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분규 주범은 ‘저돌적’ 노무관리
  • 울산.김상현 기자 ()
  • 승인 1993.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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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에 문제 있었던 것 같다”…정회장도 인정

현대 정공, 기준없는3백86가지 일당 체계
 현대그룹 鄭世永 회장은 7일 오후 2시 울산시 중구 양정동 현대자동차 문화회관 2층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현대 계열사 파업에 대한 그룹 차원의 입장을 발표했다. 정회장은 이 자리에서, 다른 대기업들과 달리 현대에서만 해마다 분규가 일어나는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근본적으로는 울산 한 지역에 현대 계열사들이 집중돼 있는 탓이라고 생각하지만, 자동차.배 같은 중장비를 다룬다는 업종의 특성에도 원인이 있는 것 같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눈길을 끈 부분은 정회장이 “경영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라고 언급한 대목이었다. 그동안 현대그룹 계열사 노사분규가 터질 때마다 그 원인으로 지적돼온 ‘전근대적 노무관리체제’를 그룹 총수 스스로 부분적이나마 인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6월18일 울산 현대 계열사의 노사분규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면서 “현대 계열사 임금이 다른 기업보다 높은데도 연례행사처럼 노사분규가 일어나는 것은 사용자쪽 성의에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본다. 근로자에 대한 인간적인 대우가 부족한 데서 생긴 것 같다”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의 지적대로 그룹 계열사 근로자들이 받는 임금과 복지 수준은 다른 기업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근로자 평균 월급은 1백20만원대로 제조업체 평균 월급 89만원보다 훨씬 높고 주택보급률도 80%에 가깝다. 특히 현대중공업은 계획대로라면 94년에 주택보급률 1백%를 기록하게 된다. 물론 현대자동차는 현대그룹 내에서도 사정이 가장 좋은 편에 들지만 다른 계열사들도 동종 업체와 비료하면 최상위권이다. 그런데도 현대그룹은 늘 ‘합리적이고 조직적인 노무관리 체제가 결여돼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현대그룹 사정에 밝은 한 전문가는 “일반적으로 현대그룹은 기업의 조직관리 방식에서 권위주의적 경영과 강력한 추진력을 중시해 왔다”라고 말한다. 이에 따라 그룹의 노무관리도 치밀한 조직관리보다는 저돌적인 밀어붙이기 방식이 선호되고, 기업측은 엄격한 권위주의적 통제체제를 중심으로 근로자 조직을 관리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또 현대그룹의 노무관리 체제를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이 그 두 부류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여전히 정주영씨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현대중공업이 밀어붙이기식 노무관리를 대표한다면, 현대자동차는 정세영 회장의 비교적 온건한 노무관리 방식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노조위원장의 직권조인 문제를 둘러싼 노사 대립으로 현대 계열사 파업을 촉발시킨 울산 현대정공은 현대중공업식 노무관리 체제의 대표적인 본보기로 거론된다. 비록 쌍방이 고소.고발을 취하하기로 합의하고 8일부터 정사조업에 들어가긴 했지만, 근로자들이 불만을 갖는 노무관리 체제가 개선되지 않는 한 극한 대립의 불씨는 여전히 내재해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15년 근무가 1년 근무보다 덜 받는 경우도
 현대정공은 임직원이 5천2백여명으로 현대 계열사 중에서는 비교적 작은 규모에 들지만, 주요 생산품목인 컨테이너를 비롯해 차량(갤로퍼) 차륜 적재함 공작기계 변속기 등 다양한 품목을 생산하기 때문에 그만큼 현대그룹의 중요한 특성들을 많이 함축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 가운데 특히 자주 거론되는 것이 4백여가지에 이르는 복잡한 시간별 임금(時給) 체계이다.

 현대정공 노조의 한 관계자는 “뚜렷한 근거나 체계가 없는 시급 기준만 보더라도 회사의 노무관리가 얼마나 주먹구구식인지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도표 참조). 일정한 호봉 기준 없이 최다 3백86종류에 이르는 현대정공의 시급 가짓수는 입사 연수에 따라 들쭉날쭉이다. 한 노조 관계자는 “합리적인 기준 없이 회사 주관에 따라 보수를 정해 근로자를 채용하다 보니 입사한지 채 1년도 안된 근로자의 시급이 15년 이상 근무한 사람의 시급보다 많은 경우까지 생긴다”고 말한다.

