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재벌기업은 없다"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3.07.0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재벌 전문가 핫토리 교수"경제구조 고도화하면 역할 축소 필연"

 일본에서 손꼽히는 한국 재벌 문제 전문가인 핫토리 다미오(服部民夫) 교수는 4개월 전의 예연이 지금 한국에서 현실화하는 현상을 지켜보고 있다. 일본 도쿄경제대학 경영학부 교수인 그는"한국의 상속 구조상 재벌은 스스로 해체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시사저널》 제175호 참조). 당시 이 발언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그럴 듯하다는 평이 있는가 하면, 흥미롭긴 하지만 지나치게 단순화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재벌이 스스로 해체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어맞았지만 이렇게 급격히 이루어질리라고는 핫토리 교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한국 재벌이 해체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최근 한달사이 현대그룹을 시발로 해서 삼성.금호.선경 등 재벌들의 계열사 정리 및 통폐합 조처가 잇따랐다.

 한국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참석차 내한한 핫토리 교수는 《시사저널》과의 단독 인터뷰에서"한국에서 재벌이 자연스럽게 해체되는 과정이 시작됐다"라고 능숙한 우리말로 주장했다. 미군정 당국이 강제로 재벌을 해체한 일본과는 다른 재벌해체 과정을 한국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물론 그도 이 갑작스러운 사태가 정부의 압력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계역사 정리방안을 전해 듣고 삼성그룹이 정치적'위협'을 기회로 활용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어차피 삼성그룹으로선 사업 재구축(reconstructuring)을 해야 하는데 정부의 방침을 따르는 모양새를 갖춰 생색을 냈다는 지적이다.

 반면에 이해가 안되는 구석도 있다고 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이번 합병은 삼성물산이 일본 종합상사와 같은 효율적인 종합상사로 변신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단지 계열사 수를 줄여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무분별하게 계열사를 통폐합하는 것은 경영의 효율성을 저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룹 존속 중시한 삼성은'일본적'기업
 핫토리 교수가 한국의 재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70년대말. 본래 사회학도였던 그는 당시 일본 아세아경제연구소의 객원연구원 자격으로 서울대 경제연구소에서 2년간 연구원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일본 재벌가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그는 한국의 35대 그룹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하면서 재벌 문제에 몰두하게 됐다.

 그는 당시 삼성그룹의 후계자 선정 과정을 눈여겨보았다. 후계자가 선정되기 전 삼성그룹의 주식소유 상황을 살펴보면 삼성문화재단과 같은 그룹 관련 단체가 주식을 많이 갖고 있었다. 77년 李健熙씨가 후계자로 선정되자 단체 명의로 됐던 주식이 이건희씨나 李秉喆 회장의 것으로 바뀌었다. 만일 후계자가 결정되기 전부터 개인 명의였다면 형제 간의 갈등이 훨씬 증폭됐거나 그룹이 진작 분할됐으리라는게 그의 주장이다. 형제간 상속보다는 그룹의 존속을 더 중시했다는 점에서 삼성그룹은 한국적이라기보다는'일본적인'기업이었다.

 반면 그 무렵 현대그룹에 참여하고 있던 鄭周永씨의 형제들은 분리해 나갔다. 국제상사와 대한, 효성그룹이 형제간 그룹 분할을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잡음이 있긴 하나 한화그룹도 현재 형제간 그룹 분할을 하고 있다. 재벌이 결국 분할될 수밖에 없다는 그의 예언은 이와 같은 전형적인 사례들을 보면서 굳어진 것이다. 그는 두 가문이 결합했고 소유 집중도도 낮은 럭키금성그룹의 행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핫토리 교수는 형제간 재산상속으로 인해 재벌그룹 계열사가 몇 개 분리된다고 재벌의 위력이 쇠퇴할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핫토리 교수는 한국 경제의 발전 과정을 주목한다. 한국의 재벌들은 흔히 개인 회사에서 동족 기업으로, 동족 기업에서 주식회사로 발전해나간 서양 기업들과는 다른 성장 과정을 거쳐왔다. 기업공개를 통해 직접 자금을 조달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자금 수요를 충당시켜 줌으로써 아직도 개인 회사나 동족 기업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금조달 방법은 재벌들이 선택한'노동집약적 조립공업.소품종 대량생산 방식'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큰 자본이나 기술없이도 얼마든지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어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80년대 후반 이후 기존의 공업 기반과 생산 방식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있다.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과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재벌의 위기'인 셈이다.

 결국 재벌과 같은 기업집단은 자원과 기술이 한정돼 있는 나라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는 그 증거로 태국이나 필리핀,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많은 후발 공업국에서 재벌과 비슷한 기업집단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꼽는다. 그러나 후발 공업국의 경제구조가 고도화하면서 재벌의 역할은 점차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가 최근 완성한 <재벌의 장래>라는 논문에서 재벌과 경제발전 단계 사이의 상관관계를 규정한 말이다. 그는"각 재벌그룹의 계열사 정리방안이 발표되기 전에 쓰여진 이 논문을 수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라고 말한다. 그만큼 재벌의 몰락을 자신한다는 뜻이다.

"의사 결정 방식도 바뀌어야"
 재벌에 대한 그의 진화론적 사고에 따르면 재벌 문제에 대한 해법도 단순하다. 강제적인 소유분산이나 업종전문화 정책을 쓸 필요는 없다. 그저 자금조달 과정만 공정하게 운영하면 된다. 이를 위해서는 은행이 기업에 대한 심사 능력을 갖춰야 하고, 기업들은 회계와 재무 정보를 비롯한 각종 경영정보를 제대로 공개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합병한 것은 정부의'개입'이 상황을 비합리적인 방향으로 이끈 전형적인 사례라고 본다.

 재벌의 경영, 특히 재벌 내부에서의 의사소통과 정보를 공유하는 문제가 소유집중이나 업종 다각화보다 더욱 큰 문제로 부각될 가능성이 있다는 게 핫토리 교수의 주장이다. 공업 기반과 생산 방식이 바뀌면 의사 결정과정도 바뀌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아직도 위에서 아래로 떨어뜨리는(top-down) 방식만 있고 그 반대의 의사결정 방식은 없다. 또 계획과 집행, 감사 기능을 맡은 각 부서가 전부 따로 노는 것도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는 전문 경영자가 클 여지가 없어, 재벌이 해체되더라도 이를 경영할 사람이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金芳熙 기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