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 ‘인맥 외교’는 이제 그만
  • 도쿄.채명석 객원편집위원 ()
  • 승인 1993.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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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총선, 전후 세대로 대폭 물갈이될듯…한.일 관계 대변혁 예고

오는 18일에 투표가 치러질 일본 중의원 총선거는 현재 9개 정당에서 9백55명의 후보가 난립해 자민.사회당이 결성된 55년 이래 가장 심한 혼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국 1백29개 선거구에서 중의원 의원 5백11명을 선출하는 이번 총선거는 일본인들이 과연 ‘어떤 체제를 선택할 것인가’가 최대의 초점이다.

 지금까지의 여러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우선 자민당이 단독 과반수를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확실해지고 있다. 자민당에 대한 지지율은 현재 9개 정당 중 가장 우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신생당.일본신당.사키가케 등 이른바 ‘개혁 3당’의 절반 수준을 맴돌고 있어 과반수는커녕 현재의 2백27 의석을 크게 밑돌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측까지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총선거후 일본 정국은 자민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연립정권을 수립하느냐, 신생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연립정권을 수립하느냐는 문제로 큰 혼란이 일 것이 예상된다. 이와 함께 차기 정권의 총리 자리를 둘러싼 각축도 치열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총선거후 각당의 세력 분포가 어떻게 되는가에 따라 여러 사람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

자민당 과반수 획득 가능성 거의 없어
 자민당이 예상을 뒤엎고 과반수를 획득하는 경우는 현재의 미야자와 총리가 유임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미야자와 내각에 대한 지지율이 역대 내각 중 최저 수준을 기록해 왔다는 점 때문에 자민당 내에는 그의 연임에 반대하는 소리가 높다.

 더욱이 자민당이 과반수를 획득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야자와는 도쿄 서방 7개국 수뇌회담을 마지막으로 정치 일선에서 퇴장하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요시다를 정점으로 한 보수 본류 파벌의 영수인 미야자와 총재 때에 이르러 자민당 보수 정치의 맥이 끊겼다는 점도 그의 연임을 저해하는 큰 요인이다.

 다음은 자민당이 현상유지를 하거나 대패할 경우이다. 이때는 와타나베 미치오 전 외상이 거론된다. 그러나 그는 건강에 문제가 있고 미야자와 총리와 엇비슷한 전전의 구세대이다. 따라서 총선거후 당 개혁과 이미지 쇄신에 적합한 인물은 아니다.

 이에 따라 총선거후 자민당을 중심으로 한 연립정권이 수립될 경우 가이후 전 총리나 전후 세대에게 총리 자리가 넘어갈 가능성이 매우 크다. 가이후 전 총리는 현재 자민당내 개혁파 그룹인 ‘자민당 정치개혁추진의원연맹’(94명)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데, 자민당이 총선에 대패할 경우 개혁파 의원들에 의해 총재.총리로 재추대될 가능성이 높다. 그는 또 자민당이 대패할 경우 개혁파 의원들을 이끌고 자민당을 탈당할 결의를 다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다른 유형의 보수연립정권이 탄생할 경우에도 그의 재등장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다.

 자민당이 현재의 의석을 유지할 경우 총리에는 하시모토 류타로 전 대장상, 고노 요헤이 현 관방상, 이시하라 신타로 전 운수상 등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 이들 중 가장 유력한 후보는 각종 여론 조사에서 항상 선두를 달리고 있는 하시모토 전 대장상이다. 정치 평론가들은 올해 55세인 그가 총리로 선출될 경우 일본 정계는 세대교체 바람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내다 본다.

 그러나 <아사히 신문>의 조사에 따르면 자민당을 중심으로 한 연립정권이 등장할 가능성은 18% 밖에 안된다. 반면 비자민당, 즉 야당연립정권의 가능성은 45%에 이른다.

