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스 유엔 시대 막 올랐다”
  • 워싱턴ㆍ이석렬 특파원 ()
  • 승인 1991.03.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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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제임스 레스턴

워싱턴의 3대 명물을 꼽으라면 사람들은 첫 번째로 스미소니언박물관장을, 두 번째로 워싱턴기념탑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카티’를 들먹인다. 스카티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1909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제임스 레스턴(James Reston)은 20대에 미국으로 와서 일리노이대학을 마치고 오하이오주 스프링필드이 한 지방신문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그는 3년 전 은퇴할 때까지 52년 동안 <뉴욕타임스> 워싱턴 특파원으로 ‘뉴스의 고장’에서 루스벨트의 제2차세계대전 참전과 종결, 트루먼의 한국전쟁 개입, 쿠바위기가 빚은 케네디와 흐루시초프의 대결과 케네디의 암살, 닉슨의 워터게이트사건과 사임, 그리고 탈냉전의 새 시대를 맞은 부시의 걸프전쟁 등 20세기를 엮은 굵직한 역사의 매듭들이 짜였다 풀리는 과정을 눈여겨봐왔다.

1954년도 퓰리처상 국제보도부문 수상자이기도 한 스카티를 백악관 앞 라파엘공원 북쪽 건물 7층 <뉴욕타임스> 워싱턴지국 그의 사무실로 찾아갔을 때, 그는 늘 그랬듯이 파이프를 물고 이미 탈고한 회고록 원고의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었다. 회고록 제목은 ‘마감시간’. 올 가을에 선을 보이리라고 한다.

● 이라크가 조건부로 쿠웨이트에서 철수할 용의가 있다고 처음으로 철군을 시사한 지난 3월15일이 걸프전쟁을 평화적으로 마무리짓는 협상이 시작된 날로 역사에 기록되리라고 봅니까?
전쟁 종결을 위한 협상은 맨처음 유엔에서 시작됐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케야르 사무총장이 앞장서서 노력한 것 아닙니까.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직후 유엔 아노리가 철군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그 뒤에 소련ㆍ아랍연맹 등 몇 갈래에서 막후 교섭이 있었고, 그러다 사담 후세인이 내놓은 조건부 철군안을 미국이 거부하고 있는 상태지요. 이날이 중요한 날로 기억되리라고는 볼 수 없지요.

● 오늘(2월18일) 현재 지상전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지상전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지 그 개념을 먼저 정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1914년과 1917년 유럽에서 여러 나라의 많은 군대가 참호를 사이에 두고 대치해서 싸운 것과 같은 전쟁을 지상전이라 말합니다. 물론 지금은 그 양상이 다르지요.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지상전이 불가피해 보입니다. 고공을 나는 B-52 폭격기가 맹렬히 적진을 폭격하고 있고, 스마트 폭탄을 쓰는 최신 전폭기들이 저공에서 전략목표를 공격하다 보면 결국 지상군이 투입되는 싸움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 걸프전쟁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십니까?
우선 이 전쟁은 냉전의 막이 내린 뒤 처음 발생한 것으로 유엔헌장을 시험대에 올려놓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한국전쟁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처음 일어난 유엔헌장을 시험한 경우지요. 한국전쟁부터 걸프전쟁이 있기까지 유엔은 그 기능이 마비상태였지요. 안보리 회원국가간에, 특히 미국과 소련이 지역분쟁 해결방안을 놓고 전혀다른 견해로 맞서왔습니다. 냉전이 끝난 지금 미ㆍ소간에는 새로운 협력관계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해서로 의논해가면서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려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때 걸프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걸프전쟁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유엔헌장에 나타난 원칙을 지지ㆍ수호하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구태여 새 세계질서를 찾아나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 사담 후세인을 제2의 히틀러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담 후세인을 또 다른 히틀러로 낙인찍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제2차세계대전과 히틀러의 야망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그당시 가장 큰 문제는 유럽과 아시아를 통틀어 북해로부터 동해(일본해)에 이르는 온 대륙을 누가 지배하느냐 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세계 대부분의 공업지대가 누구 손에 들어가느냐가 걸려 있었습니다. 이와 비교할 때 사담 후세인을 제2의 히틀러로 부르는 것은 히틀러를 모독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후세인은 물질문명에 대한 원한 내지는 적개심의 상징일 뿐입니다. 세계가 큰 혁명을 겪는 가운데 한국과 같은 나라는 뒷짐지고 뒤에 서서 불평을 한 것이 아니라 근대국가 대열에 끼어 공업화에 성공함으로써 대만 홍콩 싱가포르와 더불어 오늘날 세계 무역대국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랍국가들은 뒤쳐진 채 지난날 좋았던 시절만을 그리워하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물질문명이 가져온 놀라운 변화에 대해 불평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서양문명이 가져온 정신적 황폐에 대해 통탄하고 있는 사람 중의 G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기 바랍니다. 사담 후세인은 거대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아랍세계를 위한 ‘21세기를 여는 인물’이 바로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림없는 일이지요. 왜냐하면 그는 부도덕한 사함이요, 그의 종교와 조국의 명예를 더럽힌 사람이기 때문에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봅니다.

