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가조선왕조계승했다?
  •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2.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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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대 《조선사》 발간, 한국 《조선왕조실록》 내년 완간 … 고전 번역 전체 2%

 “조선왕조를 역사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도 일본 제국주의이다.?? 지금 이런 주장을 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난 지 반세기가 돼 가는데 아직까지도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왕조를 계승하고 있다니 무슨 소리인가.

 물론 이 말은 실체로서의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사를 계승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역사 계승에 대한동양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민족문화추진회?? 辛承云 펀찬실장은??유교문화권인 동양에서의 왕조 계승은 전 왕조에 대한 역사서를 발간함으로써 완료되었다??고 말한다. 새로운 왕조는 전 왕조의 역사를 편찬해 자신의 정통성을 내외에 과시함으로써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보면 고려 때 김부식이《삼국사기》를 지은 것이나 조선 초기에??고려사??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온 일이 이런 사례에 속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유감스럽게도“조선왕조를 계승하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 일본 제국주의??라고 주장해도 크게 할 말이 없는 실정이다. 일제는 식민통치 기간인 1930년대에 식민사관의 입장에서 42권으로 된 《조선사》를 발간함으로써 조선왕조에서 일제로 이어지는 역사의 필연성을 강변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 우리 입장에서 《조선사》를 체계적으로 발간한 적이 없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같이 케케묵은 기준으로 역사의 계승 운운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몇 십 년 동안 남북이 경쟁적으로 《조선왕조실록》 번역에 매달려온 것을 보면 남북 정부 당국자들도 이런 기준에서 초연한 것 같지는 않다??고 신실장은 말한다.

 《왕조실록》은 왕의 재위 시절 일어난 일을 매일매일 빠짐없이 기록해놓은 것이기 때문에 ‘조선사??를 서술하는 데 가장 기초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쪽이 먼저 《왕조실록》을 번역해냈는가 하는 것은 결국 정통성의 계승을 위해 어느 쪽이 더 노력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古典籍 번역 부진 … 정신적 영양실조 초래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서건 아니건 북한은《조선왕조실록》을 이미 번역 완료했다고 선언했고, 남한에서는 내년쯤 완간할 예정이라는 사실은 학문의 발전이나 역사의 계승이라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왕조실록》처럼‘정치적 혜택??을 받지 못한 수많은古典籍들은 아직도 대학 도서관이나 공공 도서관 창고에 방치돼 있다.

 고전국역 단체인 민족문화추진회의 추정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한 문자로 간행된 고전적의 수는 9천여종에 이른다. 이 중 한글로 번역된 것은 2백여종으로 전체의 2% 정도이고 그것도 역사서에 편중돼 있다. 각 분야의 전문서적은 거의 손길이 닿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고서적에 담긴 선현의 정신적 유산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해 발생하는 폐해는 매우 크다. 사회 문화 학술 등 각 방면에서 정신적 영양실조와 불구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의학 분야를 예로 들어보자(한의학이라는 말 자체도 일제의 유산이기 때문에 東醫또는 鄕藥이라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조선시대 3대 의서인 《동의보감》《향약집성방》《의방유취》중 그나마 한글로 번역되어 일반 한의원에서 진료에 참고로 하는 책은 《동의보감》뿐이다. 세종대왕 당시 전국에서 나는 약재의 이름·효능·산지 등을 집대성한 《향약집성방》이나 같은 세종 때 당대의 동양의학을 집대성한, 그래서“동양의학의 세계적 백과사전??이라 부르는 《의방유취》는 변변한 번역서도 없으며 일반 한의원에서 활용되지도 않는다.

 향약연구가 丁民聲씨는 얼마 전 중국을 방문했을 때“중국인들이 오히려 《의방유취》를 높이 평가하고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을 보았다??고 전하면서 중국의서 에만 의존하는 한의학계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서지학자 안춘근씨는“국문학의 전통에 뿌리를 두지 않은 우리의 문학작품들이 어떻게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서양의 경우 문학을 하려면 자기의 고전을 먼저 섭렵하는 것이 상식으로 돼 있는 데 비해, 우리는 근본은 제쳐둔 채 서양의 문학이론 과 기법만을 따오다 보니??우리의 문학작품을 영어로 번역해놓으면 국문학인지 영문학인지 분간을 못할 정도??라고 비판한다.