 이 조사 결과가 그대로 맞아 떨어진다면 가장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는 하타 스토무 신생당 대표이다.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현재 36석인 신생당이 이번 선거에서 의석 수를 배 이상으로 늘릴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선거전 돌입 직전 신생.사회.공명.민사.사민련 등 5당 대표가 야당연립정권을 구성할 경우 하타 대표를 총리로 추대한다는 점에 이미 합의한 바 있다.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일본신당의 태도가 변수이지만 호소카와 대표 역시 하타 대표를 총리로 선출하자는 데는 이의가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평시의 하타, 난세의 오자와’라는 평가처럼 하타에게는 박력이 부족하다는 꼬리표가 늘 붙어다닌다. 때문에 신생당의 실질적 보스는 하타가 아니라 오자와라는 것이 일본 정계의 정설이다.

 그렇다면 오자와 이치로란 어떤 인물인가. 오자와 역시 하타와 똑같이 부친으로부터 선거구를 물려받아 정계에 입문한 2세 의원이다. 그의 정치적 출세는 당대의 킹 메이커들인 다나카와 가네마루의 총애 덕분에 대단히 빨랐다. 가이후 내각 때는 40대 후반의 나이로 자민당 총재가 거쳐야 할 3대 요직의 하나인 당 간사장직에 올라 철권을 휘두르기도 했다. 지금의 미야자와 총리도 그의 면접을 거쳐 간신히 당 총재에 선출될 수 있었을 만큼 한때 그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던 정치가였다.

 일본의 총선거 결과가 일본 국내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도쿄 서발 7개국 수뇌회담에 참석한 클린턴 대통령의 지적처럼 ‘변화의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의 증권 회사 솔로몬 브라더스는 일본의 총선거가 주가 상승과 엔 시세 하락을 가져올 것으로 내다본다. 이 회사의 예측에 따르면 일본의 정계 재편은 선거제도 개혁과 함께 경제적 효율화를 촉진시켜 장기적으로 주가가 상승한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시장개방이 촉진되어 무역흑자가 감소하며, 엔 시세는 하락세를 면치 못할 것으로 예측한다.

 그러나 일본 정치학의 권위인 컬럼비아 대학의 제럴드 커티스 교수는 정치적 혼란 때문에 일본은 당분간 아무런 변화도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는 일본 정치가 자민당 1당 정치에서 다당 정치로 전환되나 자민당의 파벌 정치가 당과 당 간의 항쟁으로 변질될 뿐 근본적으로 달라질 게 없다고 내다본다. 그러나 일본의 변화 속도가 빠르게 되든 느리게 되든 그 여파가 한.일 관계에 미치는 파장은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주일 한국대사관 관계자의 지적이다. 예를 들어 차기 총리로 유력한 하시모토나 하타는 모두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50대 정치가들이다. 이같이 식민지 통치 시대를 경험해 보지 못한 전후 세대는 이전의 전전 세대 정치가들과는 달리 과거사와 반공을 주축으로 한 한.일 관계의 특수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자민당내 장로급 친한 인사 교체 예상
 또한 자민당 장기 정권의 붕괴로 이전과 같은 자민당 파벌 중심의 인맥 외교가 더 이상 가동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자민당의 세대교체로 각 파벌내 장로급 친한 인사가 대폭 물갈이될 것도 예상된다. 이에 따라 한.일의원연맹 같은 대일 창구는 당분간 정상 가동이 불가능하게 됨은 물론이다.

 특히 총선거후 일본 정계의 ‘쇼군’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은 신생당의 오자와 이치로 대표간사는 한국과의 관계에 있어 매파로 소문난 인물이다. 90년 5월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 직전 일본 외무성 내에는 일왕이 구체적으로 과거사 문제에 언급하는 안이 검토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자민당 간사장직에 있던 오자와가 “더이상 엎드려 절할 게 뭐가 있느냐”고 외무성 안을 뒤집어 버린 경위가 있다.

 그는 또한 유엔평화유지활동(PKO) 참여, 헌법개정 등을 적극 추진해 온 정치가이기도 하다. 최근에 발간된 정책집 《일본개조계획》에서도 그는 유엔대기군 창설과 헌법 개정 등을 역설하며 일본이 국력에 걸맞는 정치대국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같이 자민당 1당 시대에서 다당 시대로, 전전 세대에서 전후 세대로 일본 정치의 주역들이 뒤바뀐다는 것은 한.일 관계의 대변혁을 예고하는 신호나 다름없다. 우리나라로서는 한.일 관계의 특수성에 입각해 왔던 대일 외교에 근본적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도쿄.蔡明錫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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