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개혁파 장관이 ‘문제’
  • 서명숙.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3.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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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보사 자질부족 1,2위, 국방 도덕성에 ‘흠집’…언론 과민반응 등도 작용

 黃山城   宋貞淑   李仁濟   吳炳文   韓完相   權寧海.
《시사저널》이 사회과학 교수·대학원생 1백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들은 업무 수행 능력과 도덕성 면에서 문제 장관으로 지목됐다.

 이 결과는 공교롭게도 공통분모를 안고 있다. 여성 장관들과 상대적으로 개혁 지향적인 장관들이 거의 망라됐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여성 장관과 개혁 장관에 대해 과민 반응을 보인 보수 언론들의 보도 태도, 통일원·노동부·환경처 등 시대적 요구와 사회 변화속에서 그 역할이 갑자기 증대되거나 역할 조정이 어려운 부처의 속성, 개혁 장관들에 대한 관료들의 ‘面從腹背’와 ‘伏地不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여성 장관인 황산성 환경처·송정숙 보사부 장관이 나란히 1,2위로 업무 수행 면에서 능력이나 자질이 부족한 것으로 지적된 것은, 일차적으로 이 두 장관이 해당 부처의 업무에 대한 전문성이 그만큼 결여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뒤짚어서 생각하면 한국 관료집단의 타성이 그만큼 두텁다는 반증도 된다.

 능력과 자질 부족 면에서 1위로 꼽힌 황산성 환경처장관은 새 정부 각료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화제를 뿌린 장관이다. 그는 기자들과의 첫 간담회에서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라는 말로 시작해 선교재단 설립 문의, 부처 내에서의 기도회 사건, 국회 보사위에서의 울음 사건, 국회 본회의자에서의 바지 착용 같은 각종 크고 작은 화제와 논란거리를 낳았다.

 황장관의 시원시원한 성격은 환경처 관계자들에게 긍정적인 면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는 재산공개 문제와 관련해 기자들의 질문을 받자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마음만 먹었다면 1백억도 모았을 것”이라고 대담한 답변을 서슴지 않았다. 장관이 그 정도의 배짱이 없어서야 어떻게 업무를 추진하겠느냐는 것이 그를 두둔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황장관의 ‘호연지기’가 너무 지나쳐 오히려 업무 추진에 혼선을 빚거나 주장만 강하고 실행은 미약하다는 지적도 많이 받고 있다. 지난 4월 황장관은 청와대 업무보고에서 건설부·내무부·보사부·환경처 등으로 다원화돼 있는 물관리 체계를 일원화하겠다는 특별 보고를 해 주변 장관으로부터 ‘배짱 한번 두둑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물관리 일원화 문제와 관련해 황장관은 청와대 보고를 하기 전에 황인성 총리에게 사전 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물관리의 일원화에는 수자원개발공사가 맡는 댐 건설이 포함된다. 물의 모든 것을 한 부처가 다루기는 어렵다”는 지적을 미리 받았었다.

 황장관의 부정적인 면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특별한 관계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자신을 인기 스타로 인식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황장관은 취임 초 환경처 업무의 성격상 다른 부처와 견해 차이가 많은데 이를 어떻게 조율할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국무위원과 청와대 비서진이 모두 아는 사람들이다”“부처의 입지가 약해서 무시당할 때는 김영삼 대통령이 나를 아끼니까…”라고 그에 대한 대통령의 총애를 공식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황장관은 행정경험의 부족과 함께, 장학재단을 세워달라는 독지가의 부탁을 무시하고 선교재단을 만들었다는 점 등이 도덕성에 흠집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여성 각료인 송정숙 보사부장관이 기자였을 당시 그와 함께 일한 많은 언론계 인사는 그가 일에 있어서 대단히 꼼꼼했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약사법개정 문제와 관련해 보사부가 관심의 초점이 되면서 비전문 출신인 송장관의 문제점은 드러나기 시작했다. 국회 보사위가 지난 5월 국회에서 보사부 행정의 난맥상을 집요하게 파헤치고 들어가자 송장관은 이에 대해 거의 아무런 방어도 하지 못했다. 당시 송장관은 “아직 구체적인 판단과 확신이 서지 않았다. 죄송하다”는 말로 거의 일관했었다.

 한의대생들의 장기 농성으로 불거진 약사법 문제 해결은 사실상 송장관의 손을 떠난 셈이었다. 결국 이 문제가 보사부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민자당 정책조정실이 해결에 나섰고, 최종 해결은 황인성 총리에게로 넘어갔다.

 보사 행정은 낙동강 페놀오염, 기넥신 파동, 라면 공업용유지 문제 같은 굵직한 사건을 거치면서 국민들이 항상 예의주시하는 분야가 되었다. 따라서 과거처럼 단순한 지분때문이라든지, 대통령과의 친소관계 때문에 보사부장관에 비전문인을 기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로 지적되고 있다.

