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일본 기자 ‘인맥이 정보“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3.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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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간첩 행위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간첩 행위에 대한 정의가 정확하진 않은 것 같다. 시노하라씨 구속 사건에 대해서는 아직 실상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구한 서방 통신사의 한 특파원은 최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일본 후지 텔레비전 서울 지국장 시노하라 마사토씨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 서울 특파원 역시 익명을 전제로 ”시노하라 사건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다“라고 말했다.

 국내 실정법을 위반한 혐의로 주한 외신기자로서는 처음 구속된 시노하라를 보는 서울 주재 외신 기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두가지다. 하나는 그가 취재 목적으로 정보를 수집했더라도 국내 실정법을 위반한 것은 잘못이라는 반응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유럽·미국·일본 특파원 대부분이 동의한다.

 문제는 또 다른 반응이다. 검찰은 시노하라가 2·3급 군사기밀을 포함해 군사 정보 27건을 주한 일본대사관 무관에게 넘겨주었다고 발표했다. 외신 기자들은 검찰 발표를 액면 그대로 믿으려 하지 않는 듯하다. 두 서방 특파원이 ‘실상(actual facts)’이나 ‘풀리지 않는 의문(unanswered questions)’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도 이같은 기류를 반영한 것 같다. 이들은 특히 국내 실정법과 간첩 행위와의 명확한 구분이 없어 보이는 데 대해 의구심을 보인다. 미국의 한 유력한 경제지의 서울 특파원은 ”한국에서는 간첩 관련법에 대한 투명성(transparency)이 미국보다 떨어져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일본 기자들의 반응도 유럽이나 미국 특파원들과 비슷하다. <마이니치 신문>의 시모가와 마사히루(下川正ㅁ) 서울지국장은 ”시노하라가 취재 활동을 하다가 실정법을 위반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가 취재 목적을 가장해 군사 첩보 활동을 해왔다는 검찰의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라고 주장했다. <산케이 신문>의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 서울지국장은 ”시노하라가 진짜 기자였다면 간첩 행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군사 문제에 광적인 그가 군정보 수집이라는 개인적 취미 생활에 몰두한 나머지 간첩 행위와 취재 행위를 구분하지 못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주한 일본 특파원, 100% 본사서 파견
 시노하라가 검찰의 발표처럼 과연 ‘의도성’을 가지고 첩보 활동을 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시노하라가 취득한 정보를 취재 목적이 아닌 곳에 이용해 결과적으로 국내 실정법을 위반한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외국 기자들이 해당국의 실정법을 위반해 추방되는 경우는 있어도 구속된 사례는 별로 없다. 우리의 경우 과거 권위주의 정권 때 일곱 차례에 걸쳐 지국 폐쇄와 기자 추방이 있었다. 외국 특파원에 대해 통제가 엄격한 중국도 지난 91년 비밀 문서를 취득한 혐의로 영국 <인디펜던트>의 앤드루 히긴스 특파원을 추방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세인의 관심을 끈 것은 한국의 군사기밀에까지 손을 뻗칠 정도로 철저히 한국을 파헤치는 주한 일본 특파원들의 자세이다. 특파원이 파견국의 모든 것을 샅샅이 취재하는 것은 기자 본연의 임무이므로 이를 탓할 사람을 아무도 없다. 그러나 시노하라 사건처럼 취재 목적이 일정 선을 벗어났을 때 문제는 달라진다. 주한 일본 특파원들의 취재 활동을 특히 주시하는 이유는 아마도 거대한 ‘정보 주식회사’라고 불릴 만큼 대외정보를 수집하는 데 열심인 일본이라는 나라와 연관지어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6월 현재 서울 외신기자클럽에 등록된 외신 기자 수는 77개사에 1백46명. 공보처 외신과에 따르면 이 가운데 16개사 25명이 일본 특파원이다. 한가지 눈여겨 볼 것은 유럽이나 미국 매체에 종사하는 기자 가운데 많은 사람이 현지 고용 기자이거나 통신원(스트링어)인 데 비해 일본 매체는 반드시 본사가 파견한 특파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대부분 일본 언론의 서울지국은 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상주 특파원을 1명에서 2명으로 늘렸다. 이는 한·일 두 나라가 양국의 기자 수를 15명씩으로 제한한 종전의 약정을 폐기한 데 따른 것이다.

