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군부의 ‘주말 전격전’
  • 박순철 편집부국장 ()
  • 승인 1991.03.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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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동안 쿠데타 17차례…2월23일 ‘부패 청소’ 명분, 차티차이 총리 내몰아

지난 2월23일 토요일 오전 방콕시 외곽이 군용공항에서 차티차이 춘하완 총리는 북쪽의 아름다운 휴양도시 치앙마이로 떠나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그는 이틀 전에 국방차관에 임명한 아르티트캄랑엑 예비역대장을 부미폰 국왕에게 신고시키려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총리 일행은 휴일인 이날 공항에서 체포되었다. 어느 신문기자는 그동안 위기가 닥칠 때마다 “문제 없습니다”를 입버릇처럼 되풀이하던 차티차이가 비행기에서 끌려내려오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이렇게 해서 32세 때 태국군 사상 최연소 장군으로 승진했고, 금융업 등에서 ‘화려한 옷과 시거, 디스코를 좋아하는 멋쟁이 총리’는 일순간에 영어의 몸으로 떨어졌다. 태국이 1932년 이래 17차례의 쿠데타를 기록하던 순간 온 세계의 시선은 지상전 개시를 앞두고 긴장된 시간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던 걸프만과 워싱턴에 쏠려 있었다.

태국 군부는 다국적군보다 훨씬 기민하게 움직였다. 태국 육ㆍ해ㆍ공군의 총사령관격인 태국군 최고사령관 순톤 콩솜퐁 장군이 이끄는 군부는 총리의 체표, 방송국과 행정부의 장악, 의회 해산과 헌법 정지의 ‘쿠데타 수순’을 유혈사태 없이 단숨에 해치웠다. 실권은 순톤과 육ㆍ해ㆍ공군사령관 등 6인으로 구성된 ‘국가평화유지위원회’로 넘어갔다. 그들은 그날밤 국왕을 알현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절차였다.

국왕의 추인 없인 쿠데타 성공 못해
태국은 입헌군주국이지만 현재의 부미폰국왕은 상징적인 존재에 그치지는 않는다. 온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는 그의 추인이 없이 쿠데타가 성공하기는 어렵다. 지난 81년 4월 당시 군부의 중요한 세력이던 이른바 ‘젊은 터키당’의 영관급 장교들은 한때 총리까지 구금하는 등 쿠데타를 거의 성공시켰으나 쿠데타 반대세력들이 지방도시에 가 있었던 국왕 주위로 집결하는 바람에 결국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따라서 국왕이 칙령을 내려 순톤 장군을 국가평화유지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한 것은 군부의 집권이 공식화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26일 오전 공군사령관은 칙령을 받아 방콕으로 가져왔고 순톤을 비롯한 군수뇌가 참석한 가운데 육군 강당에서 낭독되었다. 이 장면은 텔레비전과 라디오방송으로 중계되었다. 칙령은 “이제부터 모든 국민은 평화를 지키고 공무원은 순톤 장군의 지시를 따르라”고 유시했다.

지난 81년과 85년의 쿠데타 기도가 모두 실패로 끝나면서 태국에서도 이제 쿠데타는 과거의 것이 되지 않았느냐는 견해가 없지 않았다. 특기 2~3년 동안 차티차이 총리하에서 태국 경제가 10%를 넘는 세계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면서 태국의 공업화와 민주화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가 더욱 힘을 얻었다. 그러나 이것은 태국 군부의 정치권에 대한 영향력이 감소되었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었다. 민정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80년대에도 정부와 군부는 협조와 견제 속에 ‘힘겨루기의 밧줄’을 서로 당겼다 늦췄다 했던 것이다.

차티차이 정부가 들어서면서 군의 정치간섭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강화됐고 군은 이러한 ‘냉대’를 못마땅해 했다. 지난해 중반 이후 정부와 군부의 대립은 눈에 띄게 격해졌다. 방콕발 연합통신의 해설기사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들을 전한다. 지난해 6월 당시 부총리 겸 국방장관이었던 차왈니트 용차이유드 예비역 대장은 어느 시국세미나에서 차티차이 정부의 부정부패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는 특히 정부가 추진하는 대형프로젝트를 둘러싼 수뢰와 표의매수등 선거부정을 예로 들며 “해외에 나가보니 태국이 세계3대 부정부패 국가의 하나라는 소문이 들려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무임소장관 이었던 찰렘 유범룡은 “부정부패의 온상은 정부가 아니라 군부”라고 반격하면서 차왈리트 장관의 부인을 “걸어다니는 보석상자”라고까지 매도했다.