 민족문화추진회의 朴贊洙 기획실장은 일반 중고등학교에서 실시하는 국학 관련 교육은“書自書 我自我(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 상태??라고 꼬집는다. ??교사들이 교과서에 나오는 고전적을 접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때문에 교육은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동양 삼국 중 고전적의 현대화가 특히 문제가 되는 곳이 바로 우리나라이다. 중국이나 일본은 나름대로 문자의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국가에서 번역청을 두고 자기의 고전적뿐 아니라 동양 삼국의 고전적을 체계적으로 연구해왔기 때문에 우리처럼 전통의 단절을 우려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해방 이후 문자생활이 한문 위주에서 한글 위주로 바뀌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전적의 현대화는 반드시 번역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한문 문장의 해석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표점 (구두점) 찍기, 해제 및 색인, 그리고 영인 작업등이 전부 이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한문을 모르는 젊은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한문을 한글로 옮기는 번역사업이 가장 중요하다. 신용하 교수(서울대?사회학)는 고전적의 번역은 일반인들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학문연구의 신속성과 능률을 위해서도 꼭 해야한다??라고 말한다. 趙東一 교수 (서울대?국문학)는??연암 박지원의 (연암집)을 자유자재로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꼽을 정도??라고 말한다. 따라서 한문 실력이 아주 뛰어나지 않은 국문학자에게 (연암집)은 말 그대로??書自書 我自我??인 것이다.

 민족문화추진회의 朴少東 국역실장은 고전적의 번역은“자료의 개방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말한다. 아무리 좋은 문헌도 문자의 벽에 갇혀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자료로 개방됐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국내의 고전적 번역사업의 실태는 한마디로 척박하다. 현재 고전적의 번역을 포함한 현대화 사업에 관여하는 곳은 국가기관으로는 정신문화연구원과 국사편찬위원회가 있고, 민간단체로는 민족문화 추진회 와 세종대왕 기념사업회가 있다. 이 중에서 연륜이나 규모면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업을 펼치는 곳이 민족문화 추진회인데, 추진회의 현재 위상은 고전적 번역사업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문화 없는 선진국이 있을 수 있는가??

 1965년 문화예술계 인사 50여명이“이대로 두어서는 민족문화 자체가 말살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 아래 창립한 민족문화 추진회는 그동안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함께(조선왕조실록) 번역 등 고전적 현대화 사업의 중요한 맥을 형성해왔다.

 그러나 창립 당시‘50만원의 기금으로 출발한 재단법인??이라는 사실이 보여주듯 민간재단법인이면서도 재원이 없어 독자적인 사업 추진이 불가능하다. 지난 20여년 동안 민족문화 추진회가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에서 《조선왕조실록》 번역 사업비 조로 매년 지급하는 국고보조금 덕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도 《조선왕조실록》 번역이 끝날 예정인 내년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불투명하다.

 추진회의 이러한 허약한 위상은 이곳에서 매출되는 많은 국역 전문 인력이 국역사업을 자신의 직업으로 선택하는 것을 망설이게 한다. 추진회 에서는 1974년부터 국역 전문 인력의 배출을 목표로 국역연수원을 개설해 그동안 5백여명의 국역인력을 양성해왔다. 그러나 한 연수원생은“5년 동안의 연수과정을 끝내도 신분보장이 안 되기 때문에 힘들게 연수과정을 마친 사람들이 전업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한다.

 이밖에도“번역을 학문적 업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교육부의 지침 때문에 번역사업의 저변이 확대되지 못하는 것도 큰 문제??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현재 교육부의 교원인사관리 지침에는 대학교수의 학문적 업적의 판단 기준으로 학술지 등에 발표한 연구논문과 저서만을 인정하도록 돼 있다. 그러므로 교수들이 전공 분야의 번역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기피하고 있다. 조동일 교수는??학술번역을 학문적 업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아마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정부가 이런 문제점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을 수립하지 않는 한 현재의 상황은 개선되기 어렵다.

 정신문화연구원 李成戊 연구부장은“바로 지금이 선조들의 정신적 유산의 계승이 절박하게 필요한 시기??라고 말한다. 여태까지는 외국 문화와 기술을 적당히 모방해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지만??이런 발전전략은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이다. 앞으로 세계시장에서 선진국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독특한 상품과 문화를 가지고 나가야 하는데, 이것의 토대를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이 고전적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작업 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경제력만 가지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가 없는 선진국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그는 반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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