전, 팽팽한 재판과정,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비리 사건의 돌출 등 이 사건을 전후로 한 일련의 과정이 한편의 드라마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최근 김명곤씨(연극 ․ 영화인)도 공대위측에 이 사건을 가지고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법정 드라마를 제작하겠다는 의사를 강하게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공대위측은 이 사건이 정치적으로 해결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즉 이 사건이 본질적으로 6공의 위기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던 만큼 새 정부가 개혁 의지 실현의 일환으로 이 사건을 매듭지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지도자들이 그동안 이 사건 진행 과정에 의혹을 품고 공정한 수사와 재판 및 석방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해온 만큼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6공 최대의 시국사건’ 관련자인 강기훈씨(남은 형기 1년)를 붙들어 놓는 것 자체가 정부로서는 큰 부담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대위는 정치적 해결 가능성과는 별도로 강씨와 재야에 대한 적극적인 명예회복과, 나아가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검찰권 및 사법부의 정치적 독립을 꾀한다는 차원에서 재심운동과 병행하는 법적인 대응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공대위의 한 관계자는 공대위에 참여하는 변호사들과의 법률적 검토를 거쳐 △당시 증인의 법정 출두를 방해하거나 재판에 결정적인 필적 증거를 은폐한 혐의가 있는 검사를 고발하는 방법 △재판부가 유죄판결의 결정적 근거로 삼은 김형영씨(전 국과수 문서분석실장)의 필적 감정과 관련해 김씨를 위증죄로 고발하는 방법 △그리고 자료집을 토대로 이 사건을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소하는 방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계획이다.

김형영씨 위증죄 성립 여부가 관건
 현재 공대위 변호사들은 검찰과 직접적인 전면전을 벌이는 것보다는 이 사건의 2심 진행 과정에서 다른 감정비리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바 있는 김형영씨를 위증혐의로 고발하는 방법을 고려하고 있다. 어느 쪽이건 유죄판결을 받으면 명백한 재심 청구 사유가 되나 검찰보다는 김씨의 위증죄 유죄판결을 끌어내는 쪽이 상대적으로 승산이 더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어느 쪽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로 보인다. 김창국 변호사도 “김형영씨를 위증죄로 고발하더라도 아직까지는 사법부가 국과수의 공신력(감정)을 뒤집기는 어려운 형편이고, 우선 유서 사건의 당사자로서 기소권을 쥐고 있는 검찰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소를 할지도 의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편 공대위 관계자들은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이 사건에 대한 심리가 받아들여지면 국내에서 뒤집힐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빈에서 열리는 유엔 인권회의에 비정부단체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고 있는 서준식씨는, 이른바 유서 사건에 대한 검찰의 소추가 인권옹호와 실체적 진실의 발견이라는 형사소추의 대원칙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소하는 것이 가장 승산이 높다고 보고 있다. 서씨는 이 사건에 대한 검찰의 형사소추 절차상의 문제점으로 △강압수사와 증거보전 절차 △공소장 불비 △유서 대필의 자살방조 성립 여부 세가지를 지적한다.

 우선 검찰이 김기설씨의 여자친구로 단순한 참고인에 불과한 홍성은씨를 연행해 나흘이상 강압적인 수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격심한 심리적 동요와 갈등을 겪은 홍씨의 일부 진술에 대해 비밀리에 증거보전 절차를 했다는 것이다. 서씨는 강압수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방적인 증거보전을 상대방과의 대질을 허용하지 않고서 증거로 인정해버리는 것은 외국의 형사소송 절차에 비추어 명백한 불법 수사라고 주장했다.

 또 설령 강기훈씨가 유서를 대신 써주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형법상의 자살방조죄로 성립하느냐의 여부인데, 결과적으로는 자살방조죄가 성립한 최초의 판례가 된 셈이다. 그러나 3회에 걸쳐 강씨를 양심수로 지정해 구명운동을 편 국제앰네스티 같은 국제 인권단체에서 보인 이 사건에 대한 첫 반응은 “유서대필 혐의로 자살방조죄를 적용하는 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한편 검찰이 공소장에 기재한 공소사실에 구체적인 내용을 특정해 명시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당시 법원 쪽에서 오히려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올 만큼 기소 여부의 관건이었다. 형사소송법에는 “공소사실 기재는 범죄의 시일 ․ 장소와 방법을 명시하여 사실을 특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제254조 제4항)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검찰은 공소사실에 ‘91.4.27경부터 같은 5.8까지 어느날 서울 어느곳에서’라고밖에 쓰지 못한 채 유서대필의 구체적 방법이나 자살방조의 구체적 과정을 밝혀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아리송한 말로 검찰 공소의 적법성을 인정해 주었다. 정작 수사 지휘자인 강신욱 부장검사(서울지검 강력부)는 이 사건을 기소하면서 “범죄 일시와 장소도 밝혀내지 못한 채 공소장을 작성하고 이미 보도된 내용으로 발표문을 쓰려니 부끄러워 사표을 쓰고 싶은 심정이다”라고 말했었다.