 또한 민자당 내에서도 “유일한 성역이 보사부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올 정도로 보사부가 일종의 복마전으로 인식되고 있는 만큼, 송장관이 보사부를 휘어잡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인제 노동부장관만큼 주변의 평가가 엇갈리는 각료도 드물다. ‘개혁 기조에 가장 어울리는 개혁 장관’에서 ‘장관으로서는 가장 실패한 인물’이라는 평가에 이르기까지 그를 보는 관점은 매우 다양하다. 노동부장관으로서 그의 궤적을 더듬어보면, 장관을 둘러싸고 이렇듯 다양한 평가가 제시되는 이유가 더욱 분명해진다.

 이장관은 지난 3월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앞으로 대법원 판례와 어긋나는 노동부의 각종 행정지침은 모두 정비하겠다”고 취임입성을 터뜨렸다. 그의 향후 행보를 예고하는 이 첫 발언에 재계는 불안과 불만을 감추지 않은 반면, 야당과 재야 노동계는 “이제야 사용부 장관이 아닌 진짜 노동부장관이 등장했다”면서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렇게 예고된 이장관의 구체적인 개혁 행보는 한국자동차보험 문제를 처리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됐다. 부당노동 행위를 이유로 이 회사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하는 한편 金俊起 회장을 소환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 일이 있고 사용자측은 긴장하기 시작했고 정부 내의 다른 경제팀도 놀랐다.

 이 장관의 개혁 조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5월20일 노동부는 대법원 판례와 어긋난 혼선을 빚는 17개 행정지침에 대한 정비 작업을 벌여 이 중 일부는 지침을 변경하고 일부는 변경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노동부가 변경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대목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해고의 효력을 다투는 근로자의 조합원 자격을 인정키로 한다”는 것과 “파업 기간중에도 생활보장적 성격의 임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 두 가지였다. 나아가 이장관은 5월18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무노동 부분 임금’ 인정 방침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무노동 부분 임금 공방전으로 말미암아 이장관의 정치력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경제장관 합동 기자회견장에서까지 소신을 고집했던 이장관은 청와대로부터 두차례에 걸친 주의를 받고 끝내는 물러서는 입장을 보였다. 무노동 부분 임금 외에도 최근 현대 사태가 이장관의 입지를 약화시킨 요인으로 지적된다. 현직 장관으로서는 처음으로 두 차례나 현지에 찾아가 직접 중재에 나섰던 이장관은 결과적으로 해방 이후 두 번째로 긴급조정권을 발동한 장관이 되고 말았다.

 그의 개혁적 입장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이장관으로 하여금 무능 고백을 강요한 기득권 세력에게 그 비판이 되돌려져야 한다”는 반론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입장을 적극 옹호하는 쪽에서도 그가 국무위원으로서의 균형 감각과 정치력을 발휘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분석에 동의한다.

 오병문 교육부장관이 문제장관으로 꼽힌 배경은 자질이나 특별한 정책적 실수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소신과 무대응에 있다는 게 중론이다.

 오장관의 이력은 문민정부의 교육부장관으로 손색이 없다. 37년 동안 전남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88년에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교수 직선제 총장으로 선출돼 4년 간의 임기를 마친 전형적인 학자이자 교육자이다. 그런가 하면 80년 광주민중항쟁 때에는 천주교신자 대표로 수습에 적극적으로 나섰다가 계엄군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공직자 재산 공개 때에는 광주시 지산동의 낡은 2층 양옥집 외에는 재산이 없는 것으로 밝혀져 재산가 장관들 가운데에서 이목을 끌었다.

 온건과 소신이 적당히 조화된 독특한 경력에 대한 주변의 복합적인 기대는 그의 입각이 발표된 직후 뒤이어 나온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와 교육부 간부들의 반응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양쪽 다 교육부장관의 취임에 기대를 건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교육문제를 보는 시각이 판이하게 다른 양쪽으로부터 똑같이 환영받은 상황은 오장관이 처할 어려움을 보여준 예고편이기도 했다.

 출범 초기 사정 국면에서 대학입시 부정과 답안지 유출사건 등 사학 관계자와 교육부 관리들이 연루된 굵직한 비리가 줄줄이 터져 나오자 오장관이 교육 개혁과 관련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문교부 감사에서 적발된 부정입학 연루 학부모 명단을 교육적 차원에서 발표를 미루다가 그나마도 부분적으로 공개하는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다. 전교조 문제 역시 답보를 거듭하고 있다.

 오장관 취임 직후 교육부 관리들이 연루된 비리가 줄이어 터져나온 만큼 과감한 인사 쇄신이 기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오장관은 자리 바꿈에 그치는 소극적인 인사만을 단행해 스스로 개혁 행정을 펼 기회를 상실했다는게 교육계 주변의 평가다.

