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담배 퍼붓는 자동기계 군단
  • 정희상 기자 ()
  • 승인 1992.05.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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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판매기 7천대…청소년 흡연 조장



 사방에 어둠이 내린 지난 6일 오후 8시경 서울 신대방동 ?여자중학교 진입로 입구‘Salem??이라는 상표가 큼지막하게 새겨진 양담배 자판기 앞에서 소녀 둘이 천원짜리 지폐를 투입구에 넣고 있었다. 버튼을 눌러 담배 한갑이 나오자 그것을 집어든 소녀들은 황급히 옆골목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또 한명의 소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학교쪽에 서서 망을 본 동료인 모양이었다. 세 소녀는 그 길로 보라매공원 정문을 향해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 자판기를 관리하고 있는 문구점 주인은 "24시간 방치해두어서 누가 담배를 사가는지 일일이 지켜보기 힘들다"라고 밝혔다.

 

무상 공급…전기요금까지 물어줘

 최근 국내에 양담배 자판기가 홍수를 이루면서 청소년 흡연이 급증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대표적인‘젊음의 거리??인 서울의 대학로는 특정 양담배회사가 온통 거리를 ??장악??하고 있다. 청소년이 많이 모이는 목에 양담배 자판기가 늘어서 있는가하면 문예회관 건너편에서 혜화동 로터리로 이어지는 50여m 거리에는 양담배 통광고를 쓴 상점간판이 즐비하다. 이런 사정은 젊은이가 많이 찾는 이태원 거리도 마찬가지다. 10~20m 간격으로 양담배회사


고유의 색깔과 로고를 넣은 간판과 차광막을 집중 설치하고 그 아래 요소요소에 양담배 자판기를 놓아두었다. 올해 3월 말 현재 재무부에 등록된 외산담배는 16개 국가의 충 2백27종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들의 시장점유율도 지난 88년 7월 완전개방 이후 꾸준히 높아져 현재는 5%를 넘어섰다. 전국민적인 불매운동 탓으로 한동안 주춤했던 양담배 판매가 최근 급격히 늘어나는 것은 바로??자판기 상술??때문이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양담배 자판기는 89년 7월??입센로랑??을생산하는 레이놀즈사의 판매권을 갖고 있는 조일유통 이 서울 등 대도시에 3천대를 무더기로 설치하면서 보급경쟁에 불이 붙었다. 국내에는 현재 7천개에 이르는 양담배 자판기가 설치돼 있는데 자판기가 보급될수록 판매가 늘어 재미를 톡톡히 본 각 양담배회사는 갈수록 자판기 설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국담배인삼공사 서울영업본부 이호근 특판과장(50)은??자판기는 한대에 2백만~3백만원씩 하는데 양담배회사들은 담배소매점에 이를 무상으로 공급해주고 월 3만원정도 나오는 전기요금까지 보상해 준다??고 말한다. 이같은 자판기 보급은 양담배회사가 의도했든 않았든 간에 청소년과 여성층의 흡연을 급격히 늘리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중고등학교 주변에 버젓이.자판기를 설치한 일부 양담배회사들의??상흔??은 청소년 흡연의 심각성을 일깨워준다. 지난 3월 한국소비자연맹이 조사한 중고등학교 주변 담배 판매점 및 자판기 실태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서울 부산 대구 인천 춘천 등 5개 도시 57개 중고등학교
주변을 조사한 결과 모두 2백12개의 담배 판매점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학교당 평균 3.7개의 담배 판매점을 끼고 있는 셈이다. 또 이들 중 주변에 담배 자판기가 설치된 것은 31개교로 이미 절반 이상의 학교가 집중적인 담배 판매 공략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결과는 부천 YMCA의 조사에서도 나타났다. 올해 초 하루 동안 부천시내 45개 담배 자판기 이용실태를 잠복 조사한 결과 전체 이용자 1백72명 중 42명이 중고생인 것으로 집계됐다. 자판기 고객의 24%를 청소년이 차지한 셈이다. 조사를 맡은 부천 YMCA 황주석 총무는??담배 자판기가 익명성의 효과 때문에 청소년 흡연을 결정적으로 조장하고 있음이 입증됐다??고 밝혔다.

 

자판기 고객의 24%가 청소년

 양담배회사가 주축이 된 자판기 보급 경쟁은 흡연 연령층을 낮추는 효과도 가져오는 것으로 추정돼 염려스럽다. 대학로에서 청소년 선도활동을 펴고 있는 김지영씨(23)는 최근의 경험을 예로 들어 자판기의 무분별한 보급을 개탄했다.“하루 3~4명의 어린 여학생들이 담배를 피우는 현장을 적발한다. 주로 마로니에공원 화장실 안에서 피우는데 여중고생들이 많다. 요즘에는 국민학생도 이곳을 찾는다. 얼마전에는 ㅎ국민학교 5학년 이모양이 담배피우는 것을 적발해 부모에 인계했다. 담배가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더니 자판기에서 샀다고 했다.??김씨가 보여주는 선도일지는 여러 국민학교 ? 중학교 여학생들의 명단과 선도내용으로 한묶음을 이루고 있었다.  현재 청소년 흡연을 가장 부추기는 외산담배로 한국담배인삼공사측이 꼽는 제품은 일본제 마일드세븐이다. 이 담배는 유흥업소보다는 한산한 주택가 골목 ? 대학가 ? 재수학원가 등지를 소리 없이 파고들어 급격한 판매 신장률을 기록하고 있는데, 주된 홉연층은 청소년이라는 것이다.


이호근 특판과장은 그 실태를 이렇게 밝혔다.??미국 담배가 대규모 물량공세로 나오자 일본 담배는 한국인의 국민감정을 피해가는 식으로 판매전략을 내놓았다. 포장지와 디자인을 국산 고급담배와 유사하게 만들고 판매기획 책임자로 한국 대학에서 유학한 사람을 채용해 한국 젊은이 심리를 최대한 이용하는 상술을 펴고 있다.??국내 담배시장 개방을 요구하는 미국을 가리켜??죽음의 사자??라 부르고 대다수 국민이 한국판 아편전쟁에 맞서자며 불매운동을 벌인 것이 불과 4년 전 일이다. 그러나 어느새 외산 담배는 국내 곳곳에서 뭉게뭉게 연기로 피어오르고 있다. 더구나 청소년층에 급격히 파고들어 구축된 외산 담배의 아성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문제를 던진다. 이왕 개방된 담배시장이라도 국산 담배조차 그동안 금기시 해왔던 청소년 흡연 조장을 양담배라 해서 방치해 두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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