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목죈'정치 판결'백태
  • 허광준 기자 ()
  • 승인 1993.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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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지난 7월5일 열린 대법관회의에서 인사 문제를 일절 거론하지 않는 것으로 변협의'정치판사 퇴진'요구에 대응했다. 법원행정처 徐 晟 기획조정실장은 이 날 기자회견에서"변협의 정치판사 공개나 민변의'사례집'발간 등에 대한 대응책은 논의한 바 없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변협은 이 날 성명서를 내고"정치판사는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도 없다고 강변하는 대법원의 주장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이다"라고 강조하고,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의 사퇴를 요구해 재조 .재야 간의'정치판사'논쟁은 더울 첨예하게 전개될 전망이다.

 변협은 △정치권력에 영합해 납득할 수 없는 재판을 한 법관과 △정치권력 뜻대로 시구사건의 재판을 조정 .통제한 인사를 정치판사로 규정하고 있다. 이들이 주도한'정치성 재판'으로 재야 법조계에서 꼽는 사례는 수십건에 이른다. 정치적 입김이 작용했으리라는 의혹을 산 그같은 판결들은 대개 당시 정권의 정통성이나 도덕성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사건에서 나타난다. 주모자들에 대해 사형을 선고한 74년 민청학련 사건이나, 79년 서울민사지법이 金泳三 당시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인 사례가 그렇다.

 당시 정치권력에 굴복하거나 유착됐다고 비난받은 정치 지향 판결 사례는 5 .6공 시절에도 이어진다. 金大中씨에게 사형을 선고한'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나 유성환 당시 민주당 의원(현 민자당 의원)에 대해 1심 유죄판결을 내린 이른바'국시 파동', 5공비리 관련 구속자 47명을 집행유예 .구속집행 정지 .가석방 등으로 풀어준 것 등이 5공 시절의 대표적 정치성 판결 사례로 꼽힌다. 특히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가 항소심에서 실형이 선고돼 법정 구속된 全斗煥 전 대통령의 처남 李昌錫씨에 대해 대법원이 이례적으로 원심파기 선고와 함께 보석을 허가한 사건은 사법부가 권력에 영합한 대표적인 사례로서 국민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재야 법조계가 6공에 들어서서도 사법부가 권력에'사법권'을 빼앗겼음을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는 文益煥 목사 밀입북 사건을 전후한 법원의 태도 변화이다.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는 데 비교적 신중한 태도를 보였던 법원이,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으로 공안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되는 등 정국이 경색되자 검찰이 청구하는 시국과 관련한 사건의 구속 .압수 수색영장을 1백% 가까이 발부한 것이다.

 법원은 지난 90년8월'朴錫哲군 고문치사사건과 관련돼 구속 기소된 姜玟昌 전 치안본부장 등 경찰관에 대한 항소심에서 1심과 달리 무죄를 선고해 적잖은 물의를 빚기도 했다. 14대 총선 때 빚어진 인기부 흑색선 전물 살포 사건이나, 최근 재심 청구 운동이 시작된 姜基勳
유서대필 사건도 6공 권력에 유착된 재판 사례로 거론된다.

 그러나 정치권력에 굴복 .유착했다는 의혹을 사는 위와 같은 사례들을 적시하는 것이 구체적인 추동력을 얻어'사법부 물갈이론'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다수의'심정적 공감'을 얻는 것과, 정치성 판결로 규정지을 만한 구체적 물증을 제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법부 물갈이론이 대법원의 강력한 반발을 사는 까닭은 재야 법조계에서 퇴진하라고 요구하는 정치판사 대부분이 사법 상층부에 포진한 데서도 나온다. 현 대법원장이 김영삼총재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일때 서울민사지법원장을 지냈고, 5공 초기 국보위 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이창석씨를 보석으로 석방할 때 대법관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민변(대표간사 洪性宇)은 지난 30여 년간의 권위주의 시대에 행해진 정치성 재판 사례집을 내기로 하고 지난 3일 실무 작업에 들어갔다. 사법부 개혁에 중대 변수로 작용할 이 작업은 이르면 내주 중에 그 결실을 맺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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