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기기 경재 10년'속살뿐인 영광'
  • 송준 기자 ()
  • 승인 1993.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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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 과잉'영화에 관객 식상…한국인 정서 녹여낸 에로티시즘 미학 찾아야



 에로티시즘을 대하는 충무로의 정신연령은 아직 미성년이다. 에로티시즘의 미학과 철학이 정립되기도 전에 성애 장면을 남발하고 있다. <뽕> <변강쇠> 등 삼류 성애물 시리즈에서 범람했던'교접 지상주의'가 마침내 내로라 하는 중견 및 신예 감독의 작품에까지 흘러든 것이다.

 <화엄경> (장선우 감독) <웨스턴 애비뉴> (장길구) <아담이 눈 뜰 때> (김호선) <비상구가 없다> (김영빈) 등 올해 들어 개봉했거나 개봉을 기다리는 10여 편 가운데 <서편제>를 제외한 거개의 한국 영화가 이'에로과잉증'에 걸려 있다. 더욱이 장선우 . 장길수 . 김영빈 감독은 한국 영화를 이끌어갈 역량있는 연출가로 주목받던 터여서, 이들의 에로티시즘 남용에 쏟아지는 비난의 강도는 높다.

 성애 장면을 스크린에 담는 것 자체는 비난할 대상이 아니다. 문제는'정직한가'와'적절한가'이다. 그렇지가 못한 것이다. <애마부인>(85쪽 상자기사 참조) 등은 노골적으로 알몸의 굴곡과 성행위와 신음소리를 필름에 담은 뒤 농밀한 포르노성을 드러내 광고한다. 작품성은 논외로 치더라도, 일단은 정직하다.

 최근작들은 이와 반대로 정직하지도, 적절하지도 못하다. <아담이 눈 뜰 때>는 주인공이 대학 진학에 실패한 뒤 향락과 욕망의 거리를  거치면서 인생에 눈떠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원작(장정일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더 풍성해진 것은 단지 성애 장면뿐이다. 주인공은 카메라 가까이에서, 다양한 여자와 다채로운 체위로 성교한다.

'포스트모더니즘'등 허위 포장 예사
 알몸을 어느 구석까지, 얼마나 자주 드러내는가에 있어 <아담이 눈 뜰 때>는 <애마부인> 시리즈에 조금도 뒤지지 않으면서, 오히려'신세대의 문화와 세태를 진지하게 고발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영화'라고 주장한다. 명분 또는 홍보라는 가명 속에서 노골적인 벗기기가 자행된다.

 압구정동을 소재로 한 일련의 영화들도 마찬가지다.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유 하) <오렌지 나라>(유진선) <비상구가 없다> 등은 모두'압구정동의 세태 고발'을 표방한다. 그러나 카메라가 비추는 것은 언제나 출렁이는 침대와 남녀의 뒤엉킨 알몸이다. 욕망의 찌꺼기들을 압구정동으로 날라온'컨베이어 벨트'로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추찰하거나, 세태의 심층을 주목하는 앵글은 영화 속 어디에도 없다.

 <웨스턴 애비뉴>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흑인폭동을 겪는 한인의 이야기이다. 여주인공은 한때 마약과 섹스의 세계로 빠져든다. <웨스턴 애비뉴>는 이 장면들을 집요하게, 그리고 장황하게 묘사한다. 영화 평론가 이정하씨는"핑크 플로이드의 뮤직비디오 <벽>(꽃임의 이미지를 채용하여 질탕한 섹스 장면을 몽롱하게 묘사)을 배경으로 한 강수연의 정사 장면은 영화의 심각한 주제와는 어울리지 않는 포르노 화면이다"라고 단언한다.

 <화엄경>에서는 어린 주인공이 도를 얻기 위해 세상을 떠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여자를 만나고, 겪는다. <화엄경>은 열한 살짜리 소년이 꿈에 30대 요녀와 갖는 어색한 성행위, 또 산 속에서 20대 처녀와 치르는 정사 장면에 꽤 많은 필름을 할애한다.

 "이 장면들은 주인공이 성의 본질과 욕망의 허상을 깨치는 득도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의 진실보다 성의 유혹이 먼저 다가온다. 여기서는 연출가의 광기마저 느껴진다"라고 이정하씨는 영화와 애로티시즘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요구한다.

 한국 영화의 에로티시즘은 비단 과잉 때문만이 아니라 미학과 완성도에 있어서도 비판의 대상이다. 회사원 유경달씨(33 . 서울시 자양동)는 최근 영화의 성애 정면에서"자연스러운 흥분과 긴장을 즐기기보다 당혹스럽고 황당한 기분을 먼저 갖게 된다"말했다. 시민 영화동호회'영화돋움'의 엄기형 회장(연세대 강사 . 교육학)은"말초적 자극의 확대재생산이나 다름없다. 마치 볼거리를 단단히 제공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있는 것 같다"라고 현행 영화 관행을 비판했다.