범죄 시간 .장소 없는 공소장
 결국 검찰 쪽에서 부끄러워한 공소장음 1심부터 상고심까지 재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 셈이다. 당시 1심 재판장인 노원욱 부장판사(현 변호사)는 이와 관련해 “대필 현장의 목격자가 없는 상황에서는 일시나 장소 또는 작성 방법에 관한 구체적인 기재가 없더라도 그 유서가 대필되었는지 여부가 범죄 성립의 핵심을 이루고 또 당시 비슷한 대법원 판례도 있었다”면서 그와 관련해“검찰쪽의 협조요청 같은 것은 없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지난 4월 27일 대법원 제2부(재판장 윤 관 대법관)에서는 비슷한 사건(사건 번호 93도 481)에 대해 정반대의 판례를 남겨 주목된다. 사문서 위조 ․ 변조 및 동행사죄에 대한 이 사건에서 재판부는 “공소장에 기재된 공소사실은 법원에 대해 심판청구의 법위를 특정함과 아울러 피고인에 대하여 방어의 법위를 특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므로, 공소장에 공소사실을 기재함에 있어서는 공소사실의 동일성이 충분히 인식될 수 있는 정도로 법죄의 시일 ․ 장소와 방법을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되는 것이다”라는 판결요지를 제시하고 있다.

 3천쪽에 이르는 이 방대한 자료집이 갖는 중요한 미덕 중의 하나는 이 사건의 발생 전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검찰의 수사 과정에서 강기훈씨와 그밖의 많은 참고인들이 어떤 태도로 무슨 말을 했는지, 번호인단과 검찰은 어떤 놀거로 어떤 주장을 했는지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검찰로 상징되는 국가권력과 전민련으로 상징되는 재야의 대결구도라는 공신력과 도덕성의 대결에서, 언론 매체을 통해 이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란 결국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가졌었다. 이 사건을 보는 시각이나 논조가 신문마다 달랐고, 특히 초기에는 같은 신문이라도 ‘명동 출입 기자’(당시 재야에서 농성을 하면서 필적공방을 벌인 명동성당을 취재한 경찰 출입 기자)가 썼느냐 아니면 검찰 출입 기자가 썼느냐에 따라 크게 다르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이른바 ‘6공 최대의 위기상황’속에서 검찰은 정권을 지키려 했고 재냐는 그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양쪽 다 언론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안간힘을 기울였으며 분명히 어느 한쪽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5월8일 김기설씨가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 후 투신자살한 것은 이른바 분신 정국의 네 번째 항거였다. <조선일보>에 김지하 시인의 기고문(‘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에 실린 지 사흘 뒤였다. 김시인의 글은 본질적으로 ‘살인 정국’을 ‘활인 정국’ 으로 바꾸는 생명운동의 당위성을 역설한 것이지만 ‘죽음을 무기로 하는 모든 세력 거부’(부제)라는 표현 등으로 운동권을 자극했다.

조작 수사인가, 예단 수사인가
 여섯건의 분실 ․ 자살 사건 중 기기설 사건에서 특이한 점은 김씨가 사전에 자신의 자살 결심을 주위에 알렸고, 당시 연세대에 본부를 둔 범국민대책회의에 참여한 전민련 관계자들이 이를 전해 듣고 자살을 막으려고 동분서주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검찰 쪽의 특이점은 분신 직후 현장 조사를 통해 사실증거를 확보하기에 앞서 언론에 ‘배후 세력에 의한 분실자살 조종’이라는 예단을 앞질러 발표했다는 점이다. 재야 쪽은 당시 정구영 검찰총장의 신속한 배후 수사 지시에 대해 지금도 두가지 시각을 보이도 있다.