 취임 5개월 만에 통일 관련 부처 안에서 한완상 부총리의 영향력과 입지는 초기에 비해 상당히 취약해졌다. 남북한을 둘러싼 상황의 변화, 보수 세력들의 끊임없는 반발, 한부총리 개인의 정책적 역량과 스타일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당초 한부총리는 통일 정책에 관해 상당히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입각했다. 그는 스스로 남북 문제에 있어서 종래의 대결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 진취적인 정책을 취하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했다. “통일 방안에 연방제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등 파격적인 발언을 하는가 하면, 李仁模 노인의 송환을 주장하며 “남한의 대통령이 아니라 민족의 대통령”이라는 민족지상주의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 동안 통일 정책을 입안하고 주도해온 대북정책 관련자들은 한부총리를 ‘물정을 모르는 낭만주의자’라고 내부적으로 비판하고 반발하면서도 새로운 실세의 위력에 눌려 그 움직임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나 상황은 한부총리의 편이 아니었다. 우선 이노인의 송환 다음날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이 터져나왔다.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접근이 갖는 위험함과 냉정하게 대처해야 할 필요성이 안기부 같은 보수적인 기관을 중심으로 강력히 제기되기 시작했다. 한부총리를 더욱 곤경에 빠뜨린 것은 우리측의 핵문제 해결을 위한 고위급 회담 대표 간의 접촉 제의에 대한 역제안 형식으로 나온 북한의 ‘특사 교환 제의’였다. 정부 내의 보수세력들은 ‘통일 문제를 담당하는 부총리급’이라는 이 제안을 사실상 한부총리를 염두에 둔 제안이라며 공격 자료로 활용했다.

 여기에는 보수적인 시각의 언론이 가세한 측면이 있다. 이어 언론은 통일원이 문익환·임수경 씨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하려 한다는 보도를 내보내면서 통일원의 낭만적인 접근에 대해 일제히 비판론을 개진했다. 한부총리측은 “면담 일정만 잡았다가 그나마도 취소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이미 정치적 상처와 부담을 안은 뒤였다.

 그러나 한부총리의 입지 약화가 남북한의 돌발적인 상황 변수와 보수세력들과의 시각차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니다. 모든 국무위원들이 그렇지만 특히 통일 관련 부처 장관의 경우에는 풍부한 정보, 정책적 대안 능력, 뱃심, 유연한 전략적 사고 능력이 요구된다. 한부총리의 경우 이런 능력을 제대로 가지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정치는 냉엄한 현실이다. 특히 통일 관련부서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한부총리의 한계는 업무 수행 능력의 부족이라는 평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도덕성 면에서 문제가 있는 장관으로는 권영해 국방부 장관이 30%로 다른 장관과 확연한 편차를 보이면서 1위에 올랐다. 이는 공직자 재산 공개를 거치면서 장관들에 대한 도덕성 검증이 어느 정도 이뤄졌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또 그와 함께 최근 동생의 뇌물수수 사건으로 권장관이 입은 타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각료 인선에서 가장 관심을 모았던 국방부장관으로 김영삼 대통령은 권장관을 일찌감치 내정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김대통령의 당선 직후 당시 국방부차관으로서 김대통령을 몇 차례나 극비리에 만난 권장관은 ‘하나회제거’ 문제를 깊숙히 논의했다. 김대통령은 문민 정부의 최대 과제인 군부 개혁과 하나회 제거의 선봉장으로 권장관을 선택했다.

 실제로 권장관은 입각 이후 ‘비리 장성 숙청과 하나회 인맥 제거’라는 걸끄러운 작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보수 세력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 취임 직전부터 권장관을 둘러싼 구설수는 끊이지 않았다. 보수 세력의 조직적인 권국방 흠집 내기는 집요했다. 첫 번째 위기는 공직자 재산 공개때였다. 권장관의 숨겨진 재산에 대한 정보가 언론사 주변에 은밀히 제공됐다. 하지만 이런 공격은 ‘수구 세력의 역정보’라는 판단을 내린 청와대에 의해 무시됐고, 오히려 권장관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율곡 비리가 터져나오면서 이 사안은 율곡 사업에 깊숙히 관련됐던 권장관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리라는 관측이 흘러나왔고, 실제로 이 예측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감사원 감사 결과 권장관의 동생인 영호씨가 무기중개상인 학산실업 대표 정의승씨로부터 5천만원을 받은 사실이 감사원 감사 결과 밝혀져 권장관의 도덕성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다.

 김대통령은 지난 19일 권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그가 제출한 사료를 반려했다. 그러나 도덕성에 결정적인 의문이 제기된 장관이 내부적 반발 세력이 엄존하는 군에 대한 장악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번 여론조사 결과는 국민들 속에 자리잡은 상식적인 의문과 상황 인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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