 요즘 서울에 오는 일본 특파원은 평균 10~12년 경력에 30대 후반이 주류를 이룬다. 이들 대부분은 한결같이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며 한국에 대한 사전 지식이 충분하다. 그런데도 이들은 선배들에 비해 한국에 대한 열성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는다. 한국 취재 10년 경력에 한국 관련 저서를 열네권이나 낸 <산케이 신문>의 구로다 지국장은 “한국을 제대로 보도하려면 먹고 마시고 입는 것부터 노는 것까지 사회 전반에 대해 알아야 한다. 요즘 일본 특파원들은 그에 대한 호기심이 부족해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주한 일본 특파원 대부분은 정식 근무에 앞서 1년 동안 연세대나 이화여대의 한국어학당에서 연수를 받는다. 한국어 연수는 <아사히 신문>이 70년대초 자사 특파원을 상대로 실시한 이래 지금은 <요미우리 신문> <니혼 게이자이> 등 다른 매체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국영 NHK 방송사는 예외다. 지난 60~70년대만 해도 주한 일본 특파원 가운데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당시는 정계의 실력자나 정부 관리 가운데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아 일본 특파원들이 굳이 한국어를 익힐 필요성을 못 느낀 탓도 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이른바 한글 세대가 한국 사회의 중추를 이루면서 일본 특파원도 한국어를 배울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4년간 한국에 근무했으며 한국어가 유창한 <마이니치 신문>의 시모가와 지국장은 “우리회사 입사 시험의 제2외국어 선택 과목으로 한국어가 있는데 그 문제를 서울지국에서 출제한다”라고 말했다.

술 대접해 인맥 형성…취재원 인수인계 철저
 얼마전 프레스센터 18층 외신기자클럽에서 일어난 일화 한토막. 외무부가 월례 브리핑을 하기로 한 그 날 외신 기자 20여명이 모였다. 한 참석자에 따르면, 그 날 모인 외신 기자 중 서방 기자는 카메라 기자를 포함해 3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일본 특파원이거나 서방 언론에 종사하는 한국 기자였다. 브리핑이 시작되자마자 일본 기자들은 신기복 외무부 제1 차관보에게 한국어로 진행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 요청을 받아들여 신차관보가 한국어로 브리핑하자 서방 기자 3명이 항의하는 표시로 퇴장했다. 그 뒤 외무부 브리핑은 종전대로 영어를 원칙으로 하고 필요할 때만 한국어를 사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일본 특파원들은 일본인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취재 활동에 어려움을 겪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한 고참 일본 특파원은 “한국은 인맥 사회다. 따라서 조직을 상대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원하는 정보는 조직의 파일이 아닌 개인의 파일에 있다”라고 말했다. 후지 텔레비전의 시노하라 기자가 군사기밀까지 빼낸 것도 高英喆 소령과 맺은 탄탄한 인맥 덕이었다. 이같은 인맥을 바탕으로 일본 특파원들은 한국 사회 곳곳을 취재한다.

 인맥을 통해 확보한 취재원을 관리하기 위해 일본 특파원들이 즐겨 쓰는 방법은 이른바 ‘술과 식사’ 대접이다. 다음달 한국 근무를 마치고 본사 보도국 차장으로 승진해 가는 NHK 방송의 사토 도시유키(佐?俊行) 서울지국장은 일본이나 중국처럼 한국에서도 취재원과 친해지는 방법은 역시 술이나 식사 대접인 것 같다고 말했다. 지지 통신의 모리타 오사무(森田修) 서울지국장은 자기돈을 포함해 한달 접대비로만 1백만원 훨씬 넘게 쓴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요즘 서울 주재 일본 특파원들의 씀씀이는 예전에 비해 크게 줄었다고 한다. 일본 경제의 거품이 사라지자 본사가 해외 지국에 경비 절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취재원을 후배에게 고스란히 인계하는 것도 주한 일본 특파원들의 관례다. 그 때문에 특파원은 바뀌어도 취재원은 계속 남는다. 일단 후임자가 결정되면 선임자는 길게는 한달에서 짧게는 1주일 동안 집중적으로 취재원을 ‘인수 인계’한다고 한다.

연구 모임 활발…귀국후 한반도 전문가
 일본 특파원이 취재원과 한번 맺은 인연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가 있다. 81년부터 4년 동안 <아사히 신문> 서울지국장을 지낸 고바야시 게이지(小林慶三)씨는 서슬이 퍼렇던 전두환 정권 시절 당국의 감시 속에서도 김영삼씨의 단식투쟁을 포함해 재야의 활동 상황을 꾸준히 보도했다. 당시 허문도 문공부 차관이 “요즘에도 3김씨를 취재하는 사람이 있는가”라며 으름장을 놓자, 그는 오히려 “나는 당신의 강의를 들을만큼 애숭이 기자가 아니다”라며 반박했다고 한다. 어려울 때 자신의 단식 투쟁을 보도해 준 데 대한 보답인지는 몰라도 지난 2월초 당시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는 외국 기자로서는 처음으로 그에게 단독 인터뷰를 허용했다. 주간 《아에라》 편집위원인 그는 지난해 10월 김영삼후보 자서전을 출간했고 최근 《아에라》에 ‘김영삼의 무혈혁명’이라는 제목으로 커버스토리를 썼다.