 하나는 전날의 당정회의에서 방침이 정해져 검찰이 조작을 염두에 둔 각본에 의한 수사를 시작했다는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상 검찰이 예단에 의한 억지 수사를 벌였다는 시각이다. 양쪽 다 도청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즉 ‘범국민대책회의’라는 6공 최대의 반정부 조직이 한곳(연세대)에 모여 있는 비상한 시국에 경찰이나 정보조직에서 도청을 안했을 리 없고, 그 과정에서 김씨의 자살 결심을 전해들은 전민련 관계자들이 김씨를 찾으려고 수소문하는 전화 내용을 들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한 검사는 “그 사건은 강력부 내에서 도청이라도 해야지 못해먹겠다는 말이 나올 만큼 굉장히 어렵고 힘든 수사였다. 우리가 도청을 했더라면 그렇게 힘들게 수사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로 도청 사실을 부인했다.

 검찰은 초지일관 김기설씨의 확인된 필체는 정자체(유서는 흘림체)뿐이라는 논리를 폈다. 국과수 김형영 문서분석실장에게 의뢰한 4종의 1차 필적감정 결과(5월15일)는 △유서=전민련 사회국 업무일지 필적 △주민등록 분실신고서=책 속 표지 필적 △우서와 분실신고서, 속표지 필적은 ‘異同여부 논단 불가’ 식이었다. 그러나 검찰은 이 결과를 자의적으로 ‘상이한 필적’으로 해석해 “유서와 업무일지 필적은 같았으나 김기설씨가 누나에게 선물한 책 표지 필적과는 달랐다”면서 언론에 유서(흘림체)와 책 속표지 필적을 공개했다. 검찰이 연도를 밝히지 않은 이 속표지 필적은 10년 전에 쓰여진 글씨였다.

 필적 세 종류에 대한 국과수 2차 감정 결과는 간단했다. 유서=김기설씨가 홍성은씨에게 준 낙서메모=강기훈씨가 수사기관에서 작성한 진술서(85년). 5월18일 강기훈씨가 명동성당 농성투쟁에 합류한 뒤부터 시작된 필적 공방에서 검찰의 입각점은 끝까지 국과수의 1,2차 감정결과였다. 즉 “가족이 내놓은 김기설 필적(정자체)이 유서의 필적(흘리체)과 다르기 때문에 유서는 김기설이 쓴 것이 아니다. 유서와 강기훈의 진술서 필적은 같다. 따라서 유서는 강기훈이 썼다”라는 것이었다. 이같은 논리를 고집한 검찰은 사건이 확대되면서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20여종이나 되는 김씨 생전의 필적을 모조리 ‘강기훈이 조작한 것’으로 몰지 않을 수 없는 곤혹스러움에 빠졌다.

피고측 법정증언 배척하고 내린 판결
 “강기훈이 홍길동이란 말인가. 아니면 그 모두가 공범자라는 말인가.” 검찰이 숭의여전 ․ 성남 ․ 원주 ․ 수원 등지에서 많은 사람이 가져온 김기설 필적을 모두 조작한 것이라고 일축하자 명동성당에서는 이런 말이 튀어 나왔다. 그러나 검찰은 5월 20일 기자회견후 검찰에 제출한 김씨의 수첩에 대해서도 조작된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와 관련해 이석태 변호사는 상고이유 보충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이 사건에서 변호인은 39명의 증인을 신청했으며 그 중 20여명이 법정에서 증언했다. 이들 가운데 죽기 바로 몇시간 전에 마지막으로 자살을 만류했던 이보은씨 등 5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이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강기훈씨를 만나거나 본 적도 없는 생면부지의 학생, 시민, 사원, 기자 등 연령층도 다르고 직업도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이 우연히 소지하게 된 필적 자료를 통해서 또는 각자의 경험을 토대로 이 사건 유서는 김기설씨가 쓴 것이 틀림없다고 증언하고 있다. 원심판결은 이들의 증언을 모두 배척하고 이 사건 유서는 피고인이 썼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법정증언은 모두 거짓인가? 피고인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누구를 위하여, 무엇 때문에 위증으로 인한 형사처벌을 무릅쓰고, 저 살기등등한 법정에 와서 증언을 한 것인가.”

