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가 활용에도 변혁 물결
  • 김현숙 차장대우 ()
  • 승인 1993.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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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간’은 지적 훈련의 연장…‘여가 소외’는 연구 대상



 지난 90년 부산지방철도청이 승객을 유치하려고 사이키 조명과 앰프, 무도장을 갖춘 열차를 운행한 ‘달리는 카바레’ 전말기는 우리나라 여가 문화의 단면을 반영한다. 이 무도 객차에 술 취한 승객이 정원을 두배 가까이 초과하여 몰려들어 미친듯이 노래하고 춤추는 바람에 운행 4개월 만에 객차와 바퀴 사이의 탄력장치가 망가져 운행을 정지한 사건이다. 이것은 한국에서 여가의 수요와 공급상황이 매우 초보 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스톱과 음주 가무는 행락철이 되면 도시 근교의 산과 강은 물론 고속도로의 관광 버스 안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어떻게 노는 것이 제대로 노는 것이냐는 질문에 ‘1차로 맥주 마시고, 2차로 양주 돌리고, 나이트클럽에 가서 흔든 뒤 밤새 고스톱 치는 것’이라는 대답은 가장 보편적인 것이 되어 있다.

 최근 《여가의 사회학》(한울사)을 펴낸 김문겸씨(부산대 강사)는 “우리나라에서도 자동화와 노동 시간 감축이 일과 여가 사이의 균형을 변화시켰으나, 노동 시간 단축이 여가 증대로 연결되지는 않았다”고 파악한다. 여가는 획일화 표준화한 상품으로서만 제시되어 소비되었을 뿐 주체적으로 향유하는 단계로 발전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산업 제품을 구입하라는 외부적 강제, 즉 소비 욕구를 부채질하는 자본주의적 판매전략이나 광고기술 또한 건전한 여가 문화가 발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견해는 마르쿠제가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사회에서 여가는 소외이고 환상일 뿐”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여가는 아직 소외받는 단계인가. 국제노동기구(ILO)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인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54시간으로 10년째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작년에 50시간의 벽을 깨뜨리고 49.3시간으로 줄었다는 노동부의 발표가 나왔으나 한국인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는 국민이다.

여가 문화의 조건은 자발성.창의성
 그러나 여가에 대한 욕구는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잔업 거부, 주5일 근무제, 연차휴가와 안식년제 등이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여가는 하나의 문화적 양상으로 확대되고 있다. 지난 90년 대한상공회의소가 생산직.사무직 근로자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90년 노동자의식조사>에 따르면 이들의 3대 걱정거리는 주택(63.3%) 가계수입(51.3%) 여가 시간 부족(36.3%)으로 나타났다.

 70년대 후반의 관광붐, 80년대의 자가용.컬러 텔레비전 보급, 콘도 등 레저타운 등장으로 여가 상품은 대도시 중산층을 중심으로 깊숙이 파고 들었다. 그러나 대부분 자기 의지에 따라 여가를 꾸려가지 못하고 시장 원리에 예속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한국인의 대표적 여가 형태인 텔레비전 시청 역시 자발적 여가 활동이 아님은 물론이다. 결국 ‘여가 시간은 늘어났는데 이것이 과연 나의 시간인가’라는 의문이 남는 것이다.

 김진섭 교수(청주대.관광경영학)는 여행사가 제공한 프로그램을 따라 며칠간 움직이는 여행은 한국에서 가장 유행하는 여가현상이라고 지적하며 “이 여가의 주체는 누구냐”라고 반문한다. 그는 “대량생산된 여가 상품의 소비 행위만 있을 뿐 여가 문화는 없다”고 단정한다. 자발성.창의성이야말로 여가 문화의 전체 조건이라는 것이다.

 지난 91년 문화부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발표한 <문화향수 실태조사>를 보면 여가에 대한 이상과 현실은 극단적인 차이를 보인다. 현재 하루 평균 여가 시간이 3시간 이상 된다는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30.8%나 된다. 또 대도시로 갈수록 여가 시간은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여가 형태는 주체적 설계 운영과는 거리가 멀다(표 참조). ‘집에서 잠자거나 쉰다’ ‘텔레비전을 본다’는 사람이 가장 많고 근무를 연장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도 전체의 10%나 차지한다. 이런 통계는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된다 하더라도 대부분이 부업을 찾게 되리라는 전망을 배제할 수 없게 한다. 가장 많은 사람이 원하는 여가 형태는 여행, 운동, 문화활동, 등산 순으로 나타나지만 실지로 이러한 형태로 여가를 즐기는 사람은 극히 적다.

 김광득씨(전 교통부 관광국장)는 96년 이후에는 “우리나라에도 주5일 근무제가 정착되면 여가 시간은 하루 7시간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므로 우리도 여가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여가는 노동 대가 아닌 인간의 권리
 김씨는 인간의 일상생활을 생활필수시간, 노동시간, 여가시간으로 구분하면서 여가는 “인간으로서 자유를 향수하는 시간, 또는 자유를 준비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즉 일하지 않는 시간, 노동으로부터 도피한 시간이 아니라 정보 획득, 자기 교육, 사회사업 참여를 위한 시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여가를 노동과 이원화시키는 종래의 인식을 완전히 바꾸라는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즉 노동과 여가는 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서 공존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가는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로써 새로운 사회적 지위를 차지한다. 노동재생산적 가치로서가 아니라 개인적 성취에 대한 공헌도로 평가되며, 여가의 지도력은 유한특권계급으로부터 일반 대중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중한씨(서울신문 사사편찬위원)는 “산업사회의 노동은 근육질 어깨로 이루어졌으나 정보화사회에서의 노동은 창조적 두뇌를 필요로 한다. 창조적 두뇌의 조건은 여가에 있으며, 여가의 전제조건은 개개인이 자기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시간을 편집할 수 있는 문화적 감수성이다”라고 강조한다.

 잘 쉬어야 일도 잘한다는 논리는 정보화 사회에서 가장 유용한 여가 이론인 것이다.
 김문겸씨는 우리나라에서 70년대 이후 여가 문화에 대한 욕구가 개화하면서도 그것이 건강하게 자리잡지 못한 이유로 저임금.저곡가정책, 우민화 정책, 문화적 제국주의를 방어할 전통 고급 문화 유실을 든다.

 그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세계 제1위의 40대 남성 사망률, 세계 제2위의 술 소비국, 고스톱왕국이 된 것은 여가 문화를 제대로 정착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노동시간이 단축된다 하더라도 그 여가가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삶의 에너지 총량은 달라진다”라고 말한다.

 지적 훈련과 심미안이 필요하지 않은 단순 오락이 반복되면 여가 문화의 암흑기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영국의 경우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모국어와 결합한 독특한 민족 문화를 탄생시켰으나 우리나라는 일본과 서구의 지배 속에서 전통적 여가 문화가 몰수됨으로써 고급스런 여가 문화를 형성할 시기를 놓쳤다고 주장한다. 그는 대학가의 자율적 문화운동, 노동자 소집단 문화 활동을 “자본주의적 여가 상품에 대한 대항 문화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사무엘슨은 ‘주휴 3일제는 사회적 발명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토인비 역시 “인류의 미래는 여가를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달렸다”라고 전망했다. 여가는 이제 노동을 준비하는 휴식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활동 양식이 아니라 생활 양식이기 때문이다.

 여가사회학자들은 “과거에는 노동 소외가 학문의 대상이었으나 이제는 여가 소외 문제가 초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산업혁명 이후 제4의 혁명이라 불리는 여가의 물결이 우리에게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金賢淑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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