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들, 홀로서야 한다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2.05.2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뿌리 의식'이 현지동화 걸림돌…올바른 교민정책 요망


 엄청난 피해를 입은 로스앤젤레스의 우리 교포를 두고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마치 시집보낸 딸을 보는 심정과 같다"고 말했다. 시집간 딸에게 설령 안 좋은 일이 생겨도 친정은 저만치 있듯이, 대부분 미국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재미교포의 사정이야 딱하지만 그렇다고 '친정'인 정부가 '시집'인 미국 정부에 대해 섣불리 속마음을 드러낼 형편이 아니다. 자칫 내정간섭이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흑인 소요가 가라앉기 무섭게 정부는 정부대로, 각 정당은 정당대로 대표단을 로스앤젤레스 현지에 보내 요란한 '위로행사'를 폈다.


미국 시민권을 가졌다 해도 한 핏줄인 교포의 딱한 사정을 나몰라라 할 수 없는 게 정부의 고민이고, 정치권의 고민이다. 그러나 국제법으로 보면 엄연히 제3국인 미국에서 일어난 '국내문제'이니 이를 두고 정부나 정치권은 좀더 합리적으로 대응해야 했다. 로스앤젤레스 한국 총영사관에 근무하는 한 간부는 "자칫 본국 정부나 정치인들의 과잉개입으로 로스앤젤레스 시당국과 주지사 등이 피해보상에 소극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우려했다. 보다 합리적인 대응의 필요성을 함축한 말이었다. 한국 정부가 개입하면 할수록 사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외무부의 한 고위간부도 "한 · 미 관계가 나쁠 때 이같은 일이 터졌으면 과거 '코리아게이트'사건처럼 외교마찰의 소지도 있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최근 허승 외무부 2차관보가 이끄는 조사단이 현지를 다녀온 주목적이 "미국 정부를 상대로 담판을 하러 간 것이 아니라 진상조사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부 대표단은 로스앤젤레스에 머무르는 동안 토머스 브래들리 시장은 물론 피트 윌슨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만나 피해교민의 보상문제를 거론했다가 거부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정부와 미국 국내문제를 놓고 우리 영토 안에서 일어난 일을 담판하는 듯한 인상을 준 것이다. 게다가 일부 정치인들의 요란한 나들이는 다분히 금년 대통령 선거를 염두에 둔 듯한 것이어서 뒷맛이 개운치 않다.


정부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많은 사람이 오히려 미국시민으로 살아가는 교포들의 자립심을 저상하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귀소의식 때문에 제대로 현지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교포들을 더욱 고국에 기대도록 만든다고 지적한다. 정부가 본의 아니게 교포들이 현지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는 것을 도와주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하는 것이 아니냐하는 걱정이다. 현행 국적법에 따르면 우리 국민은 일단 남의 나라 시민권을 갖는 순간 한국 국적을 잃게 된다. 정부는 다른 국적을 취득한 사람이 그 나라 사람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도록 지원하는 것을 정책목표로 삼는다. 해외동포의 업무를 주관하고 있는 외무부 영사교민국 관계자들은 대 교민정책의 목적은 "교포들이 거주국 문화에 적응하고 모범적인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교포들이 모범적으로 생활하면 그것이 바로 국위선양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같은 방침에 충실해왔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많다.


정부가 교포들이 거주국 사회나 문화를 흡수하도록 장려하기보다 '한국의 얼'을 심기에 급급한 것이 아니냐 하는 물음이다. 한민족으로서의 유별난 민족성을 지키는 것을 자랑삼으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교민정책에 따라 한인학교를 많이 세운 것은 좋지만 이 때문에 현지 교포 중에는 한국말도 영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이른바 '반쪽언어' 세대가 나오고 있다. 교포 2~3세도 이제는 일본계 교민들처럼 완전한 미국시민으로 인정받길 원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어찌보면 정부가 오히려 교포들의 현지동화에 '걸림돌'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현지 영사관이나 대사관은 마치 본국의 행정관청처럼 되어 교포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군림'해왔다는 비판도 받는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엔 반체제 인사의 감시까지 맡아 한마디로 '감독관청'이란 인상을 강하게 심었다. 구서독의 우리 공관소속기관원들이 반한인사들을 납치하여 큰 물의를 빚은 동백림 사건은 그 단적인 예다.