 변호인측은 2심 재판 말미에 검찰의 필적은폐를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수첩)를 우연히 찾게 된다. 이 수첩은 5월 13일께 김기설씨의 필적을 찾으려고 김씨가 근무했던 군부대를 찾은 수사 검사 2명에게 서기선 하사가 준 것이었다. 이 수첩에는 김씨가 제대할 무렵에 서하사에게 적어준 김씨의 주소가 적혀있었다. 이 필적은 그동안 이 사건 수사기록은 물론 언론에도 일절 공개되지 않다가 당시 필적 수집에 동행했다가 제대후 개업한 이찬진 변호사의 공개로 드러나게 된 김씨의 필적이었다. 이는 김형영 실장이 두사람의 필적 간에 대비되는 특징(강기훈은 모음 세로획이 받침 ‘ㄴ’자를 침범하고 김기설은 침범하지 않는다)에 근거한 감정을 뒤엎는 것이었다. 즉 김기설씨의 이 주소 필적에서는 ‘ㄴ’자를 침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호인측은 더구나 이 필적이 검찰이 수집해 내놓은 김기설씨 필적 중에서 김씨가 쓰는 것을 본 목격자(서기선 등)가 있는 유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이를 감정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인 은폐라고 보고 있다.

 재판에서 이 사건에 대한 유죄인정의 직접증거로 들고 있는 것은 김형영씨가 작성한 감정서이다. 김형영씨는 유서와 김기설씨의 필적이 다르다고 감정한 반면, 강기훈의 필적과는 같다고 감정했다. 또 김씨는 김기설씨 수첩 절취선 부분의 불일치 감정과 업무일지 조작논리를 뒷받침하는 감정을 했다. 그리고 이같은 김씨의 감정은 재판에서 채용된 유일무이한 증거가 되었다. 물론 일본인 필적감정가 오니시의 증언이나, 그의 감정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반대되는 모든 증거는 판결에서 배척되었다.

‘돈은 받았으나 허위감정 안했다’
 따라서 역으로 경형영씨를 위증죄로 고발해 유죄판결을 끌어내면 명백한 재심 사유가 생긴다. 김씨는 92년 2월 뇌물수수 등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고, 당시 MBC는 김씨가 뇌물을 받고 허위감정을 해왔다는 취지로 보도했다.

 김형영씨의 뇌물수수 및 허위감정 여부는 당시 유서 사건과 관련해 초미의 관심사였다. 물론 재판결과는 유죄(집행유예)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돈은 받았지만 허위감정은 안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한 검사는 매우 어려운 사건이었다고 강조한다. 연일 필적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스스로도 헷갈리는 때가 많았다고 술회한다. 이 사건은 본질적으로 ‘무덤 속의 진실’을 파헤치는 사건이었고 어쩌면 실체가 없는 유령과의 싸움이었다. 검찰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가 가진 방어권은 오로지 “안썼다”라고 되뇔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김기설씨 본인의 필적이라면 그것은 죽은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정황만으로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와 더불어 풀리지 않는 의문 하나는 그보다 앞선 시기에 유죄를 받거나 그보다 더 중형을 받은 시국사범들이 문민 정부 출범 이후 대화합의 차원에서 다들 옥문을 나섰는데도 유독 강기훈씨만 지난 3 ․ 6 석방조처에서도, 석탄일 석방에서도 제외되었다. 검찰의 공신력과 재야의 도덕성이 겨룬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걸까. 아니면 그가 ‘악마’이기 때문일까.

 꼭 2젼전 이맘때 당시 전재기 검사장은 서울지검 부장검사 회의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훈시했다. “강씨가 유서를 대필한 확실한 범인이며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는 동안 각종 증거자료를 조작했고, 거짓말을 해 천주교 신부와 순진한 기독교인들을 속이고 있는 교활한 인물 ․ ․ ․ 중략 ․ ․ ․ 세상에는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고 있다. 검찰은 국가 최고권력 집행기관의 자격으로서 이런 ‘악마’를 응징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당시 서울지검은 이런 훈시 내용을 내부회람용 공문에 담아 전체 검사와 직원에게 회람시킴으로써 수사가 진행중인 사건에 대해 전 검찰직원이 강씨를 유서대필 진접으로 확신한 상태에서 동요 없이 수사에 임하도록 당부했다.

 당시 이 사건의 지휘계통은 김기춘 법무부장과, 정구영 검찰총장, 전재개 서울지검장으로 이어졌다. ‘미스터 법대로’라는 별명으로 통했던 김기촌씨는 대선 때의 부산복집 사건으로 재판에 계류중이고, 유서 사건을 총지휘 했던 전재기 검사장은 슬롯 머신 배후 혐의에 연루돼 옷을 벗었다. 또 당시 이 사건을 맡았던 강력부 수사검사 1명도 슬롯 머신 사건으로 검찰에서 조사를 받았다. 혹시 우리가 악마와 천사가 서로 뒤바뀐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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