●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사담 후세인은 미군포격으로 죽은 바그다드의 민간인 문제에 대한 세계여론을 생각보다 훨씬 더 자신에게 유리하게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사담 후세인이 ‘말 싸움’에서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걸프전쟁뿐 아니라 한국전쟁이나 베트남전쟁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미국이 전쟁을 할 때 기대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대식 무기로 단단히 무장한 미국이 전선에 투입되면 열세에 놓인 적군은 혼비백산하기 때문에 쉽게 이길 수 있다는, 말하자면 가설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일뿐 실제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적은 적대로 생활방식이 있고 그들 나름대로 살아가는 지혜가 있게 마련입니다. 걸프전쟁을 시작할 때, 1968년 이스라엘이 6일만에 아랍군대를 물리쳤듯이 속전속결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기대를 한 것은 사실이지요. 그러나 전쟁은 비디오게임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많이 죽게 됩니다. 50만 대군을 갖고 있는 이라크와 싸우자면 이쪽저쪽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온다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후세인이 막강한 다국적 군대와 맞서 여태까지 버틸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아랍사람들은 어떤 긍지를 가질는지는 몰라도 역사적으로 볼 때 별 의미가 없습니다.

● 이라크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국기자들은 적국의 선전도구로 악용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다른 쪽 소식을 미국인들에게 알려 균형있는 보도로 사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고 보십니까?
민주국가의 기자들이 할 일이란 분명합니다. 정치인들이 좋아하든 말든,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든 상관할 것 없이 기자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보도해야 합니다. 걸프전쟁이 어떻게 진행되고있으며 사람들이 얼마나 죽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은 알려주어야 할 뉴스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일일지라도 그것은 그들을 위해서는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 자손들은 걸프전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할 것입니다. 따라서 기자가 할 일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뉴스를 보도하는 것입니다. 바그다드에서 폭격당한 민간인 희생자를 보도하는 것이 이라크를 돕는 측면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침묵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검열 같은 제약이 있다고 해도 기자는 해야 할 일을 충실히 하면 됩니다. 하지만 분명히 밝혀둘 일은 기자란 발표문만을 받아쓰는 심부름꾼(포터)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쓰는 사람(리포터)이라는 사실입니다.

● 부시 대통령은 “우리의 가는 길은 정의롭고 도덕적이며 옳은 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도덕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는 전쟁이 과연 있습니까?
물론 있다고 봅니다. 미국이 두쪽나는 것을 막은 남북전쟁이 그렇고 독일과 일본을 상대로 싸운 제2차세계대전이 그런 종류에 속합니다. 부시 대통령의 말에는 틀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그가 아닌 다른 나라 사람이 그런 말을 했어야 합니다. 부시 대통령이 우쭐해져서 한 말이지요. 워낙 정치인들이란 말이 많고 또 입을 다물 때 다물지 못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이라크 국민이 나서서 후세인을 제거하라고 촉구한 부시 대통령의 말도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가 해서는 안될 말입니다.

● 미국은 이스라엘의 보호자입니까. 아니면 대부입니까?
1945년 영국 통치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이 미국이 아니었다면 독립국이 되었겠는가 하고 생각할 때 미국은 이스라엘의 은인인 셈이지요. 맹목적으로 지지한다기보다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유일한 민주국가라든가 중동의 요충지로 전략적 가치가 크다든가 중동지역에 비우호적인 나라들만 있게 될 때 석유공급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미국내 유태계 사람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지요.

