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는 친일파” 주장 뚜렷한 물증 없다
  • 청주·청원·성우제 기자 ()
  • 승인 1993.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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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고속도로 증평 톨게이트를 빠져 나와 청원군 북일면으로 20분 정도 들어가면 ‘운보의 집’이라는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이 집은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3km 가량 올라가야 나온다. 충북 청원군 북일면 형동리 산 30번지, 야트막한 산자락을 끼고 있는 운보의 집에는 손님이 많이 찾아온다. 지난 7월13일 장대비를 뚫고온 손님은 재미교포였다. 자기 시아버지가 30여년 전 雲甫 金基昶 화백(80)의 그림을 얻었는데 진품인지 확인하러 왔다는 것이다.

 지난 82년 운보가 어머니의 고향인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운보의 집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와 언제나 시끄러웠지만 운보는 오히려 즐거워했다. 그러나 최근 운보의 집을 둘러싸고 빚어진 ‘시끄러움’은 소리를 못듣고 말을 잘 못하는 팔순 화가에게 결코 즐거운 일이 되지 않았다. 6월초 연못에서 기르던 잉어 1백여 마리가 떼죽음을 당하고 6월30일에는 30년대 작품 <전복도>를 포함해 ‘알토란 같은 작품’ 15점을 도난당했다. 5년째 운보 방을 지키던 진돗개 두 마리도 뒤뜰에서 혀가 잘리고 목이 매달린 채 발견됐다. 60여 년의 작가 생활을 돌아보는 대규모 회고전(예술의 전당 10월12~31일)과 신작전(선화랑·현대화랑), 그리고 작가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담는 전작 도록 출간(94년 2월)을 앞둔 노화가에게 6월은 ‘너무나 잔인한 달’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지난 6월10일께부터 시작된 기념관 건립 파동과 친일 시비이다. 운보 기념관 시비는 지난 6월10일 <충북대 신문>애 실린 한 기고문에서 비롯되었다. 辛鄕得 교수(경상대·국문학)가 작성한 ‘친일화가 김기창 기념관 건립 부당’이라는 제목의 이 기고문은 ‘한봉수 의병대장과 손병희 어른이 탄생하신 충북의 성지에 친일파 환쟁이 하나가 기념관을 세운다고 한다. 치가 떨리고 분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2만평짜리 기념관 및 유락시설을 짓는다고 한다’는 내용을 전한 이 글은 작품을 도난당한 이후 운보 기념관과 친일 문제를 각 언론에 보도케 한 발단이 된 셈이다. 중앙지와 지방지들은 사회면 기사를 통해 ‘운보가 친일한 사실에 늘 반성하고 있음을 아들을 통해 참회했다’고 보도했다.

언론 “친일 인정·22억 조성” 등 오보 잔치

 그러나 일간지 기사는 ‘운보 기념관 건립에 지역 인사들 반발’이라는 사실 외에 대부분 오보였음이 밝혀졌다. 운보의 아들 金 宗씨(한국청각장애자복지회 회장)는 “그때 활동한 사람으로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사상적으로 절대 친일을 한 것이 아니다”라는 요지를 기자들이 만들어 썼다고 말했다.

 오보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운보 기념관과 관련한 기사에서 각 신문은 “운보가 22억원을 들여 기념관과 미술관, 도예공방·휴양시설 등을 짓기로 하고 땅을 사들여 6월초 국토이용계획 변경을 신청한 데서 논란은 시작되었다”라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 사실로 확인된 것은 ‘6월초 국토이용계획 변경을 신청했다’는 것밖에 없다. 결국 기념관이라는 명칭에서 비롯한 오해가 오보와 겹쳐 눈덩이처럼 부풀려진 것이다.

 명칭이 촉발한 논란에 대해 기념관 조성을 추진해온 청원군청 공보실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국토이용계획 변경 신청을 하기 위해 서류상의 제목으로 기념관이라는 명칭을 썼을 뿐 일생을 기리기 위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기념관이라는 말은 언제든 버릴 수 있다.” 땅을 사들여 짓기로 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면서 그는 “기존부지 내에 현재 있는 운향미술관·도예전시장 등 건물 6동을 ‘보강’하고 하수종말처리장·주차장·화장실 등 최소한의 면적을 추가 확보하는 것이다. 2만여 평의 면적이 증가되는 것은 인근 임야를 이용한 산책로·피크닉장·녹지대 등의 면적이지 기념관 면적이 아니다. 그곳은 새로 사들인 땅이 아니라 71년부터 84년까지 운보가 매입한 운보의 땅이다”라고 강조했다.

