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같이 터지던 독립의 노래
  • 김연갑 (한국문화정보 조사부장) ()
  • 승인 1991.03.0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ㆍ1운동 때 민족 하나로 뭉치게 해…찬송가 애국가 외에 독립가 추가발굴

1919년 3월1일부터 4월말까지 이어진 3ㆍ1운동은 1천5백42회의 시위에 2백2만3천89명이 참가하여 오직 ‘조선독립’이라는 깃발과 구호와 노래 아래서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깃발과 구호 그리고 노래는 시위대열의 너와 나를 하나로 묶어내는 연대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또한 운동의 방향을 유지시키는 구심력의 원천이었다. 바로 이 연대감과 구심력이 두 달간의 거족적 민족운동을 가능케 했고 가혹한 탄압에도 좌절과 일탈을 막게 한 힘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노래는 깃발과 구호의 상징성을 포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의 다양성으로 하여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3ㆍ1운동기간 중 시위의 일반적인 형태는 집결→독립선언서 낭독→연설→만세3창→노래제창→구호→시위행진이었다. 이때 ‘노래제창’ 순서에서 부른 노래는 대개 의식요로서 학생ㆍ교사들의 집회에는 애국가와 교가가, 교회에서는 찬송가가 불려졌다. 반면 시위중에는 전단으로 미리 배포된 일정한 운동가요가 불려졌다. 각종 증언 및 조사보고서를 통해 밝혀진 바로는 시위중에 불려진 노래가 찬송가를 위시한 10여종이나, 그 중 가사와 곡조가 알려진 것은 ‘애국가’(국가)와 ‘독립가’ 뿐이다.

■ 찬송가 외 : 우선 당시에 불려진 노래로 찬송가와 애국적 창가를 꼽을 수 있다. 이는 시위의 최초 집결지가 대개 학교 교회 시장 관공서였음을 감안하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시기상으로도 그렇다. 찬송가의 경우 찬미가(1892)ㆍ찬양가(1894)ㆍ찬송가(1908)등이 나와 각 예배당과 미션계 학교에 널리 보급된 때였다. 또한 애국창가의 경우, 독립신문의 애국가 운동(1890), ≪보통교육창가집≫(1910), ≪最新唱歌集全≫ (1918) 등이 학교와 일반에 널리 보급된 시기였다.
그 일부가 불려졌을 것이나 안타깝게도 구체적 자료가 없어 그것들을 살필 수가 없다.

■ 애국가(국가): “군중들은 무장하지 않았으며 행렬은 젊은이와 학생 그리고 노인과 부녀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군중들은 ‘올드 랭 사인’곡에 맞춘 한국의 국가를 부르고 국기를 흔들며 함성을 외치며 거리를 꽉 메웠다.”
이 기록은 CㆍW 켄달의 보고서인 ‘한국독립운동의 진상’의 일부이다. 이 기간에 불려진 애국가는 1899년 6월29일자 <독립신문>에 발표되어 불려지게 된 ‘무궁화노래’(1908년 이후는 ‘애국가’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됨)와 1908년 윤치호 편술의 ≪찬미가≫가 발행되면서 불려지게 된 현재의 ‘애국가’이다.

≪무궁화노래≫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죠선사람 죠선으로 길이 보죤하세
이 노래와 현 애국가의 공통점은 후렴이 같고, 동일한 곡조로 불렸으며, 합방 후부터는 똑같이 ‘애국가’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는 점등이다. 다른 점은 전자가 황실에 찬가적 성격인데 비해 후자는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성격의 노래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두 애국가 중 과연 어느 것이 3ㆍ1운동의 현장에서 불려졌을까. 33인 중의 한 분인 송암 김완규선생의 필사 자료에 후자만 기록되어 있는 점이나 임시정부 요인들이 활동했던 상해 신한청년당의 기관지 <신한청년>(1920년5월)에 후자가 국가로 실려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후자가 더 많이 불려진 노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전남 광주의 큰 장날인 3월8일 시위에서는 위의 두 애국가와 다른 애국가가 불려졌다고 한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알루의 물 홍안의 뫼 발해에 달해 / 길이 길이 발 뻗은 그때 그리움 / 위 속에 흐르는 피 그 나름이요 / 그 손발 물림이 내것이로다”

이 가사는 1914년경 김좌진 장군이 작사해서 해외 독립군들에게 널리 불렸다는 ‘독립군 행진곡’과 같다. 그렇다면 기존의 ‘광복군가’가 ‘애국가’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불렸거나 아니면 증언자의 오해일 것이다. 어떻든 이것은 당시 노래의 한 형태를 알려줌과 동시에 해외 독립군과의 연계를 알려주는 단서가 되고 있다.