 

"영주권 취득하되, 시민권은 안 따겠다"

 우리 교포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뿌리에 대한 의식이 다른 어느 민족보다 강한 나머지 현지문화를 섭취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문화를 심는데 힘을 쏟는다. 무리를 지어 각종 한인단체를 만든 탓에 거주국 사람들과 융화를 하지 못한다. 우리보다 이민의 역사가 긴 중국이나 일본 사람들이 그 사회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사회에 크게 기여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로스앤젤레스의 한인촌만 보더라도 사회조직이 1백50개, 동창회가 86개, 교회가 5백개, 사찰이 18개, 교포신문이 32개, 텔레비전 방송국 3개와 라디오 방송국 1개가 있다. 이쯤 되면 미국시민권을 가져도 영어 한마디 하지 않고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셈이다. 이처럼 이국 속의 한인촌을 만들어 살면서 귀속의식까지 발휘하여 영주권은 취득하되 시민권은 따지 않으려는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정부 관계자들은 약 1백40만명의 재미교포 중 시민권을 취득한 사람은 불과 20% 미만일 것으로 믿고 있다. 영주권만 따면 교포들이 생활하고 경제활동하는 데 큰불편이 없다고 한다. 시민권을 취득할 경우 거주국의 국적을 가지게 되므로 피선거권 등 정치적 권리를 누리게 된다. 그렇지만 재미교포 중 극히 소수만이 시민권을 갖고 있다. 이는 교포사회의 정치적 영향력을 미미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힌다. 미국 의회를 비롯하여 사회 곳곳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일본 교포들과 대조를 보인다. 현지 사회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거주국 시민권을 따는 게 필요하다. 그러나 거주국 시민권을 따면 한국 국적을 자동 상실하게되는 것이 싫어서 교포들은 본국 정부에 대해 이중국적을 인정해줄 것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다.


이중국적을 인정하게 되면 어느 국가에 충성할 것인지 (특히 병역의무) 분명치 않게 되고 문제가 생겼을 경우 보호문제를 두고 양국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 이 때문에 세계적으로 이스라엘만 이중국적을 인정할 뿐 모두 단일국적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다른 나라 국적을 가진 유대인이라도 일단 이스라엘 영토에 거주키로 결정하는
순간 국적을 준다. 정부 관계자들은 교포들이 이중국적을 요구하는 이유가 실은 '불순한' 목적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그 하나로 재산권을 행사하겠다는 목적을 들 수 있다. 현행 국적법에 따르면 외국 국적을 가진 교포는 1년 내에 국내에 있는 재산을 처분해야 한다. 그런데 외환법상 설령 국내재산을 처분해도 돈을 외화로 환전해 가져갈 수 없게 돼 있다. 정부가 이중국적을 인정하면 교민들은 한국 국적을 이용해 손쉽게 국내 재산을 빼내갈 수 있다. 외무부의 한 실무자는 이를 두고 "꿩 먹고 알먹는 식이 아니냐?"고 비유한다.


또하나 이중국적을 인정하게 되면 출입국 관리상 많은 문제점이 생길 것으로 당국은 판단하고 있다. 91년 통계에 따르면 해외동포는 소련과 중국거주 한인을 포함하여 4백83만2천4백14명에 이른다. 이중 정부가 가장 신경을 쓰는 곳은 70여만명에 이르는 재일교포. 정부는 해외교포를 위한 각종 지원비로 해마다 60억원 이상을 쓰고 있는데 그 대부분이 재일거류민단으로 흘러들어간다. 같은 교포라도 재일교포는 한 · 일 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정부의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다. 정부의 교민정책은 기존의 '한국적' 교민관리 방식에서 벗어나 다른나라 국적을 취득한 교포들이 홀로 서기를 할 수 있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게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로스앤젤레스 교민에 대한 과잉된 대응태도를 보면서 좀더 합리적이고 탄탄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