 ‘22억원’이라는 액수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난 7월13일 청주에서 열린 충북역사정의실천협의회(운보 기념관 문제를 계기로 결성된 단체·이하 충정협) 창립총회에 참여한 김 완씨는 “내년까지 3억원을 들여 조금씩 개축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이 날 충정협 회장으로 선출된 신경득 교수는 “우리의 주장은 지금 있는 건물을 헐라는 것이 아니다. 기념관이나 미술관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22억원이라는 돈은 신문에 난 것이다. 신문이 오보를 낼 리가 있느냐”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신문은 오보를 냈다. 신문의 오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운보가 친일한 작품이라고 제시된 그림들이 ‘진짜 친일을 하기 위해 그린 것이냐’ 하는 점이다. 지난 83년 미술전문지 《계간미술》 (《월간미술》의 전신)이 미술계의 친일 문제를 처음 제기한 이후 몇몇 평론가들이 ‘운보의 친일’을 거론해 왔지만 운보가 친일 작가임을 확증하는 명확한 자료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운보가 친일 작가로 지목되는 이유로는 그가 친일 화가 以堂 金殷鎬의 수제자였다는 점,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연 4회 특선으로 추천작가가 되었다는 점, <조선남화연맹전>(1942) <애국백인일수전람회>(1943) <반도총후미술전>(1942~44) 등 기금마련 전람회에 참여했다는 점 등이 꼽힌다.

“삽화 몇 점 놓고 친일이라니…”

 그러나 전람회에 출품한 운보의 작품과 그 제목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미술 평론가 李泰浩씨(전남대 교수·미술사)는 《친일파 99인③》애서 “김기창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고무하기 위한 선전 작업에도 앞장섰는데 <매일신보>에 게재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1943.8.6),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에 실린 완전군장의 <총후병사>(1944.4)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이는 43년 8월부터 시행된 조선 청년징병제를 선전하기 위한 작품이다. …제21회 ‘선전’(1942)애 출품한 채색화 <모임>은 마을 부녀회의 반상회 광경을 연상시키는데, 전시 후방에서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라고 밝혔다.

 이씨의 주장은 운보 혼자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받고서’는 오기·날짜도 8월7일자가 정확)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인상을 주지만, 사실은 43년 8월1일부터 9일까지 같은 제목으로 고희동·김인승 같은 작가가 노천명 같은 시인의 시에 삽화를 그린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산업금융의 관리를 통해 경제 침탈을 자행해온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에 실려 친일 작품으로 지목된 <노인> <총후병사>는 제목이 없는 그림에 이씨 본인이 직접 제목을 붙인 것이며, <모임>은 제21회 ‘선전’에 출품된 작품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운보측 주장에 따르면, <매일신보>와 《회심》 같은 친일 매체에 그림을 실은 것은 잘못이지만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고 그림을 주었다는 것이다. 문제의 삽화에 대해 김완씨는 “운보는 정식 데생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소재든 스케치하기를 좋아했다. 군인 그림은 그 중에 하나를 뽑아서 준 것이며, <매일신보> 그림은 43년 3월 징집으로 아들을 잃고 몇 개월 뒤 징병에 나가는 손자를 둔 이웃 노인을 그린 사실적인 그림이다”라고 주장했다.

 운보 김기창의 친일을 구체적 자료를 근거로 문제삼은 것은 이태호씨가 91년 《기니아트》에 기고한 글이 처음이다. 그러나 이태호씨의 지적에 대한 대응은 전혀 없었다. 이에 대해 미술평론가 吳光洙씨(환기미술관 관장)는 “삽화 몇점을 놓고 친일이라 모는 것은 미리 답을 만든 뒤 거기에 끼워 맞추려고 엉뚱한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런 해석에는 대응할 건덕지도 없다”라고 말했다.

기념관 건립 반대측 주장은 ‘오류투성이’

 지난해 5월 전작 도록 발간을 발표하면서 운보는 “고해성사를 하는 심정으로 모든 걸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친일을 한 작품이 나타나면 모든 걸 다 싣고 냉정한 평가를 받겠다는 것이다. 전작 도록에는 이태호씨의 평문도 실을 예정이다.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인사 중 친일행적 조사 대상자 8명의 명단이 밝혀져 친일 논쟁이 본격화하는 시점(38쪽 기사 참조)에서 발생한 운보 기념관 논란은 중요한 교훈을 새삼 일깨워준다. “재평가나 재심은 반드시 어렵게 진행해야 한다. 냉정한 검증과 절차의 완벽성이 기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충정협 창립총회에서 배포된 7월12일자 <조선일보> 사설 내용이다. 그러나 충정협의 재평가는 어렵게 진행된 흔적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듯하다”라는 식의 짐작이 많은, 논쟁을 거치지 않은 이태호씨의 글 하나에서 모든 준거틀을 가져 왔을 뿐만 아니라 그 글조차 잘못 읽고 있다.

 신경득 교수는 7월15일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운보는 42~44년 친일을 해서 총독부로부터 상을 받았다. 겨우 그림 석장을 그렸다고 공로상을 줬겠느냐. 전쟁 기록화를 그리고 나서 총독부가 고마워서 상을 준 제 아니냐. <총후병사>는 전쟁기록화의 기본 스케치 아니겠느냐. 이것이 내 짐작이다. 이태호 교수에게 확인해보라.” 그러나 이태호 교수에게 확인하고 당시 자료를 검증한 결과, 신교수는 38년 제17회 선전에서 운보가 특선을 하면서 총독상을 받은 것을 위와 같이 착각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완벽성이 기해지지 않은 “이렇다는데…‘식의 演壇上의 재판”은 친일잔재 청산이라는, 이 시대에 시급히 해결해야 할 중대한 과제를 훨씬 뒤로 미루는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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