■ 독립가 : ‘독립가’는 많은 증언과 실물 전단자료가 일치하여 그 내용과 불려진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고 또 재현이 가능하다.

“김종부는 주머니칼로 장딴지를 찔러 그 피로서 태극기를 그리고, 장양헌을 시켜 그의 구술하에 그가 그린 태극기 여백에 독립을 고취한 문장을 쓰고, 그 외에 경고문ㆍ독립가 각 1통씩의 오언영으로 하여금 충주공립보통학교 여교원 김영순에게 주도록 했다.”

이것은 충북 칠금리의 4월8일 시위기록의 일부인데 이를 통해 ‘독립가’가 전단으로 배포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널리 알려진 기존의 노래라기보다는 만세운동을 위해 창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 증언은 이를 뒷받침한다.

“장꾼들로 뭉쳐진 만세군중이 태극기를 들고 삐라를 뿌리며 거리를 메우자 친일파라고 지목되던 사람들도 뛰어나와 참가했고 걸인까지 기뻐 날뛰었다. 이때 군중들은 주동자들이 선창하는 ‘터젔고나 터젔고나 조선독립성. 10년을 참고참아 이제 터젔네’라는 육당이 지은 독립운동의 노래를 한 소절씩 따라 부르며 행진했다.”

이것은 광주 서문통 3월10일 시위를 증언한 자료의 일부로 몇가지 주목되는 점이 있다. 우선 육당의 창작이라고 한 것인데 이러한 주장은 다른 자료에는 없는 사실이다. 다음은 “주동자들의 선창”이라고 한 사실이다. 이로써 이 노래가 전단으로 배포되어 시위 운동에 전략적으로 불려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경남 고성군 3월31일 시위 현장의 전단 '통면장 경고문‘에도 나온다. 즉 “면장이 앞장서야 하며…학생에 대하여는 독립가를 부르게 하라”라고 한 기록이다. 이는 시위 선도를 학생에게 맡기는 조직적인 시위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위의 증언에서 주목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가사 일부를 제시한 사실이다. 이 가사는 최근 필자에 의해 확인된 전주 시위 현장에 살포되었던 전단의 가사와 일치한다. 일절만 옮기면 다음과 같다.

≪독립가≫
터젓고나 터젓고나 조선독립성
십년을 참고참아 이졔 터젔네
삼천리의 금수강산 이천만 민족
살아고나 살아고나 이 한소리에
(후렴) 만세 독립만만세
만세 만세 조션만만세

경술국치 이후 ‘10년을 참고참아’라는 가사로 보아 3ㆍ1운동에 맞춰 지은 것임이 분명하여 ‘독립가’가 3ㆍ1운동과 함께 태어난 노래라는 점이 값을 더해준다.

곡조는 ‘야구가(野球歌)’곡조라고 밝혔다. 야구가는 이상준이 이어 1918년 널리 보급된 ≪최신창가집전≫에 있는 노래로 H.C 워크 작곡의 찬송가곡이다. 이 곡조는 찬송가 뿐만 아니라 ‘조선의 자랑’ ‘앞으로’ 등의 창가에도 쓰여 일반인에게 잘 알려진 곡조였다. 또 지금도 찬송가 393장 ‘우리들의 싸울 것은’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상의 ‘애국가’와 ‘독립가’ 등 3ㆍ1운동 현장의 노래들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3ㆍ1운동 시위현장에서 불려진 노래는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몇가지 노래 외에는 그 실상을 파악하기 어렵다. 둘째 시위의 일반적인 형태로 보아 교회에서는 찬송가류, 학교에서는 교가나 애국창가류, 대중집회에서는 전단으로 미리 배포된 ‘독립가’ 등이 불려졌다. 셋째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과의 연계로 독립군가류도 불려졌다. 넷째 ‘독립가’는 독립정신 고취와 시위의 조직을 위해 창작되어 전국적으로 현장의 노래로 불려졌다. 다섯째 3ㆍ1운동 시위현장의 노래는 군중을 하나의 연대감으로 묶어 일정한 운동으로 전개시키는데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