 88년에 입사한 근로자들의 시급 내용을 보면 1천8백93원 4명, 1천8백96원 7명, 1천8백98원 6명 등 모두 1백9종류나 된다. 91년에 입사한 근로자들의 시급 내용 역시 3~10원 차이를 두고 90가지로 되어 있다. 그에 비해 단일호봉제를 시행하고 있는 대우조선은 60호봉, 삼성중공업은 일반 기능직 52호봉.전문 기능직 30호봉으로 나뉘어 있다. 현대정공의 金武一 관리이사는 “시급 가짓수가 많은 것은 업종이 다양한 데다 개인의 기술수준.능력 등을 고려했기 때문”이라며 불합리하다는 노조측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그룹 계열사들의 노무관리 체제를 둘러싼 비판은 실상 임금이나 복지 부문보다 노사분류 과정에서 나타나는 회사측 대응태도에 집중된다. 이번 노사분규에서도 나타났지만 각 계열사 경영진은 실질적인 협상 권한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한 계열사 사장은 드러내놓고 “내게는 해결할 권한이 없다. 그룹 차원에서 논의해야 할 문제다. 다른 계열사들의 추이를 봐가면서 협상하자”라고 노조 대표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현대 각 계열사들은 협상을 한달 가량 10여차례 이상 끌면서 교섭방법.일정 등을 놓고 노조측과 승강이를 벌이다가, 노조측에서 쟁의 발생 신고를 할 즈음 3% 인상안을 내놓았다. 그러다가 노조가 쟁의행위를 결의할 즈음 다시 4% 인상안을 내놓는 등 계열사들끼리 눈치보기에만 급급한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계열사 사장이 협상의 전권을 쥐고 있다. 정세영 그룹회장이 7일 기자회견에서 “현대의 각사는 사장이 전권을 가지고 책임경영을 하므로 그룹 회장이 이래라저래라 지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거듭 강조한 데서도 현대의 공식 입장은 확인된다.

“해결 일부러 회피했다”
 현대 각 계열사 노조 간부들이 이구동성으로 꼽는 그룹 차원의 노사분규 개입 채널은 종합기획실이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12일 일간지에 낸 광고를 통해 ‘각 계열사 사장은 아무런 결정권이 없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으며 그룹 종합기획실에서 모든 것을 통제.결정한다’고 주장하고, 그 근거로 90년 5월20일 종합기획실에서 각사 사장 앞으로 보낸 문건을 제시했다. 그 문건은 노사분규를 막기 위해 △직원 정신자세 확립 △노무관리 전담인원 대폭 충원 △좌경세력 척결 △조직.인원 재검토 등 그룹 명예회장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현대정공의 한 간부는 그러나 노조측의 종합기획실 개입 주장을 극구 부인했다. 그는 “종합기획실은 그룹사 출자 현황을 분석하거나 각사별 생산.판매에 대한 중장기 사업계획을 수립하는 곳이다. 종합기획실이 각사별 임금협상.단체협상 등을 조정한다든가 그에 대한 업무지침을 하달한 사례는 전혀 없다”라고 강조했다. 어디까지나 각 계열사가 협상 자율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 정부 노동정책의 시금석으로 평가되던 현대 계열사 분규의 향방은 이번 주를 고비로 판가름날 전망이다. 어떤 식으로 결정되든 이번 사태의 많은 책임이 회사측의 구태의연한 대응태도에 있다는 지적은 계속 유효할 것 같다. 대기업 노사관계 문제에 정통한 한 인사는 이렇게 말한다. “현대측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현대의 비중을 정부에 인식시키기 위해 문제 해결을 부러 회피한 면이 있다. 현대는 국가의 물리적 개입을 바라며 노조와의 협상에 성의 없이 임하는 무임승차 전략을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어느 쪽에나 얼마큼씩 책임이 있겠지만 현대가 새 시대에 걸맞는 ‘노무관리의 인간화’를 서두르지 않는 한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는 파업의 불길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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