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인종의 용광로 터졌다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2.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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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본노 '善의 제국' 자만에 타격'제2의 마셜플랜'만이 재발 방지



미국 대통령이 연단 앞에서 기자회견을 할 때 연단 가운데 겉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독수리가 왼쪽 발톱엔 화살을, 오른쪽 발톱엔 올리브 가지를 움켜쥔 모양의 문양이 있다. 독수리 머리 위를 찬찬히 살펴보면 "다수에서 하나로"(E Pluribus Unum)라는 문구가 있다. 1782년 미국 의회의 승인을 거쳐 國章으로 정해진 독수리와 이 라틴 문구는 미국처럼 많은 인종이 모여 사는 나라엔 더없이 필요한 상징임에 틀림없다. 멀리는 17세기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의 후손들로부터 근세엔 물밀듯 밀려든 세계 곳곳의 이민들까지 다양한 인종이 모여 건설한 미국 사회는 지난 4월29일 터진 흑백갈등으로 또다시 휘청거리고 있다. 더욱이 사태진압을 위해 투입된 군의 지휘를 흑인인 콜린 파월 함참의장이 맡은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흑인 청년 로드니 킹을 폭행해 기소된 백인경관 4명이 무죄평결을 받은 게 발단이 된 미국 전역의 흑인소요는 3일 현재 공식집계로 49명의 사망자와 2천1백16명의 부상자, 5억5천만달러에 이르는 재산피해 등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미국은 물질적 피해보다 훨씬 큰 도덕적 상처를 입었다. 다른 나라에 대해 민주주의법치인권을 주창하고 요구해온 미국 정부는 킹사건에서 인구의 12%나 되는 소수인종의 인권을 무시하는 행동을 극명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한때 옛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비판하며 민주주의와 인권의 '전도사'역을 자처한 미국의 일그러진 모습이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불황보수화 경향 흑인 좌절감 증폭

로드니 킹사건은 로스앤젤레스 흑인폭동의 기폭제 역활을 했을 뿐 그 불씨는 미국 사회구조 자체 속에 뿌리깊게 도사리고 있었다. 단지 표면적법적 인종차별이 없을 뿐 경제적 차별은 대단히 심각해 이에 따른 갈등은 언제든 폭발할 소지를 안고 있었다. 최근 들어 아이사계에 대한 폭력이 급속히 늘어가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번 사태는 흑인을 비롯한 소수인종이 그동안 쌓이고 쌓인 분노와 좌절을 로드니 킹사건을 계기로 폭발시켜 일어났을 뿐이다.

로스앤젤레스 소요가 불과 수일만에 미국 전역의 주요 도시로 확산된 것도 짚고넘어갈 사항이다. 흑인 인구의 60%는 거대한 빈민촌을 형성해 대도시에 산다. 그곳은 범죄의 온상이 돼왔다. 빈곤과 실업에 허덕이는 일들은 최근 2~3년 새 계속돼온 경기침체와 급속히 확산되는 보수화 경향으로 더욱 깊은 좌절감과 소외감을 느껴왔다.

오늘날 미국이 안고 있는 인종갈등은 바로 도시빈민가의 흑인문제와 직접 관계가 있다. 미국 정부는 지난 87년만 해도 빈곤에 시달리는 이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사회복지비로 5천2백억달러를 쏟아부었다. 문제는 마땅한 일자리도 없는데 흑인들이 자꾸 도시로 몰려드는 데 있다. 미 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주요 대도시의 흑인비율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예로 1950년 디트로이트의 흑인비율은 16.4%였으나 90년엔 무려 75.7%로 뛰었다. 미국의 4개 권역의 흑인 빈곤율은 백인에 비해 평균 6~7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대도시에 사는 흑인은 백인과 거의 융화하지 못한 채 흑인 울타리 안에서 소외감을 느끼며 살고 있다. 미국 도시 중 가장 인종구분이 뚜렷하다는 시카고의 경우 백인은 대부분 교외에 살고 흑인은 도심을 중심으로 빈민촌을 이루어 흑백이 서로 외면하는 실정이다. 시카고 남쪽의 흑인 거주지역은 파리시보다 큰 1백28㎢에 이른다.

흑인 등 소수인종에게 좌절감을 안긴 또 다른 요인은 미국 사회에 거세게 일고 있는 보수주의 물결이다. 80년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자유경쟁의 원리'를 내세우며 고용쿼터제나 직업훈련제 등 주로 흑인 빈곤층의 권익을 신장시키는 민권법안이 부결됐다. 백인 우월주의자인 데이비드 듀크가 루이지애나 주지사선거에서 뜻밖의 상세를 보인 것이나, 또 다른 백인 우월주의자인 패트릭 뷰캐넌이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는 것도 최근 미국 내 보수화 물결을 탔기 때문이다.

 

흑인 40%, 맥인의 '흑인말살 음모설' 믿어

이러한 배경 속에서 흑백간의 생활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민권운동이 시작된지 30년이 넘었지만 흑인의 평균소득은 백인의 57%에 불과하다. 지난해 흑인의 실업률은 백인의 2배인 12.4%였다. 물론 일부 중산층 흑인 가운데는 소득이 높아지면서 백인과 비슷한 수준에 오른 사람도 있다. 연소득 5만달러를 웃도는 흑인 중류가정이 1960년에는 10명당 1명이었으나 지금은 3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1천3백만 흑인 중 9백80만명이 여전히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흑인사회 일각에선 흑인이 빈곤과 마약범죄의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데도 정부가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 배경에는 심상치 않은 '음모'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고질적 병폐를 통해 흑인의 씨를 말리려는 게 아니냐하는 것이다. 실제로 흑인의 40%가 이 음모설을 믿는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다.

이번 흑인폭동에 흑인뿐 아니라 중남미계 사람들과 10대의 백인들까지 가세한 것은 소외계층의 불만이 어디까지 와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로스앤젤레스만 보더라도 전체 인구 1천2백만명 중 스페인계가 39.9%로 흑인 12.8%, 아시아계 12%보다 훨씬 많다.

흑인지도자들은 위험수위에 이른 흑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권이 '제2의 마셜플랜'을 강구해야 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 그라나 민주당 클린턴 후보나 공화당 부시 대통령은 이번 흑인폭동을 놓고 책임론만 들먹거리고 있다. 인종문제에 대한 백인의 시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폭동은 일단 진정국면에 들어섰으나 흑인들의 분노와 좌절은 사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정치적 핵폭탄'으로 '선의 제국'임을 자처해온 미국을 위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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