이에 분개한 차왈리트 장관은 사표를 제출했고 수천명의 육군 장교들은 방콕에서 그를 지지하는 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정치권과 군부의 감정이 더욱 악화되면서 지난해 12월5일 국왕 탄생을 축하하는 식장에서 군 장성들은 총리에게 인사마저 하지 않았고 금년 정초 총리에 대한 신년하례식에도 불참했다.

사관학교 5기 수친다 대장이 실력자
쿠데타의 원인을 좀더 깊숙한 데서 찾는 시각도 있다. 우선 국가평화유지위원회의 6인 위원 가운데 누가 진정한 실력자인가 하는 문제의 제기가 가능하다. 군의 실세는 태국군 최고사령관이 아니라 육군사령관이라는 ‘상식’과 해군과 공군은 권력게임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순톤 장군은 아니라는 답이 나온다.

국가위원회의 부위원장이며 육군사령관인 수친다 대장이 자연 관심의 초점으로 떠오른다. 쿠데타 성공 이후 중요한 사항에 대한 발언은 순톤이 아니라 수친다의 입에서 나온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만하다. 쿠데타가 발생한 다음날 70년대 중반 총리를 역임했고 정계의 원로로서 추앙받고 있는 쿠크리트 프라모즈가 그를 총리감으로 칭찬한 사실도 시사적이다.

수친다는 현재 태국 육군을 주도하고 있는 촘클라오 왕립사관학교의 5기생 가운데 선두주자이다. 6인 위원 중 하나인 육군사령관 이사라퐁 눈파크디 장군도 역시 5기생이다. 태국군 사정에 비교적 정통한 어느 소식통은 5기생과 전국방장관 차왈리트 장군과의 긴밀한 관계에 주목한다. 지난 86년 차왈리트가 육군사령관에 취임하자 5기생의 모든 주요멤버는 그의 지지세력이 되어 뭉쳤으며, 그가 임기를 채우지 않고 막강한 육군사령관직을 사퇴한 것도 5기생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또한 정부내의 젊은 엘리트들은 그동안 69세의 차티차이가 이끄는 내각이 너무 구식이어서 국가발전에 지장이 있었다고 불만스러워했다. 젊은 군부와 젊은 정부가 횡적으로 연결된 새 세대의 지도구조가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고 한다. 이 소식통은 차왈리트 장군이 총리직을 맡고 수친다 대장이 군부를 계속 장악하는 형태로 안정적인 체제가 구축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보았다.

국민들의 무관심도 쿠데타의 발생에 한몫을 하고 있다. 태국에서 쿠데타는 ‘지도층내의 태풍’일 뿐이며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날의 경험으로 보면 쿠데타 이후에도 쿠데타 이후에도 국가의 정책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잠롱 시장 “업무 차질 없다”
방콕시의 프라카농구에서 양말공장 ‘제네럴 삭스’를 경영하고 있는 李正雨씨는 종업원들의 동요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사업가들의 경우에도 정치적 이권과 관련있는 사업이 아닌 일반 사업에는 아무 영향이 없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가을 ≪시사저널≫ 초청으로 방한했던 잠롱 스리무앙 방콕시장의 동정을 알아보기 위해 방콕시청에 전화를 걸었다. “잠롱 시장이 계속 집무를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전화를 받은 여직원은 “물론 평상시처럼 일한다. 방콕시청은 지방정부이니까 업무 차질은 없다”고 새삼스런 질문이라는 듯 대답했다. 방콕의 영자일간지 <방콕포스트>에 따르면 잠롱 시장은 사업계획을 예정대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군부는 앞으로 6개월 이내에 새 헌법을 기초하고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다짐한 바있다. 특히 새 헌법은 표의 매수를 막는 데 역점을 두겠다고 수친다 장군은 말했다. 그러나 태국의 유력지 <타이라트>는 사설에서 “매표는 너무 오래된 관행으로 이제는 정상적인 행위가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유치원의 어린이들도 반장이 되려면 친구들에게 사탕을 나눠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개탄했다.

태국에서 일어난 가장 최근의 쿠데타가 이 사회의 해묵은 숙제를 일소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6개월 뒤 민간정부가 들어선다 하더라도 군부의 그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군부는 아직도 태국 사회의 가장 큰 엘리트 집단으로 권력 의지로 차있으며 국민들은 군의 장교들을 여전히 존경과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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