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영화 원조 <애마부인>
  • 이정하 (영화 평론가) ()
  • 승인 1993.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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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년 3월27일 자정 서울극장에서는 <愛麻夫人>이라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제목의 영화가 개봉되었다. 이 해 초의 통금해제에 뒤이은 최초의 심야상영 대열에 낀 관객들은 반라의 여배우 안소영이 말을 탄 선정적인 포스터 앞을 지나며 침을 삼켰다. 이 영화는 같은해 6월11일까지 상영되어 모두 32만1천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해 국산 영화로는 가장 관객을 많이 끈 영화였다.

 무엇이 이 영화의 성공을 가져왔을까. 무엇보다'愛麻→愛馬→엠마누엘 부인→포르노'로 이어지는 연상작용을 꼽을 수 있다. 물론 70년대에도 호스테스물이란 게 있었으나 5공 정부의 3S 정책을 만나기 전에는 포르노로 발전할 수 없었다.'애마'의 탄생은, 외설은 풀어주고 역사적 . 사회적 소재는 억눌렀던 5공의 영화검열 방침에 힘입은 바 크다. 그리고 다시는 전통적인 성윤리의 토대를, 소비와 쾌락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적 성의 논리가 뒤집어놓던 시절이었다. 이같은 시대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애마'는 어떤 모습으로든 출현했을 것이다.

 <愛麻夫人>은 같은 때에 일어난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함께 80년대를 예고한 하나의 실질적 사건이었다. 1편을 시작으로 지난 10년 동안 같은 제목으로 여덟편, 배다른 형제 격인 <파리애마>와 <짚시애마> 두편을 합해 모두 열편의'애마'영화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보다 족히 서른 배는 될 준 포르노성 에로물이 그 뒤를 이었다. <애마부인>이 하나의 장르를 개척한 것이다. 이 시리즈는 편수를 더할 때마다 2대 애마, 3대 애마라는 식으로 새로운 여배우를 동원하는 한편, 프랑스 . 스페인으로까지 활동 반경을 넓혀 나갔다.

 <애마부인>이 성공한 것은 그것이 노골적으로 포르노 영화를 표방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리즈에도 줄거리가 있고 극적 장치가 마련되었으며, 가부장제 성윤리에 대한 도전이 담겨 있고, 심지어는 여성의 자립이라는 문제도 동원되어 있지만, 관객들은 그것을 그럴듯한 포르노의 장식물로 여기지 하나의 메시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이 영화의 관객들은 다만 훔쳐보기 위해서, 엿보기 위해서 영화를 본다. 그것은 관음주의와 성욕에 관계된 것이다. 프랑스 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성욕 속에는 성이 없다"라고 할 때의 성욕이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포르노 문화도 10년 전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달라졌다. 사람들은 극장에서 포르노를 찾지 않는다. 마돈나가 주연한 <육체의 증거>조차 참패할 정도이다. 이 현상은 70년대 10년간 전성기를 구가했던 일본의 포르노 영화가 포르노 산업(또는 문화)에 밀려 사양길에 접어든 사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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