 설사 키스 . 섹스 장면이 아름답게 촬영됐다 하더라도 영화의 전체 구성이나 일관성에서 벗어난다면 작품성과 완성도를 저해한다. 이에 대해 박광수 감동은"대개의 한국 영화는 성애 장면이 꼭 필요한 만큼이 아니고 정도를 넘어서 있다. 빤한 속셈이다"라고 잘라말한다. 작품성을 다소 해쳐서라도 상품성을 높여보자는 것이다.

 미학이 붕괴하고, 작품성과 유리된 성애장면은 벌거벗은 남 . 녀 육체 사진의 단순한 오버랩에 지나지 않는다. 영상예술을 기대한 관객도 속살 전시회로 퇴락한 에로티시즘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관음증 환자'가 되어야 한다. 에로 장면이 늘어나도 관객의 수는 반비례하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앞에 밝힌 영화들(미개봉작 제외)은 그다지 관객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포르노 비디오 쪽으로 관객 이동
 에로티시즘에 기댄 영화가 영락을 거듭하는 동안 충무로는 왜 계속 진한 성애 장면에 집착해온 것일까."한때 벗기기가 영화의 밑천이었던 시절의 관성이 아직까지 영화인들의 의식을 다스리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한소리로 지적한다.

 5공 정부는 출범과 함께'방송 키우기'와'영화 죽이기'를 영상문화정책의 두 축으로 삼았으며, 검열은 유독 성애물에 대해 관대했고, 벗기기 전략은 영화가 표현 능력에 있어 브라운관을 능가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었다. 게다가 키스 . 섹스 장면은 아무리 진하게, 그리고 오래 촬영해도 경비가 크게 늘지 않는 데다가, 연출 역량 부족을 적당히 벌충해주는 효과마저 기대할 수 있었다. 이렇게 10년을 지냈다.

 그러나 그 기간에 충무로가 건설한 에로티시즘의 미학은 없다. 우리의 정서와 어울리는 성애 예술의 영역을 개척하기보다 여배우를 벗겨 관객 홀리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관음을 즐기던 관객들마저 포르노 비디오 시장으로 떠나가 버렸다.

"에로티시즘은 혼을 관능화하는 것"
 에로티시즘 연출 역량이 축적되지 못했으니, 연기 능력이 발전했을 리 만무하다. 배우들이 스크린 속에서 옷을 벗어던지는 속도만 빨라졌을 뿐 예나 지금이나 성애 연기는 알몸 위에서 드리운 어색함과 곤혹스러움의 그림자를 걷어내지 못하고 있다.

 연기자의 프로 의식 부재도 지적된다. 정지영 감독은"스타 개인의 이미지 관리를 연기 . 영화 . 관객보다 우선해 정사 연기를 거부하는 배우도 있다"라고 밝힌다. 그로 인해 사창가에서 주인공과 비슷한 체격의 대역을 찾아내 쓰거나, 연기력보다 몸매를 앞세우는 신인 여배우를 활용하는 관행이 생겨났다.

 미국 사회학자이자 사상가이기도 한 영화 평론가 에드가 모랭이《스타》라는 저서에서 밝힌 할리우드 여화와 에로티시즘 간의 상관관계는 충무로 영화인들에게 참고가 될 만하다. 모랭은 에로티시즘에 격을 부여한다. 스타와 신인 또는 핀업걸(자신의 몸매 사진을 상품화하는 미모의 처녀)의 에로티시즘을 구분한 것이다."스타는 자신의 혼을 보여주지만, 신인은 자신의 다리와 가슴을 영화 상인의 제단에 제물로 바칠 뿐이다."

 1896년 영화 <키스>에서 메이 어빈과 존라이스가 압을 맞춘 이래, 에로티시즘은 할리우드의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스크린에서 여배우이 젖가슴이 부흥하고 다양한 성애 미학이 실험되었다. 애인의 영혼을 빨아들이는 듯 한 긴 키스 장면, 몽롱한 정사 장면, 고아한 성애 장면, 격렬하거나 천박한 섹스 장면에 이르는 에로티시즘의 원자로가 건설된 것이다. 이는 할리우드가 50년대 텔레비전의 도전을 뿌리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한국 영화에서 에로티시즘은 다시 원점이다. 이제부터라도 한국인의 정서를 용해해낸 에로티시즘을 모색해야 한다. 모랭은 말한다."에로티시즘은 단순히 영화에 맛을 내는 양념이 아니라, 혼을 관능화하고 육체를 신미화하는 사랑의 심오한 표현이다."
宋 俊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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