 주한 일본 특파원들은 개인적으로 한국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이름나 있다. 경제 평론가 池東旭씨(한일비즈니스 대표)는 “<니혼 게이자이> 서울 특파원을 지낸 스즈오키 다카부미(鈴置高史)씨가 한때 월급을 털어 해방전 한국 경제에 관한 책을 사들이는 바람에 인사동 책방의 관련 서적이 동이 났다”고 얘기했다. 개인적 공부 외에도 이들은 각종 친목회에 참여해 한국을 탐구하고 정보를 얻는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서울 주재 일본인들은 학맥이나 띠가 같은 사람들끼리 소규모 연구 모임을 만들어 친목을 도모한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만나 식사도 하고 한국에 관한 정보를 교환한다. 이런 모임에 참석한 경험이 있는 한 일본 특파원은, 이같은 소규모 연구 모임이 여러 개 있다고 말했다. 이 모임에는 상사원, 은행 지점장, 외교관, 기자 등 비교적 한국에 관한 ‘고급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인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직종 간의 경쟁을 의식해 서로 아는 기자끼리는 이런 친목 단체가 없다는 점이다. 대신 이들은 매주 목요일 오후 5시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열리는 대사와의 비공식 간담회에 참석해 정보를 주고 받는다.

 개인적 차원이건, 아니면 소규모 연구 모인 차원이건 ‘한국 탐구’ 덕에 역대 주한 일본 특파원 가운데는 귀국해서 한반도 전문가로 활동하는 사람이 많다. 대표적으로 <아사히 신문> 서울 특파원을 지낸 다나카 아키라(田中明)씨는 현재 다쿠쇼쿠 대학 해외사정연구소 교수로 있고, <산케이 신문> 서울 특파원을 지낸 하야시 다테히코(林建彦)씨는 도카이 대학 교수로 있다. 그는 60~70년대 박정희 정권 시대의 한국 정치 상황을 연구해 91년 《박정희 시대》를 펴냈다. 그밖에 <아사히 신문> 서울 특파원이었던 이가리 아키라(猪狩章)씨는 《서울 특파원 보고》 등 한국 관계 저서를 세권 냈다. 한편 70년대 후반 유신독재를 비판한 보도로 추방당한 <마이니치 신문>의 서울 특파원 마에다 야스히로(前田康博)씨는 현재 대학 강사로 있다. 한 일본 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귀국후 친북으로 돌아 김일성과 단독 인터뷰를 하는 등 일본 언론계의 대북 파이프 노릇을 한다”라고 전했다. 또 80년대초 지지통신 서울 특파원을 지낸 무로타니 가츠미(室谷克實)씨는 귀국한 뒤 활발한 반한 저술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지난해 6월 월간 《諸君》에 ‘폭로된 昇龍의 허위’라는 기사를 써서 한국을 헐뜯기도 했다.

 서울 지국은 워싱턴·모스크바·북경·런던 다음으로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산케이 신문>을 제외하고는 서울지국장의 격이 차장급이 아닌 평기자라는 점에서 서울이 아직은 크게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그런지 서울 특파원 출신으로 본국에서 편집국장까지 오른 사람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아사히 신문>의 전 서울 특파원이자 현 정치부장인 오쿠리 게이타로씨가 그나마 손꼽을 만한 사람이다.

언론 조작·사대주의 행태는 이제 그만
 서울은 주한 일본 특파원에게 취재 여건이 좋기로 이름나 있다. 우선 정부의 고급 관리나 웬만한 기업체 사장치고 <뉴욕 타임스>는 보지 않아도 <아사히>나 <니혼 게이자이>를 구독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따라서 일본 특파원들은 자기가 쓴 기사에 대한 인지도를 취재원으로부터 즉각 느낄 수 있다. 일본 기자들이 웬만한 고위 관리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엔 정부 관리가 고의로 일본 언론에 정보를 흘려 목적한 바를 이룰 때가 많았다. 대한항공 폭파범 김현희 사건과 지난해 김일성에게 첨과 그 첩의 딸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보도한 <산케이 신문>의 취재원이 한국의 정보기관이었다는 점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지금도 국민이 정보기관의 발표를 잘 믿으려 하지 않는 것도 이같은 ‘언론 조작’에서 비롯한 피해 의식 때문인지 모른다. <산케이 신문>의 구로다 지국장은 “요즘도 정보기관에서 북한에 관한 정보를 일본 언론에 흘릴 때가 있는 듯하다”라고 밝혔다. 국내 정보기관이 목적 달성을 위해 일본 언론에 정보를 흘린다면 오히려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감을 깊게 할 뿐이다.

 시노하라 사건은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든 사대 의식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큰 문제점을 던져준다. 고소령의 경우 비육사 출신인 데다 진급 심사에 떨어지자 부유한 집안 아들인 시노하라씨에게 일종의 ‘취직 선처’를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적 선처를 미끼로 일본 기자에게 접근한 그의 발상은 사대의식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이번 사건은 주한 외국 기자의 첩보 활동이라는 외부적 요인보다는 국가 기밀 관리상의 허점이나 고소령의 사대주의 근성 등 우리 내부에 더 큰 원인이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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