● 부시 대통령이 너무 조급하게 걸프전쟁을 시작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경제봉쇄로 압력을 넣는 일을 더 했더라면 싶습니다. 좀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무튼 미국인은 참을성이 모자라는 국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전쟁을 하다 보면 언제나 예측불허의 일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누가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하고 구상하든 간에 결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제1차세계대전의 경우를 보세요. 윌슨 대통령은 발칸반도를 해방시키고 민주주의를 확대하기 위해 참전했지만 전쟁이 끝나자 독일은 나치즘에 휘말리고 이탈리아도 파시즘으로 독재화를 서둘렀고 러시아는 공산주의 혁명을 경험하여 엉뚱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 미국은 걸프전쟁으로 인한 어떠한 대가도 치를 각오와 용의가 있다고 보십니까?
어떠한 대가란 사담 후세인이 화학무기로 미군을 5만명쯤 살상하는, 그런 경우를 말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면 과연 전쟁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고 전쟁을 하지 말자는 운동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궁지에 몰린 이라크가 핵무기를 터뜨려 대량살상을 시도할 경우 전쟁을 해서 목적을 달성한다는 일은 불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

● 부시 행정부는 전쟁에서 승리할 뿐 아니라 평화를 정착시켜 새로운 세계질서를 창조, 미국을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만들 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까?
조지 워싱턴이 그의 고별사에서 미국은 세계분쟁에 말려들지 말고 멀리 떨어져 고립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 일이 있듯이 결정적 이익이 없는 한 미국은 고립주의를 유지해왔습니다. 19세기말 매킨리 대통령은 고립주의에서 탈피, 국제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에 뛰어들었고 스페인과 싸워 이겨 필리핀을 차지했습니다. 지금 주시 행정부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내세우고 걸프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세계무대에서 주역으로 활약해야 할 임무를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역할이 더 많은 사람을 하여금 민주주의 가치를 인정하도록 노력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너무 자기를 내세우거나 제몫을 차지하려고 서둘 필요는 없습니다. 지난 2백년 동안 미국이 성취한 일 가운데는 긍지를 가질 만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교만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 팩스 아메리카나가 다가오고 있습니까?
글쎄요….앞서 한 질문에 답한 내용에 이미 언급되었다고 봅니다만 결국 그런 뜻이 아니겠어요. 그러나 나는 바야흐로 팩스 유엔 시대의 막이 오르고 있다고 봐요. 유엔헌장에 훌륭한 이상이 담겨있고 우리 모두가 그 내용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터인지라 새로 다른 헌장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있는 것을 충실히 받드는 일만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 부시 독트린이 존재한다고 보십니까?
사람들이 공연히 하기 쉬운 말로 그렇게 하는 것이지 없다고 봅니다. 마셜 플랜은 애치슨이나 조지캐넌의 발상이었고 트루먼 독트린은 애치슨이 만든 것 아닙니까. 신문기자들이 제목 붙이기 쉽게 만들어낸 말이지요.

● 걸프전쟁 이후 중동의 세력균형은 어떻게 바뀔까요?
아랍연맹이 활기를 찾아 지역분쟁 조정 역할에서 한몫 톡톡히 하리라고 봅니다. 아랍나라들과 이스라엘간에 진지한 협상이 꼭 있게 될 것이고…, 물론 이것은 희망적 바람이기도 합니다.

● 오랜 세월을 한 신문사에서 근무하면서 성공적인 기자생활을 했다고 보는데 가장 보람있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뉴욕타임스>라는, 많은 사람이 읽는, 영향력있는 신문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결정하는 중심지에서 오래 살면서 미국이 고립주의를 탈피하여 현대 세계의 지도적 위치로 솟아오르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워싱턴에 앉아 의회가 양당끼리 대결하는 모습도 눈여겨볼 수 있고, 자유롭게 토론도 하고 글을 써서 발표하는 즐거움을 가진 것을 퍽 다행으로 여깁니다. 운이 썩 좋았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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